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세데스-벤츠 SL 400, 독보적 존재감
2016-12-09 08:00:00 글 김종우 기자
여름의 끝자락에서 메르세데스-벤츠의 프리미엄 하드톱 로드스터 SL 400을 만났다. 하늘이 도왔는지 시승 기간에는 시원한 바람이 살랑거렸다. 하늘도 정말 오랜만에 청명한 푸른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지붕을 열어젖히는 로드스터는 이런 날씨에 타야 제맛이다.
기어시프트 아래쪽 보석함에 숨겨진 루프 오픈 버튼을 눌렀다. 원터치가 아니어서 20초 동안 꾹 누르고 있어야 한다. 도어가 살짝 내려가고 적재함 도어가 반대로 열리면서 루프가 접히기 시작한다. 하드톱 컨버터블은 개폐 때 바람 저항을 많이 받기 때문에 보통 이동 중에는 작동시킬 수 없다. 하지만 SL 400은 40km/h의 이하로 달리면서 루프를 열어젖힐 수 있다.
엔진음과 배기음은 루프를 닫았을 때가 더 매력적이었다. 사운드 제너레이터로 듣기 좋은 소리를 만들어내는데, 오픈하면 바람소리에 묻혀버린다. 루프를 열면 가뜩이나 주변의 시선이 쏟아지는데 AMG SL 63처럼 귓가를 자극하는, 신경질적인 고음을 발산하고 다니면 관심을 끌 수밖에 없다. 조용히, 우아하게 움직이는 편이 낫다.
시승차는 6세대 SL-클래스의 페이스리프트 모델이다. AMG 디자인을 적용한 외관은 흐리멍텅했던 예전과 달리 공격적으로 바뀌었다. 메르세데스-벤츠의 전설적인 경주차 300SL 파나메리카나에서 영감을 받은 프론트 그릴, 새로운 헤드램프, 프론트 스플리터 등으로 단장한 앞모습이 인상적이다. 유심히 보면 어떤 차와 많이 닮아 있는데, 얼마 전 공개된 AMG GT R과 유사하다. 루프가 있건 없건 잘 빠진 옆모습은 여전하다.
실내는 바뀐 부분이 거의 없다. 3년전만 해도 “고급스럽다”를 연발했겠지만 신형 S-클래스에 이어 C, E-클래스로 번진 새로운 디자인과 비교하면 뒤처져 보인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 하지만 컨버터블에서 실내가 그리 중요한가? 하늘만 높고 푸르러도 반 이상은 먹고 들어간다.
비좁은 적재함은 그대로지만 이전 모델보다 휠씬 쓰기 쉽다. 뒷범퍼 아래로 킥을 하면 적재함 도어가 자동으로 열리고(이전 모델에도 이 기능은 있다) 루프가 접혔을 때 적재물과의 공간을 나누는 파티션 버튼도 따로 마련했다. 짐공간이 더 필요하면 시트 뒤의 숨은 공간을 활용하자.
왼쪽에 빨간 버튼을 누르면 파티션이 올라간다. 기본 적재용량은 362L, 루프를 접으면 222L로 줄어든다
SL은 독일어 ‘Sportlich Leicht’의 약자, 영어로 하면 ‘Sport Light’다. 알다시피 현재 SL-클래스는 1952년 르망 24시간에서 우승한 300SL이 그 뿌리다. 1957년 데뷔한 양산형 300SL은 도어가 갈매기 날개처럼 위로 열리는 걸윙도어를 달아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현재의 SL-클래스는 경량 차체와 뒷바퀴굴림의 전통을 그대로 유지한다.
SL 400도 이런 특징을 이어받아 전복 시 차체를 떠받치는 A필러 부분을 제외하고 전체를 알루미늄으로 만들어 이전 세대보다 100kg 이상 무게를 덜었다. 전동식 하드톱 관련 장치들 때문에 몸무게는 1,910kg으로 그리 가볍지 않지만 말이다.
376마력을 내는 V6 3.0L 트윈터보 엔진과 9단 자동변속기
움직임은 날렵하다. V6 3.0L 트윈터보 엔진은 최고출력 367마력, 최대토크 50.9kg·m의 고성능을 발휘한다. 변속기는 자동 7단에서 자동 9단으로 한층 세밀해졌다. 다이내믹 셀렉트를 에코에 맞추면 연비 운전을 한다. 정속주행을 하면 회전수가 1,500rpm을 넘을세라 부지런히 변속을 해댄다. 60~70km/h만 돼도 8단이 물리는데, 무단변속기마냥 각 단을 부드럽게 넘나든다. 여기에 엔진 스톱&스타트 기능이 더해져 효율을 높인다.
하드톱은 딱딱한 지붕과 이것을 여닫는 장치 때문에 무거운 단점이 있다. 특히 루프를 접었을 때 무게중심이 이동해 최적의 드라이빙을 위한 섀시 세팅에 어려움이 따른다. 이 때문에 아우디는 소프트톱만 생산하고, BMW도 Z4의 후속에 다시 소프트톱을 채택할 것이라는 소문이 들린다.
SL 400은 하드톱으로 인한 무게이동에도 불구하고 고속주행에서도 안정되게 달린다. 다만 빠르게 코너를 파고들면 약한 언더스티어를 보인다. 일반 로드스터보다 차체가 길지만 차로를 이리저리 헤집고 다녀도 허둥거리거나 굼뜨지 않는다. 출력이 넘치지 않아 부담없이 운전할 수 있고, 스포츠+ 모드에서는 AMG SL 63만큼 다이내믹하다.
SL-클래스는 경주차 혈통이지만 본격적인 고성능 스포츠카 SLR 맥라렌과 SLS AMG가 등장하고, 최근에는 AMG GT가 그 뒤를 이으면서 이제는 편안한 럭셔리 컨버터블 콘셉트로 자리매김했다. 오픈 에어링을 만끽할 수 있는, 뒷바퀴굴림 스포츠 컨버터블로 넘볼 수 없는 존재감은 세대가 바뀌어도 독보적이다.
* <탑기어> 2016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