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츠 E300, 새로운 세그먼트에 눈뜨다
2016-10-05 08:00:00 글 김종우 기자
직업 특성상 여러 메이커의 다양한 차종을 경험한다. 지인들에게 가장 자주 듣는 말은 “어떤 차가 가장 좋았냐”이다. 이어서 바늘 가는데 실 가듯이 “산다면 뭘 살래?”라는 질문이 따라온다. 차를 산다면 뭐가 좋을까? 콤팩트한 차체와 날카로운 주행감각을 지닌 해치백, 친구들을 한가득 태우고 트렁크에 이것저것 싣고 떠날 수 있는 SUV, 연인과 단둘이 타고 오픈 에어링을 즐길 수 있는 로드스터 등이 떠오른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시승기를 쓰는 이 순간 생각지도 않았던 E세그먼트에 강렬하게 끌리고 있기 때문이다.
E세그먼트는 길이 4.7~5m 정도인 세단을 말한다. 우리나라 준대형급으로 현대차 그랜저 정도다(쏘나타나 K5가 커져서 이 범주에 들지만 D세그먼트에 속한다). 이 세그먼트를 생각할 때 연상되는 단어는
‘부모님차’, ‘중년’, ‘심심하고 재미없음’, ‘조용하고 안락함 강조’ 등이다. 즉 30대 초반 꽃청춘인 기자의 생활 패턴과는 어울리지 않는 차다. 그런데 지금 손에는 신형 E-클래스 키가 쥐어졌다. 이름까지 E세그먼트임을 숨기지 않는다.
메르세데스-벤츠 E-클래스는 BMW 5시리즈, 아우디 A6과 함께 독일 프리미엄 E세그먼트 세단을 대표하는 차다. 1993년 데뷔 후 최근 5세대로 진화하며 전세계에서 인기를 끌었다. 우리나라는 특히나 E-클래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해서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번째로 많이 팔렸다. 그중 4세대 후기형은 밀어내기식 판매로 서울 강남 3구에서 택시만큼 많이 보인다. 고리타분한 이미지에 희소성마저 없으니 눈길이 가지 않을 수밖에….
올초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데뷔한 5세대는 칭찬이 어마어마해 궁금증이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자국 브랜드를 티나게 추켜세우는 영국 <탑기어> 기자들도 E-클래스에 대해서는 칭찬일색이다. 재규어 XF와 비교하면서까지 말이다.
외관은 이전 세대에 비해 작지만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특히 헤드라이트가 훌륭하다
외관은 이전 세대에 비해 작지만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새로운 헤드라이트를 적용했고(은은한 파란색 불이 들어오는데, 꽤 매력 있다) 범퍼 하단 형상이 바뀌었다. 앞모습과 달리 뒷부분은 구형과 확연히 구분될 정도로 많이 달라졌다.
와이드 스크린 콕핏이 압권이다
‘획기적으로 바뀐 부분도 없는데 왜들 오버야’라고 생각하며 운전석에 앉으니, 경쟁모델보다 1,000만원 가까이 비싸고 할인도 없지만 잘 팔리는 이유를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외관? 차에 탈 때와 내릴 때 말고는 볼일이 별로 없다.
처음 S-클래스를 접했을 때에는 고급스러움이 철철 흐르는 실내에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당연히 최고급 모델이니까 이 정도는 돼야지’라는 생각에 별 감흥이 없었다. E-클래스는 달랐다. 준비 없이 한방을 맞은 기분이다.
디테일이 화려하고 고급스럽다
S-클래스 인테리어를 기반으로 했다는 얘기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좌우로 펼쳐진 와이드 스크린 콕핏과 우드 트림, 유광 마감재, 가죽 등 고급스러움이 차고 넘친다. 특히 2개의 12.3인치 스크린의 해상도는 애플 레티나 디스플레이를 보는 것 같다. 요즘 필수인 애플 카플레이와 구글 안드로이드오토(국내 법규상 사용 불가)도 설치돼 있다.
뒷좌석 공간도 넉넉하다
실내를 구경하느라 흘린 침을 닦고 시승을 시작했다. E300은 I4 1991cc 가솔린 터보를 얹는다. 최고출력 245마력, 최대토크 37.7kg·m이고 9단 자동변속기와 조합을 이룬다. 시승차는 네바퀴굴림이다. 가속페달은 무척 부드럽다. 조용한 실내와 부드러운 초기 거동은 마치 물위를 미끄러져 가는 듯하다. 스티어링 휠도 가볍고 여유롭다. 독일차에서 느껴왔던 날카로운 반응과는 다르다. 부드러운 서스펜션도 유연한 달리기에 한몫 한다. 중저속에서는 이런 세팅에 불편함이 없는데 고속구간에서는 다소 튀는 경향을 보인다.
I4 1991cc 가솔린 터보. E300은 V6에서 4기통으로 다운사이징을 실현했다
모드에 따라 차의 성격이 달라지지만 주고객층을 감안한 듯 극적인 변화는 없다. 스포츠 모드를 택하면 페달 감각이 조금 민감해지고 회전수가 높아진다. 이 급에서 더 스포티한 감각을 원한다면 곧 등장할 CLS-클래스를 고려하는 게 낫다.
메르세데스-벤츠의 첨단 주행기술을 적용한 인텔리전스 드라이브는 S-클래스보다 훨씬 진화했다.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을 활성화하면 자율주행차처럼 스스로 차간거리와 차로를 맞추며 달리고 앞차의 주행 궤적까지 추적한다.
부드럽고 부드럽다, 매우
칼 같은 핸들링과 단단한 서스펜션, 묵직한 운전감각을 지닌 차가 기자의 스타일이라고 생각해왔다. 이를 위해 뒷골 당기는 타이트함과 요철에서의 불편함은 감내해야 한다고 믿었다. E-클래스를 시승해보니 오랜 시간 운전해도 피로하지 않고 동승자에게 미안함을 느낄 필요가 없는 차도 충분히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함께하는 사람까지 생각할 나이가 된 것일까? 차를 선택함에 있어 고민거리가 늘어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