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콩깍지, 재규어 XJ
예전에 만났던 XJ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세단이었다. 5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2016-08-29 10:12:58 글 김준혁 기자
아주 오랜만에 XJ를 만났다. 거의 5년만이다. 5년 전 만난 XJ는 정말 좋은 차였다. 플래그십 모델이니까 당연히 좋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다. XJ는 계급장 떼고 객관적인 눈으로 평가해도 아주 훌륭했다. 이유는 두가지, 멋진 디자인과 퍼포먼스 때문이었다. 그렇게 XJ는 아주 좋은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아무리 멋진 독일산 플래그십 세단을 안겨줘도 XJ를 선택하겠다고 마음먹을 정도였으니, XJ에 단단히 콩깍지가 씌었던 것 같다.
페이스리프트의 핵심은 헤드램프의 더블 J 블레이드다
지금 다시 만나도 XJ는 여전히 좋은 차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좋았던 부분은 지금도 좋다. 디자인은 여전히 시선을 사로잡는다. XJ의 외관을 보고 누가 싫은 소리를 할 수 있을까? 현재의 XJ가 처음 나왔을 때는 전세대와 너무 다른 모습 때문에 여기저기서 볼멘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하지만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본 XJ는 굉장히 매혹적이었다. 4도어 쿠페같이 날렵한 루프라인과 동급에서 찾아보기 힘들 만큼 극단적으로 넓고 낮은 차체는 최신 XF나 XE보다 멋져 보인다. 그 멋스러움은 5년이 지났어도 여전하다.
오늘 시승하는 XJ는 얼굴에 약간의 변화를 준 페이스리프트 버전. XJ 특유의 늘씬한 실루엣과 날렵함을 지키면서 자잘하게 손을 보았다. 변화는 헤드램프에 집중됐다. 이전 세대의 특징이었던 트윈서클 헤드램프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더블 J 블레이드 LED 주간주행등을 더했다. 이것만으로도 디자인 완성도가 한층 높아진 것 같다. 고급 수입세단이 즐비한 도심에서도 XJ의 존재감은 여전히 크다.
실내도 5년 이상 된 차 같지 않다. 대시보드부터 도어패널까지 하나로 연결된 랩어라운드 디자인은 XJ만의 개성이다.
5년이나 됐지만 나이 든 티가 나지 않아서 좋다. 여기에 신기술 몇가지가 더해졌다. 그중 핵심은 8인치 터치스크린에 적용된 인컨트롤 터치 프로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일단 터치스크린의 감도와 반응속도가 아이패드처럼 부드럽고 빨라졌다. 그뿐만 아니다. 스마트폰에 인컨트롤 앱을 설치하면 폰에서 XJ를 매만질 수 있고, 와이파이까지 지원된다. 하지만 이 기능은 현재 국내에서 쓸 수 없다. 또 하나는 12.3인치 가상 계기판의 그래픽이 바뀐 점이다. 4가지 테마 중에서 고를 수 있으며, 내비게이션 화면을 지원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아쉬움이 남는다. 내비게이션 그래픽이 1억원이 넘는 차값과 재규어의 명성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독일차와 비교해 그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힘이 엄청나고, 조용하다. 가솔린 엔진이 필요없을 것 같다
5년 전 XJ의 퍼포먼스가 뇌리에 박힌 것은 특유의 민첩성과 경쾌함 때문이었다. XJ는 잘 알려진 것처럼 알루미늄 보디를 사용한다. 가벼울 수밖에 없다. 실제로 시승차인 XJ LWB 프리미엄 럭셔리의 공차중량은 1,860kg(영국 기준)에 불과하다. 길이 5,255mm에, V6 3.0L 300마력짜리 디젤 엔진을 얹은 대형세단으로서는 상당히 가볍다.
스티어링 휠을 통해 전달되는 회전감각도 좋아 운전할 맛이 난다. 긴 차체임에도 코너에서 앞뒤가 따로 노는 느낌이 전혀 없다. 예전에도 핸들링이 좋았던 것 같다. 마치 핫해치를 몰고 있는 느낌이다.
재규어 드라이브 컨트롤을 다이내믹 모드로 놓고, DSC OFF 버튼을 1초 이상 눌러 DSC 트랙 모드를 활성화하면(DSC 개입이 최소화된다) 차가 한층 재밌어진다. 가변 댐퍼인 어댑티브 다이내믹스는 승객 모두가 느낄 정도로 단단해지고, 스티어링 휠의 반응속도가 빨라진다. 코너링 때 스로틀을 활짝 열면 뒷바퀴가 흐르는 아주 짜릿한 감각을 즐길 수도 있다. 덩치만 클 뿐 그 느낌이 F-타입 R AWD 같다(F-타입 R AWD와 XJ 3.0D의 무게는 비슷하다). 여기까지는 예전 느낌 그대로다.
아주 오랜만에 XJ를 타다 보니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요즘의 재규어에서 느낀 것이지만, 승차감이 독일차들과는 아주 다르다. 다이내믹 모드가 아닌 일반주행 때는 서스펜션이 굉장히 부드럽다. 덕분에 승차감이 끝내준다. 플래그십 세단다운 모습이다. 하지만 고속주행을 한다든가, 고속 코너링에서 요철을 만나면 가끔씩 차체가 통통 튄다. 충격을 잘 흡수하긴 하는데, 약간의 여운을 남겨놓는다. 노면정보가 확실하게 전달되어 운전자는 피드백을 온몸으로 느끼며 신나게 달릴 수 있다.
보기만 해도 앉아보고 싶어진다. 다만 앉은키가 큰 사람은 조심하길 바란다
VIP를 태우는 뒷좌석은 어떨까? 이번에 시승한 XJ는 기본형인 SWB보다 휠베이스가 125mm 길고, 편의장비가 제대로 갖춰진 LWB 버전이다. 아이패드보다 크고 선명한 10.2인치 디스플레이 2개가 달려 있고, 앞좌석에서 누릴 수 있는 기능을 뒷좌석에서 모두 사용할 수 있다. 편안할 때는 아주 편안한데, 빠르게 달릴 땐 뒷좌석 승객이 힘들어하기도 한다. 따라서 뒷좌석에 사람을 태울 때는 다이내믹 모드를 선택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한없이 좋게만 보였던 XJ를 오랜만에 만나니 콩깍지가 조금 벗겨지는 것 같다. 그래도 XJ는 여전히 훌륭한 차다. 누가 대형 럭셔리 세단을 한대 준다면 XJ를 선택할 거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일부 단점이 있지만 XJ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아직 콩깍지가 덜 벗겨졌나 보다.
<탑기어> 2016년 4월호 발췌 ·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