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태(變態). 변할 ‘변’자에 모습 ‘태’를 써서 ‘모습이 바뀐 상태’를 뜻한다. 일상에서는 ‘보통에서 벗어나 있는 상태’라는 의미로 많이 쓴다. 시승기에 웬 변태 타령이냐고? 모든 차가 비슷비슷해지는 요즘, 감성적으로 확연히 다른 차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오늘의 주인공은 영국 태생 재규어의 비슷한 듯 다른 형제, XE S와 XF S다. 3일 동안 시승하는 내내 필자의 얼굴엔 음흉한 미소가 번졌고 머릿속엔 ‘감성변태’이라는 단어가 맴돌았다.
XE는 유럽 기준 D세그먼트 콤팩트 세단으로 분류되는 재규어의 막내다. BMW 3시리즈, 메르세데스-벤츠 C-클래스 같은 독일산 D세그먼트 세단을 정조준 한다. XF는 XE의 형님뻘이다. D세그먼트보다 한 체급 높은 E세그먼트 미들 세단 시장에서 독일 브랜드와 경쟁한다. BMW 5시리즈나 메르세데스-벤츠 E-클래스가 라이벌이다.
어느쪽이 XE이고, XF일까? 둘은 너무 닮았다
재규어 형제는 플랫폼을 공유한다. 완전히 새로 개발해 XE에 처음으로 쓰인 iQ 알루미늄 아키텍처는 무게를 줄여 효율과 운동성을 함께 잡았다. XF 기준 스틸 보디였던 이전 모델보다 무게를 190kg 덜어내면서 차체 강성은 28% 높아졌다. 앞뒤 무게배분도 50:50에 가깝다. 긴 휠베이스는 재규어다운 늘씬한 차체 비율을 이끌어낸다. V6 엔진이 들어 있는 엔진룸은 8기통까지 염두에 뒀는지 공간에 여유가 있다. 무게배분을 위해 배터리는 트렁크에 넣었다.
XE와 XF의 외모는 영락없는 차도남이다. 고전적 디자인이 특징이었던 과거 재규어와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첫인상부터 ‘J 블레이드’라 이름 붙인 J자 모양 LED 주간주행등이 현대적인 느낌을 전한다. S 모델인 시승차는 시커먼 그물망 그릴, 범퍼 하단 흡기구와 더불어 윈도 마감재를 모두 검게 처리해 까칠함을 강조했다.
듀얼 머플러와 S배지, 커다란 공기흡입구. 재규어 S버전의 특징이다
자동차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차체 비례는 전통적인 재규어 그대로다. 옆에서 봤을 때 낮고 길어 늘씬하다. XE보다 긴 XF는 훨씬 더 미끈해 보인다. 반면 상대적으로 짧은 XE는 트렁크 리드를 뒷유리 각도와 맞춰 쿠페 같은 지붕 라인이 트렁크 중간까지 매끄럽게 연결된 듯한 착시효과를 낸다. 스포츠카처럼 앞이 길고 트렁크가 짧은 ‘롱 노즈, 숏 데크’ 스타일을 잘 살렸다. 경쟁 브랜드의 익숙한 패밀리룩에 싫증난 사람들에게는 재규어다움을 살린 완성도 높은 디자인은 확실한 차별점이다.
차에 타는 순간 곳곳에서 특별한 감성이 풍겨나온다. 도어만 열어도 계기판과 모니터, 심지어 헤드업 디스플레이까지 쉴새 없이 재규어 로고를 띄운다. 은연중에 ‘나 재규어야, 독일차와는 달라’라고 얘기 하는 것 같다. 엔진 스타터 버튼은 심장 박동처럼 붉게 깜박이고 시동을 걸면 재규어 특유의 로터리식 재규어 드라이브 셀렉터가 스르륵 올라온다. XF의 경우 좌우 에어벤트가 회전하며 열리는 세리머니까지 펼친다. 시트에 앉으면 낮은 대시보드가 색다른 느낌을 제공한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들은 성능과 관계 없는 부분이다. 가장 경쟁이 치열한 D·E세그먼트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이렇게 브랜드가 가진 특별한 감성을 강조해야 한다. 비싼 프리미엄 브랜드 자동차를 사는 일은 단순히 성능이 좋아서가 아니다. 브랜드가 지닌 고유한 가치와 전통까지 사는 것이다. 따라서 소비자가 지갑을 열 명분을 만들어주기 위해선 특별함을 계속 강조해야 한다.
XF S에는 최신 인컨트롤 터치 프로가 쓰인다
빨강과 검은색의 대비가 강렬한 시트는 검은색으로 마감한 헤드라이닝과 더불어 스포티한 느낌이 물씬하다. XF S는 알칸타라 소재 헤드라이닝을 써서 더 고급스럽다. 등급별로 3~5가지에 이르는 다양한 색상을 선택할 수 있다.
편의장비도 충분하다. 둘 다 17개 스피커가 달린 메리디안 서라운드 시스템과 함께, 앞좌석 통풍시트와 뒷자리 열선, 스티어링 휠 열선, 전동개폐 트렁크를 갖췄다. XF S는 재규어의 최신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인 인컨트롤 터치 프로를 내장한 10.2인치 고해상도 모니터와 12.3인치 LCD 가상 계기판, 인텔리전트 크루즈 컨트롤까지 달렸다.
그럼에도 몇가지 아쉬운 부분이 눈에 띈다. 우선 두 차 모두 시동을 끄면 승하차가 편하도록 스티어링 휠과 시트 위치가 자동으로 조절되는 이지액세스 기능이 없다. 시승차인 XE S, XF S는 역동적인 드라이빙을 염두에 둔 모델인 만큼, 운전자가 스티어링 휠에 가깝게 앉는 경우가 많다. 감성적인 부분을 많이 강조했지만 이런 사소한 부분을 놓친 점은 안타깝다.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은 그래픽이 화려하고 해상도가 높아 일견 좋아 보이지만 실제로 써보면 작동이 느려 답답하다. 지니맵을 쓰는 XE의 한국형 내비게이션이나 본사가 개발한 XF의 내비게이션 시스템 모두 썩 만족스럽지 못하다(최근 데뷔한 최신형 F-페이스에는 T맵이 깔린다).
운전자 중심 XE는 역동적인 운전에 초점을 맞춰 몸에 꼭 맞춘 듯 운전석 공간이 조여져 있다
실내 공간은 차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운전자 중심 XE는 역동적인 운전에 초점을 맞춰 몸에 꼭 맞춘 듯 운전석 공간이 조여져 있다. 반면 동승자도 배려한 XF는 공간에 여유가 있다. 뒷좌석에 앉아 보면 이런 특성이 두드러진다. XE의 뒷자리는 가파르게 떨어지는 루프라인 때문에 머리 공간이 많이 좁고 다리 공간도 부족하다. 센터터널도 넓어 뒷자리 중앙에 타는 사람은 쩍벌 포즈를 취할 수밖에 없다. 열선까지 달아주는 정성을 보였지만 뒷자리 거주성은 경쟁모델 중 가장 떨어진다. XF의 뒷자리는 여유 있다. 다리 공간이 충분한데다 날렵한 루프라인에도 불구하고 머리 공간을 확보했다. XE와 마찬가지로 센터터널이 넓지만 4명이 탄다면 큰 문제는 아니다.
둘 다 앞좌석은 14방향으로 조절되는 스포츠 시트다. XE(우)의 뒷좌석은 여유롭지 못하다
XE S와 XF S의 앞좌석에는 14방향으로 조절되는 스포츠 시트가 달린다. 허벅지 받침대 길이와 옆구리 지지대까지 모두 조절된다. 시야도 적당하고 편안한 자세가 잘 나온다. 개인적으로는 팔이 짧아 XF의 운전석에서 윈도 버튼을 조작하기 불편했다. XE는 시트 메모리 버튼과 윈도 버튼을 위아래로 배열해 조작에 불편함이 없다. 반면 일렬로 나열된 XF의 윈도 버튼은 너무 멀어서 조작할 때마다 몸을 약간 수그려야 했다.
달리기 시작하면 경쟁모델과 차별화되는 재규어만의 특징이 한층 두드러진다. 우선 승차감이 아주 좋다. 독일차 심지어는 독일차를 닮고 싶어하는 일본이나 미국의 프리미엄 브랜드 모델과 비교해도 굉장히 부드럽다. ‘어댑티브 다이내믹스’ 전자식 댐퍼를 다이내믹 모드로 설정해도 서스펜션이 과도하게 딱딱해지지 않는다. 따라서 노면이 고르지 않은 도로를 달릴 때도 접지력을 잘 유지한다.
XE S는 340마력을 내는 V6 3.0L 수퍼차저 엔진을 얹고 뒷바퀴를 굴린다
XE S는 340마력을 내는 V6 3.0L 수퍼차저 엔진을 얹고 뒷바퀴를 굴린다. 제원표상 0→100km/h 가속성능은 5.1초. BMW 335i가 국내에 들어오지 않았기에 메르세데스-벤츠의 C450 AMG나 인피니티 Q50S 하이브리드를 경쟁상대로 꼽을 수 있다.
동력성능은 부족함 없다. 폭발적인 힘은 아니지만 아주 매끄럽고 빠르게 속도를 높인다. 배기음도 스포츠 세단으로서 딱 적당한 수준이다. 시끄럽지 않고 음색도 좋아서 운전의 즐거움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8단 자동변속기는 기본적으로 엔진 회전수를 낮게 쓴다. 노멀 모드는 부드러움에 초점을 맞춰 변속기의 반응이 한박자 늦다. 변속 셀렉터를 S에 놓고 주행 모드를 다이내믹으로 설정하면 성격이 180도 변한다.
회전수가 레드존인 6,500rpm에 이르러 퓨얼컷이 걸리더라도 기어가 바뀌지 않는다. 변속이 한결 빠릿빠릿해지며 회전수를 높게 쓴다. 변속할 때 회전수 보정기능도 깔끔하게 작동한다. 스포츠 드라이빙을 즐기기에 적당한 모습이다.
XE의 동력성능은 부족함 없다. 폭발적인 힘은 아니지만 아주 매끄럽고 빠르게 속도를 높인다
8단 자동변속기와 엔진의 조화도 뛰어나다. 일부 고성능 모델의 경우, 판매에 큰 영향을 미치는 가속성능을 높이기 위해 회전수가 비교적 낮은 터보 엔진과 기어비가 높게 설정된 다단 변속기를 조합하기도 한다. 이 경우 회전수가 빠르게 치솟고 변속기는 쉴새 없이 움직이지만 속도계는 예상보다 더디게 올라가 적응에 시간이 걸린다.
반면 재규어 XE S는 회전수가 올라가는 속도와 변속 시점이 잘 맞아 위화감이 없다. 엔진 반응도 선형적이고 회전질감이 부드러워 만족스럽다. XE S가 ‘감성변태’인 결정적인 이유는 핸들링에 있다. 스티어링 반응이 날카롭지는 않지만 뒷바퀴 느낌이 상당히 역동적이다. 호불호가 갈리는 스타일이다. 급격한 거동변화가 일어나지 않도록 안정적으로 설정하는 요즘의 흐름과 뚜렷이 구분된다.
최근 나온 독일차나 심지어 캐딜락 ATS 같은 차까지도 어떤 상황에서도 뒷바퀴가 노면을 움켜쥐고 굳건히 버티는 언더스티어 성향으로 세팅을 한다. 좋게 말하면 안정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둔하고 재미가 없다.
XE S는 코너를 돌아나갈 때 몰아붙일수록 앞머리가 안쪽을 파고든다. 이렇게 뒷바퀴가 살짝 밀려나는 느낌이 XE 핸들링의 특징이다. 슬라럼을 해보면 더 명확하게 느껴진다. 운전이 능숙하고 스포츠 드라이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XE가 지닌 최고의 매력이라고 평가할 것이다. 운전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위화감을 느끼거나 안정감이 떨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다. XE가 경쟁 모델과 구분되는 커다란 특징이다. 재규어가 좋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D세그먼트는 경쟁이 가장 치열한 시장이다. 어떻게든 개성을 강조해야 눈에 띌 수 있다.
XF는 XE S와 같은 V6 3.0L 수퍼차저 엔진이지만 최고출력 380마력으로 40마력이 높다
XF S는 XE와 비교해 훨씬 안정적이다. XE S와 같은 V6 3.0L 수퍼차저 엔진이지만 최고출력 380마력으로 40마력이 높다. 휠베이스가 XE보다 길고 네바퀴굴림이어서 움직임이 진중하고 안정적이다. XF의 AWD는 달리는 중에는 뒷바퀴굴림과 큰 차이가 없는 움직임을 보인다. 주차할 때처럼 저속에서 스티어링 휠을 끝까지 돌리면 앞바퀴에 동력이 전달되는 것이 느껴져 네바퀴를 굴린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다.
XF도 XE와 마찬가지로 다이내믹·노멀·에코·윈터 네가지 주행 모드를 지원한다. XE보다 더 많은 곳에 앰비언트 라이팅이 들어가 있고, 풀 LCD 계기판을 갖춰 주행 모드에 따른 변화가 훨씬 극적이다. 가령 다이내믹 모드로 설정하면 계기판만 붉게 변한다. XF는 계기판과 더불어 운전자를 감싸는 앰비언트 라이팅의 색깔도 바뀌어 주변이 붉게 물든다. 이런 감성적인 부분에 힘입어 체감성능은 더욱 상승한다.
계기판은 다이내믹 모드에서 붉게 변한다. 네 가지 주행모드는 두 차 공통이다
아쉽게도 가속감은 XE보다 떨어진다. 출력이 높지만 무게가 늘어난 탓이다. 제원상 0→100km/h 가속성능도 5.3초로 XE보다 0.2초 뒤진다. 하지만 형님답게 점잖은 주행감각을 보인다. 부드러운 승차감은 XF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변속기 세팅은 XE와 거의 같다. 100km/h에서의 회전수도 1,700rpm으로 XE와 같다.
XF는 실내가 한층 여유롭고 고급스러우며, 승차감도 부드럽게 다듬어 XE와 차별화했다. 국내에 XF S AWD를 들여온 것도 차의 성향에 잘 어울리는 선택이다. 무게가 늘어났음에도 XE와 같은 브레이크를 쓴 점은 아쉽다. XE S에서 스포츠 세단으로서 꼭 알맞은 성능을 보였던 빨간 캘리퍼 브레이크가 XF S에선 빠듯한 느낌이다. 성능이 떨어지지는 않지만 XE S에서 충분한 제동력을 보이던 브레이크가 XF S에서는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가속감은 XE보다 떨어진다. 출력이 높지만 무게가 늘어난 탓이다
새로운 알루미늄 플랫폼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재규어 XE와 XF는 너무나 익숙해진 독일의 빅3 프리미엄 브랜드와는 확연히 구별된다. ‘아름다운 고성능차’로 불리는 재규어답게 외관에서부터 전통과 현대적 감각이 잘 어우러졌다. 공간 활용성에서 부족한 부분이 보이지만 재규어만의 감성이 깃든 인테리어 역시 매력적이다. 부드러운 서스펜션으로 승차감을 좋게 하고, 개성 있는 핸들링으로 ‘운전의 즐거움’이란 본질을 강조했다.
독일 3사가 장악한 프리미엄 D·E세그먼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시장이고 그만큼 경쟁이 치열하다. 후발주자인 재규어는 이들과 경쟁하기 위해 자신만의 DNA를 택했다. 남이 갔던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앞설 수 없기에 재규어의 판단이 옳았다고 본다. 물론 첫술에 배부를 순 없다. 이제 소비자의 선택을 지켜볼 일만 남았다.
재규어 XE와 XF는 너무나 익숙해진 독일의 빅3 프리미엄 브랜드와는 확연히 구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