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의 시대는 갔다. 예전에는 스포츠카를 다룰 때 종종 퓨어(pure)라는 단어를 들먹이곤 했다. 순수하게 역동성만을 추구한 차다. 승차감은 돌 바퀴가 달린 나무 의자를 타고 가는 것마냥 엄청나게 딱딱하다. 스티어링 휠과 페달은 녹슬어 들러붙은 나사처럼 뻑뻑해서 타고 나면 어깨는 빠지고 다리에는 쥐가 날 지경이다.
무게를 줄인답시고 에어컨을 달지 않아 사우나에 들어간 것처럼 땀은 비 오듯 흐른다. 심심해도 오디오가 없는 탓에 들을 수 있는 음악은 배기음과 풍절음, 타이어 마찰음뿐이다. 게다가 이들의 음량은 어찌나 큰지 귀가 먹먹해지기 일쑤다.
스포츠카도 순해지는 시대지만 별종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불편하기는 하지만 퓨어 스포츠카는 극한 역동성과 짜릿함을 안겨줬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구입할 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이제 그런 차들은 고대유물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찾아보기 어렵다. 구매층의 취향이 바뀌어 불편하면 팔리지 않는다. 애초에 그런 차에 관심 없는 사람들까지 끌어들이려면 순해지는 수밖에 없다.
세상물정 모르고 날뛰던 총각이, 결혼해서 자식이 생기고 하면서 성질 죽이고 현실에 순응하는 그런 상황이랄까. 요즘 스포츠카들은 하나같이 평상시에도 편하게 탈 수 있는 ‘에브리데이 스포츠카’라고 외친다.
양산차의 고성능 버전은 일상성이 더 강하다. 양산차의 장점에 스포츠카의 성능을 입혔으니 당연한 일이다. 편하고 안전하게 고성능을 발휘하다 보니 흥분은 되는데 자극이 약하다. 요즘 유행하는 VR처럼 눈으로는 뭔가 짜릿한 상황을 경험하는데, 몸에는 별다른 자극이 없는 그런 기분이다.
하지만 이단아는 늘 있는 법. 과거 순수 스포츠카만큼은 아니더라도 순도가 높은 고성능차들이 간간이 눈에 띈다. 이들은 빠른 가속만으로 흥분을 유도하는 평범한 차들과 달리, 다양한 자극제를 구비해 각기 다른 흥분을 일으킨다.
포르쉐 마칸 GTS, 캐딜락 ATS-V, 폭스바겐 골프 R. 자극제들을 모아놓고 보니 마침 세그먼트도 제각각이다. 이들이 똑같은 퍼포먼스를 발휘하도록 세 회사가 작당하지 않은 이상 성능은 차이날 수밖에 없다. 자극제의 효능이 다양하니 흥분되는 느낌도 분명히 다를 터. 약은 섞어 먹지 말아야 하지만 이번 시승에서 그런 철칙을 지킬 사람은 없다. 자극제 세개를 한꺼번에 맞고 각기 다른 흥분이 겹쳐 기절하거나 마비가 올지도 모를 일이다.
ATS-V와 골프 R은 정식 고성능 모델이다. 마칸 GTS는 터보와 S 모델 사이에 자리잡는다. GTS라는 꼬리표는 역동성을 강화한 모델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들은 양산모델의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디테일 변화는 충분히 ‘뭔가 다른 차’라는 사실을 짐작하게 한다.
고성능 티가 제법 나는 ATS-V
고성능 모델 티가 가장 많이 나는 차는 ATS-V다. 시승차는 카본 패키지다. 각지고 날선 스타일로 원래부터 개성이 강한데, 앞쪽 스플리터와 보닛의 송풍구, 디퓨저 등을 카본으로 둘러 더욱 과격해 보인다. 스포일러도 큼지막하다.
ATS-V의 실내는 외부와는 달리 고성능치고는 차분하다
휠은 19인치는 넣어도 될 법한데 18인치에 머물고, 모양새도 무난하다. 정장에 운동화를 신는 믹스매치 룩처럼, 어울리지만 뭔가 정도를 벗어난 느낌이다. 실내는 차분하고 깔끔하게 잘 마무리했다. 투박한 계기판이 흠이라면 흠.
마칸은 디테일을 검은색으로 장식하는 GTS 모델의 특성을 잘 살렸다. 붉은색 도장 부분을 빼면 검은색이 아닌 부분이라고는 번호판과 포르쉐 엠블럼 정도다. 머플러도 검정, 심지어 이름표까지 무광 검정으로 코팅했다. 포르쉐는 선택장비가 많고 가격이 비싸다는 사실에 모두가 공감한다. 마침 기자 셋이 까만 이름표를 보자마자 “이거 칠하는데 몇십만원 들었겠다”는 소리가 동시에 터져나왔다.
GTS는 검정색이 포인트
신분은 SUV이지만 느낌은 전혀 SUV가 아니다. 멀리서 얼핏 보면 덩치가 있는 해치백처럼 보인다. 역동성을 강화한다고 다른 마칸보다 지상고를 15mm 낮췄다. 1.5cm가 큰 숫자는 아닌데 바닥에 달라붙어 보이는 효과가 은근히 크다. D필러는 45도 각도로 매끈하게 흘러내린다. 쿠페형 SUV라고 해도 될 정도다. 층층이 날선 라인을 집어넣은 전면부 흡기구와 21인치 휠 등이 역동적인 분위기를 키운다.
딱 포르쉐다. 버튼은 여전히 많다
실내는 고급차에 걸맞게 화려하고 고급스럽다. ‘1버튼 1기능’ 원칙은 여전해서 버튼이 무척 많지만 보기 좋게 정리해놨다. SUV여서 공간 활용성은 좋다.
차별화 포인트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골프 R은 시퍼런 보디 색상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기대 앉았다가는 옷에 묻어날 것처럼 색이 진하다. 과격한 멋은 덜하지만 범퍼를 좀 바꾸고 19인치 휠을 끼워서 일반 골프와 구분은 된다. 스모크 효과를 넣은 테일램프와 은색 사이드미러 등 고전적인 효과도 고성능 모델을 구분하는 요소다. 실내는 일반 골프보다는 약간 고급스러운 수준. 소재에 변화를 줘서 고성능 분위기를 살짝 살렸다.
골프 R의 실내는 일반 골프보다 약간 더 고급스럽다
핫해치는 제원을 따질 필요도 없이 아무거나 골라도 재미가 넘치지만, 외모만 놓고 본다면 3대 중에서 골프 R이 끌어당기는 매력이 제일 약하다. 실제로 타면 얌전한 외모는 과격한 성능을 감추기 위한 속임수라는 걸 알 수 있다.
ATS-V vs 마칸 vs 골프 R. 모두 과급기를 달았다. 터보 시대가 실감난다
2.0L 터보 엔진의 출력은 292마력, 최대토크는 38.7kg·m다. 동급에서는 상위 5% 안에 드는 고성능이지만 ATS-V나 마칸 GTS에 비해서는 약하다. 숫자의 열세를 만회하는 가장 큰 무기는 무게. 1,540kg으로 ATS-V보다는 195kg, 마칸보다는 430kg이나 가볍다. 과장 좀 하자면 가뿐하게 날아다닌다. 주행 모드는 노멀·레이스·에코·개별 등 4가지로 구성된다. 개별 모드에서는 스티어링과 엔진, 코너링 라이트, 냉난방 시스템을 각각 조절할 수 있다.
하체는 매우 단단하다. 충격흡수라는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에코 모드가 그래도 가장 순한 상태인데 영 편하지가 않다. 아주 매끈한 도로를 달릴 때는 좀 낫지만 보통상태만 돼도 노면상태를 너무 상세히 알려준다. 아무런 세팅을 하지 않은 구형 서스펜션을 달아놓은 듯 절그럭거리고 딱딱한 원초적 감성을 드러낸다. 스포츠 주행을 할 때는 고맙지만 일상주행에서는 허리가 저릴 지경이다.
가속은 빠르고 경쾌하다. 가속페달을 밟는 즉시 가볍게 치고나간다. 변속기는 6단 더블클러치(DSG). 단수를 내릴 때는 무지 빠르고 올릴 때는 슬며시 부드럽게 회전수를 낮춘다. 레이스 모드에 들어서면 배기음이 자극적으로 커진다.
가속은 빠르고 경쾌하다. 가속페달을 밟는 즉시 가볍게 치고나간다. 변속기는 6단 더블클러치(DSG). 단수를 내릴 때는 무지 빠르고 올릴 때는 슬며시 부드럽게 회전수를 낮춘다. 레이스 모드에 들어서면 배기음이 자극적으로 커진다.
스티어링은 근육이 긴장할 정도로 탄탄하다. 준중형 해치백인데 네바퀴굴림을 집어넣었다. 여기에 전자식 차동잠금장치(LSD)와 언더스티어를 예방하는 XDS 기술을 추가해 안정성을 극대화했다. 평소 앞바퀴를 굴리다가 이상이 감지된다 싶으면 순식간에 동력배분이 이뤄진다. 스티어링의 움직임에 따라 정교하게 라인을 그린다. 웬만해서는 꿈쩍도 하지 않고 밀린다 싶으면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자연스럽게 자세를 교정한다. 과하다 싶으면 그제서야 노란불이 깜박이며 주의를 준다.
너무 안정적이면 재미가 반감된다. ESC 스위치를 끄면 ESC 개입이 느려지는 ‘ESC 스포츠 모드’에 돌입한다. 운전자가 테크닉을 발휘할 여지를 좀더 안겨준다. 이마저도 불만이면 ESC를 꺼버리면 된다. 이제부터는 절벽 아래로 떨어지거나 나무에 처박거나 하는 책임이 운전자에게 돌아온다. 폭우가 내리는 산악 와인딩에서 ESC를 끄고 달리는 담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서킷을 기약하며….
ATS-V vs 마칸 vs 골프 R. 다양한 주행 모드를 갖췄다
골프 R이 자비심 없는 딱딱한 하체로 말초신경을 자극한다면 ATS-V는 과격한 감성으로 심장에 충격을 준다. 힘은 세 차 중 가장 강력하다. V6 3.6L 트윈터보 엔진의 최고출력은 470마력, 최대토크는 61.4kg·m다. 게다가 뒷바퀴굴림이다. 괜히 까불다가는 몇분 타지도 못하고 저 세상 사람이 돼 있을 것 같은 두려운 마음이 앞선다.
우선 탐색 시간을 갖기 위해 가장 순한 투어 모드로 시작한다. 단단한 기운이 느껴지지만 그럭저럭 탈만 하다. 골프 R보다는 편하다. 기본 파워가 있어서 치고나가는 순발력도 여유 넘친다. 변속기는 8단 자동. 엔진힘을 좀더 진득하게 붙들고 늘어지는 듯한 변속은 상향 하향 모두 부드럽게 타고넘는 스타일이다.
스포츠 모드로 바꾸니 이제 좀 긴장하면서 다루라는 신호를 보내듯 엔진 반응이 빨라지고 스티어링이 예민해진다. 하체에 힘이 들어가고 즉각 가속태세를 갖추기 위해 엔진 회전수가 높아진다. 최대토크 분출 시점은 3,500rpm으로, 터보 치고는 높은 편. 즉각적으로 튀어나가기 보다는 두 손에 기를 모아 장풍을 발사하듯 살짝 뜸들이다 무섭게 밀어낸다. 0→60mph(97km/h) 가속은 3.8초로 고성능차 중에서도 상위권이다.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으면 피가 쏠려 어지러울 지경이다. 배기음도 세 차 중에서 가장 강렬하게 귓구멍을 후벼판다.
스티어링은 묵직하고 하체는 단단하다. 전자식 차동제한장치를 갖췄고 1,000분의 1초로 노면상태를 파악해 반영한다는 마그네틱 라이드 컨트롤이 달려 있다. 트랙션 컨트롤과 차체주행안정 시스템을 통합한 트랙션 매니지먼트 시스템도 도입했다.
장비들만 보면 ‘절대안정’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안정적이지만 그 특성을 속에 감춰뒀다. 속도를 높이면 불안하게 건들거리고 하체의 최적화가 너무 빨리 이뤄져서 그런지 접지가 불안하게 느껴진다. 괜히 잘못 다뤘다가는 뒤가 휙 돌아가 뒤따라오는 마칸과 골프에 탄 운전자들과 마주보고 겸연쩍게 미소를 나누는 일이 생기는 건 아닌지 우려되기도 한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세 차 중 유일한 뒷바퀴굴림인 ATS-V는 굴림방식 값을 톡톡히 했다. 코너에서 과감하게 스티어링을 틀고 가속페달을 밟으면 자연스럽게 뒤가 흐르며 매끈하게 방향을 돌린다. 진입각이 서툴거나 속도가 높다 싶으면 자세제어장치가 개입한다. 물고기가 꼬리 지느러미를 좌우로 펄떡거리듯 차체가 살짝 요동치다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머리를 돌린다.
주행 모드의 최고봉은 트랙 모드다. 서킷에서 최적화된 성능을 발휘하도록 차체의 특성을 변화시킨다. ATS-V는 매끈하게 닦인 서킷이 잘 어울리는 차다. 일반도로에서 편하게 탈 차는 아니다. 물론 과격한 감성에 익숙한 사람은 예외다.
ATS-V vs 마칸 vs 골프 R. 실제 최고속도와 일치하지는 않지만 심장을 두근거리게 한다
이제 남은 차는 마칸 GTS. V6 3.0L 트윈터보의 출력은 360마력, 최대토크는 51.0kg·m다. 일반 운전자 입장에서 첫 느낌은 대만족이지만, 고성능을 원하는 운전자로서는 실망이었다. 노멀 모드에서는 정말 고요하고 부드러웠다. GTS 표식을 떼버리는 게 맞지 않나 싶을 정도였다. ‘역시 SUV는 어쩔 수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포르쉐가 아무리 수익에 눈이 멀어 타락했다고 하더라도 기본기까지 버릴 브랜드는 아닌데….
마칸 GTS의 진가는 스포츠 또는 스포츠 플러스 모드에서 제대로 드러난다. 성격을 극단적으로 분리해놨다.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스포츠나 스포츠 플러스 모드에서는 회전수가 4,000rpm을 유지한다. 순간적으로 치고나가는 펀치력이 꽤 강력하다. 변속기는 7단 더블클러치(PDK). 하향은 빠르고 상향은 부드럽게 변속이 이뤄진다. 스포츠 플러스 모드에서는 기어가 맞물릴 때 절그럭거리다 착 물리는 수동 느낌을 구현한다. 순간 차체가 덜컹거리지만 느낌은 좋다.
SUV지만 높이와 지상고가 낮아 자세는 바닥에 웅크린 듯한 형태다. 움직임도 운전대를 움직인 만큼 깔끔하게 방향을 튼다. 댐퍼는 컴포트, 스포츠, 스포츠 플러스로 조절할 수 있다. 와인딩에서도 SUV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민첩하고 재빠르게 몸을 요리조리 튼다.
네바퀴굴림은 평상시에는 앞뒤 2:8 정도로 구동력을 배분한다. 직진 가감속 때는 구동력 배분이 활발하게 이뤄지는데, 와인딩에서는 뒷바퀴 구동력을 유지해 뒷바퀴굴림 특성을 강조하려고 한다. 배기음은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 배기음이 크게 들릴 때도 실내로 유입되는 사운드는 멀게 느껴진다. 소리로 흥분하기에는 역부족. 마칸 GTS는 SUV답지 않은 역동성을 지닌 동시에 패밀리 SUV의 성질도 강하게 살려 자극의 정도는 다른 차보다 떨어진다.
시트만 봐도 차의 성격이 드러난다
자극의 정도는 다르지만 세개의 자극제를 동시에 맞아서인지 흥분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리고 이들이 안겨준 주유 영수증에 실망의 흥분지수 또한 올라갔다. 세 차 모두 복합공인연비는 한자릿수. 그나마도 작정하고 살살 달리지 않으면 공인연비를 맞추기가 쉽지 않다. 이 차들을 그렇게 타라는 것은 고문이다. 역시 쾌락을 얻기 위해서는 대가가 따른다.
요즘 고성능차들은 ‘자극 없는 흥분’을 추구한다. 편안하고 안전하게 즐기는 역동성에 초점을 맞춘다. 모순되는 말 같지만 많은 사람이 원하는 바이고 거기에 길들여졌다.
ATS-V와 골프 R, 마칸 GTS도 엄밀히 말해 ‘순수’라는 말을 붙일 정도는 아니다. 그렇지만 시끄럽고 불편하고 과격한 감성, 허리가 저려오는 단단한 승차감, SUV답지 않은 날쌘 움직임 등으로 영혼 없는 차들과는 달리 일정 수준 이상의 자극은 준다. 자극 없는 흥분은 쉽게 질린다. 자극이 있어야 흥분도 지속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