페라리 캘리포니아 T, 매일 타는 오픈 수퍼카
2016-06-09 08:00:34 글 박영웅 편집장
혈기왕성한 젊은시절, 기아 엘란으로 브릿지 염색을 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달리곤 했던 기자다. 당시 오픈 에어 드라이빙에 대한 낭만보다는 아픈 기억이 더 많아서 그런지 이제는 지붕을 열어젖히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 시승에도 참여할 의사가 없었다. 그런데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우리 인생사처럼 페라리 캘리포니아 T에 오르게 됐다.
마음속으로 ‘그래 페라리니까 꾹 참고 타자’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스티어링 휠에 있는 엔진 스타트 버튼을 눌렀다. 2009년경 잠깐 체험했던 F430 이후 간만에 듣는 ‘도약하는 말’(prancing horse)의 울부짖음이다. 다운사이징한 V8 3.9L 트윈터보 엔진은 페라리 고유의 카랑카랑한 음색이 빠졌다. 그래도 우렁차긴 하다.
운전석과 동반석 뒤에 +2 개념의 시트가 있다
불금을 맞아 오전부터 꽉 막힌 서울 강남을 벗어나고자 이리저리 달렸다. 듀얼클러치 방식 7단 자동변속기는 마치 토크컨버터처럼 물 흐르듯이 기어를 맞물린다. 1, 2단이 빈번하게 오갔지만 클러치 슬립을 최소화하며 기어를 꼭 물고 달린다.
기존 싱글클러치 방식과는 차원이 다르다. 구형 변속기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시내구간에서 부자연스럽게 동력을 끊거나 붙이고, 그만큼 반클러치 연결상태가 길어져 내구성도 나빴기 때문이다.
페라리는 2008년 캘리포니아(1세대)를 내놓으며 계열사 마그네티 마렐리의 싱글클러치 방식 6단 자동변속기(1997년 F355 후기형에 처음 선보였다)를 버리고 독일 게트락제 듀얼클러치를 채용했다. 정말 탁월한 선택이다.
시승차는 매끄러운 변속기 덕택에 시내 드라이빙에서도 스트레스가 적다. 또 폭이 10cm 정도 넓다는 것 빼고는 D세그먼트 준중형차와 크기가 비슷해 막히지 않는 길로 요리조리 빠져나가는데 부담이 없다. 시야도 수퍼카로는 매우 괜찮다. 전반적으로 GT카를 몰 듯 편안하다고 할까? 하긴 미드십 488도 구형 458에 비해 운전이 편해졌다고 한다.
터보 부스트 상태를 알려주는 게이지
서둘러 시내를 빠져나왔다. 캘리포니아는 2008년 공식데뷔 전까지 1960~70년대를 풍미한 보급형 페라리 디노의 후계모델로 알려졌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1957년 데뷔한 250 GT 캘리포니아 스파이더(Spyder가 아니라 Spider다) 계열이었다.
V8 엔진을 프론트에 얹은 전동식 하드톱 컨버터블로 운전석과 동반석 뒤에 +2 개념의 시트를 마련하고 뒤쪽에 유연한 멀티링크 서스펜션을 쓰는 등 GT의 요소를 강조했다. 가끔씩 트랙을 달리는 하드코어 수퍼카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탈 수 있는 수퍼카라는 뜻이다.
전동식 하드톱은 단열 및 흡음재를 넉넉히 채웠다
그 결과 캘리포니아는 고객의 70%가 페라리를 처음 타는 사람들일 정도로 엔트리 모델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또 ‘일상에서 즐길 수 있는 페라리’답게 평균주행거리도 기존 페라리보다 30% 정도 길다고 한다. 기존 고객들에게 연간 약 7,000대의 새차를 안겨주기도 바쁜 페라리가 엔트리급 모델을 개발하느라 들인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
캘리포니아는 2014년 캘리포니아 T로 체인지됐다. 보닛과 앞펜더의 배기구를 공격적으로 다듬고 프론트 그릴도 키웠다. 리어도 테일 파이프를 새로 꾸미고 디퓨저를 확장해 스포티한 분위기를 강조했다.
30여년만에 ‘양산 터보 페라리’ 시대를 다시 연 V8 3.9L 트윈터보 엔진
게다가 엔진을 V8 4.3L에서 V8 3.9L 트윈터보로 바꿔 F40 이후 30여년만에 ‘양산 터보 페라리’ 시대를 다시 열었다. 최고출력은 구형보다 70마력 커진 560마력/7,500rpm, 최대토크는 18.5kg·m 높아진 77.0kg·m/4,750rpm로 0→100km/h 가속 3.6초, 최고속도 316km/h의 화끈한 퍼포먼스를 자랑한다.
전동식 하드톱은 높은 완성도를 보인다. 단열 및 흡음재를 넉넉히 채워넣어 톱을 닫았을 때 쿠페 못지않은 안락감을 선사한다. 오픈 상태에서는 롤바 등이 돌출되지 않고, 톱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수납되어 시각적 만족감이 크다. 아쉽게도 고무 소재의 실 일부가 조잡스럽지만 정기적으로 점검하면 별 문제 없을 듯하다(국내 페라리 고객은 7년간 무상 서비스가 제공된다).
다시 달릴 차례다. 스티어링 휠의 ‘주행기능 셀렉터’(마네티노)를 스포츠로 돌렸다. 자동차 통행량이 많아 캘리포니아 T의 진가를 맛보긴 어려웠지만 다른 운전자들의 분노 바이러스를 활성화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요령껏 쑤셨다. 자연흡기 엔진처럼 예측할 수 있는 토크 분출이 인상적이다.
스로틀을 뗄 때마다 ‘취욱’ 하는 블로오프 사운드가 없다면 터보 엔진임을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다. 초고속 코너링 때 차가 널뛰는 범프 상황에서 밸런스가 무너지는 페라리의 전통적인 약점도 캘리포니아 T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다. 따라서 배짱만 두둑하면 스포츠 주행기술이 없는 사람도 안심하고 내달릴 수 있겠다.
기대에 못미치는 배기음 때문에 아크라포비치 머플러가 절실하다
터널을 몇 차례 지났다. 그 때마다 엔진 회전수를 최대한 높여 시승차의 울부짖음이 터널 안에 울려 퍼지게 했다. 과거 일본 오너들로부터 배운 일종의 에티켓인데, 듣기만 해도 피가 끓는 수퍼카 사운드를 다른 운전자들과 공유(?)하기 위해서란다. 그런데 캘리포니아 T의 배기음은 기대에 못 미친다. 듣기만 해도 페라리임을 알아챌 수 있었던 과거의 ‘왱~’ 하는 소리가 아니다. 여기서 흥이 깨졌다. 슬로베니아제 아크라포비치 머플러라도 달아야겠다.
결과적으로 페라리 캘리포니아 T는 출발과 동시에 악 소리가 나는 수퍼 컨버터블 대신 옆에 앉은 이성에게 호감을 사고자 끊임없이 속닥이며 운전한다는 프렌치들을 위한 컨버터블로 탈바꿈한 것 같다. 그만큼 편안하다는 이야기다. 물론 성능은 여전히 ‘수퍼 울트라 캡’이다. 더 뛰어난 극강의 전투력을 지닌 페라리도 즐비하지만 캘리포니아 T로도 충분하다.
만약 기자가 캘리포니아 T를 구입한다면 키부터 꼭꼭 숨겨야 할 것 같다. 엄마 역할에 충실하느라 바쁜 와이프(주먹이 크다)의 짜릿하고 편안한 애마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 어린 아들이 운전면허 취득연령이 되면 캘리포니아 T로 운전을 배우겠다고 설칠지도 모른다. 이런 시대의 흐름(?)에 꼭 맞는 페라리가 캘리포니아 T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