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을 자동차로 달린다고 하면 언제 무스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눈 덮인 산길 이미지가 머리에 콕 박혀 있다. 그런데 지금은 무더운 여름. 게다가 지도를 펼쳐보니 718 카이맨의 ‘인터내셔널 프레스 론치’ 장소로 낙점된 말뫼는 남북으로 길다란 스웨덴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도시 중 하나다. 스톡홀름이나 예테보리보다 수백km 남쪽이란 말이다. 어찌됐든 말뫼의 기온은 서울보다 딱 10도 낮았다. 체감온도는 더 낮아서 반팔 차림을 하기에 애매했다. 서울에서 들려오는 무더위 소식을 듣고 있자니 천국에 와있는 것 같았다.
도착 첫날 저녁엔 요란한 소나기까지 내렸다. 숙소 창문에 부딪치는 빗소리를 듣고 우박이 내리는 줄 알았을 정도로 박력 있었다. 2개의 실린더를 빼앗긴 걸 감추려는 듯 거친 목소리를 힘껏 내지르던 718 박스터가 생각났다. 지붕을 벗기고 바람을 맞으며 타야 제맛인 박스터 시승이라면 빗소리에 경기를 일으켰을 테지만 단단한 지붕을 가진 카이맨을 타러 왔기에 이마저 즐길 수 있었다.
글로벌 자동차회사들이 신차 시승 장소로 종종 찾는 말뫼는 길고 긴 다리를 통해 외레순 해협을 건너 덴마크 코펜하겐과 연결되어 있다. 육로가 아니라면 비행기를 타고 스톡홀름이나 예테보리를 경유해 들어가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각국에서 718 카이맨 시승을 위해 날아온 기자들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모여 고속버스에 날개를 달아놓은 것 같은 전세기를 타고 말뫼로 향했다. 그렇다. 말뫼에도 공항이 있다. 이래봬도 스웨덴에서 3번째로 큰 도시이며, 1275년부터 이미 도시로 불렸다.
시내에는 14세기에 지어진 교회가 남아 있다. 그리고 공항 활주로에서 수백m만 가면 자동차 서킷이 있다. 아하, 스웨덴에도 자동차 서킷이 있구나. 이 나라 사람들은 자동차로 충돌테스트만 하는 줄 알았더니…. 사실 스웨덴 전역엔 상설서킷이 10개쯤 있다. 그중 하나인 스트루프 레이스웨이가 이번 시승 행사장이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718 카이맨에 대한 예습이 필요했다. 보통 이런 행사를 하면 현장에서 차에 대한 소개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디지털 프레스 컨퍼런스’로 대체됐다. 한국을 떠나기 전, 미리 알려준 웹사이트에 접속해 자료들을 살펴보라고 했다. 예습 안한 학생들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지, 말뫼로 날아가는 전세기 안에서 해당 자료가 담긴 아이패드를 나눠줬다. 자료뿐만 아니라 도착지에 준비된 수십대의 차 중 원하는 장비를 갖춘 시승차를 미리 찾아낼 수 있는 기능도 있어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시승할 차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함정이었지만.
718 카이맨은 완전한 신차가 아니라 부분변경 모델이고, 심지어 먼저 발표된 718 박스터와 상당부분 겹친다. 그러니 상품설명을 이렇게 하는 것이 - 비록 족집게 과외만 받다가 인강을 듣는 기분이긴 했지만 -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6기통 자연흡기 엔진을 4기통 터보로 대체한 718처럼. 교재 영상을 보면 카이맨에 숫자 이름이 붙은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오리지널 718이 등장한다. 카이맨 얘기를 하면서 지붕 없는 718이 나오길래 이상하다 했더니 뒤이어 지붕 덮은 버전이 나온다. 1961년 르망 레이스를 위해 개발된 718 GTR 쿠페다.
새 박스터/카이맨은 가벼운 2도어 차체와 미드십 4기통 복서 엔진을 사용한 718의 적통임을 주장한다. 이는 6기통에서 실린더 두개를 버린 것에 대한 합리화인 동시에 별개의 모델로 인정받으려 했던 박스터/카이맨을 같은 이름으로 묶으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사실 4기통 포르쉐 스포츠카가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원조인 356이나 718은 말할 것도 없고 박스터가 등장하기 전 보급형 포르쉐 역할을 맡았던 924, 944, 968도 직렬 4기통(터보 또는 자연흡기)이었다. 오히려 박스터가 처음 나왔을 때 보급형에 굳이 6기통을 쓸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도 있었다. 그때는 박스터 외에 포르쉐 양산모델이 911(996)뿐이었고, 먹고 살기 녹록지 않았던 포르쉐는 엔진뿐 아니라 눈에 보이는 실내외 부품까지 나눠 써야 했다.
20년이 흐르면서 박스터/카이맨도 6기통 탑재가 당연한 것으로 굳어졌다. 박스터는 이전까지 다른 포르쉐들이 사용했던 숫자이름을 버린 이단아이기도 했다. 이후 카이맨, 카이엔, 파나메라 등이 추가되면서 이젠 숫자 안붙은 포르쉐가 익숙해졌다. 그런데 다시 숫자 이름으로 돌아가려 한다. 박스터가 20년만에 4기통 엔진으로 돌아간 것처럼. 이제 포르쉐는 911 쿠페/카브리올레처럼 718 카이맨/박스터를 하나의 모델라인으로 묶는다.
20년이 흐르면서 박스터/카이맨도 6기통 탑재가 당연한 것으로 굳어졌다. 박스터는 이전까지 다른 포르쉐들이 사용했던 숫자이름을 버린 이단아이기도 했다. 이후 카이맨, 카이엔, 파나메라 등이 추가되면서 이젠 숫자 안붙은 포르쉐가 익숙해졌다. 그런데 다시 숫자 이름으로 돌아가려 한다. 박스터가 20년만에 4기통 엔진으로 돌아간 것처럼. 이제 포르쉐는 911 쿠페/카브리올레처럼 718 카이맨/박스터를 하나의 모델라인으로 묶는다.
그런데 이제 이 규칙도 뒤집혔다. 718 박스터와 카이맨은 같은 무게(공차중량)에 같은 성능을 내는 엔진을 쓰며, 가격은 카이맨이 더 저렴하다. 서킷주행 등 순수한 운동성능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값에 고성능을 누릴 수 있게 된 셈이다. 오해는 말자. 기존 박스터보다 저렴하다는 게 아니라 신형 박스터에 비해 가격이 덜 올랐다는 뜻이다.
개량된 사이드미러와 도어 핸들이 정교해진 느낌을 준다
최신 911이 카레라를 터보화하면서 991이라는 코드네임을 유지한 것과 달리 718 박스터/카이맨은 기존 981에서 982로 바뀌었다. 박스터 1세대가 986, 2세대가 987이었음을 떠올리게 된다. 실린더가 떨어져나가고 터보가 붙은 새 엔진뿐 아니라 차체 안팎과 섀시, 제품의 포지션까지 바뀐 부분이 많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981 때 3.4L까지 올라갔던 ‘S’의 배기량은 터보화와 함께 2.5L로 줄어들었다. 1996년 데뷔 당시 박스터는 2.5L였다. 배기량은 같지만 204마력이었던 최고출력은 이제 350마력으로 뛰었다. 기존 카이맨은 S 325마력, GTS 340마력이었다. 350마력은 터보를 달기 전 911 카레라의 최고출력이었다. 911 카레라의 수치가 370마력으로 높아졌기에 카이맨도 이런 업그레이드가 가능했다. 신형 카이맨 GTS가 360마력을 내리라는 예측도 가능해진다.
스트루프 레이스 트랙에선 멀찌감치 공항 쪽에 서 있는 비행기를 볼 수 있다. <탑기어> 트랙이 떠오르지만 그보다는 훨씬 입체적이다. 1주 거리 2.1km 남짓한 코스는 12개의 코너로 구불구불 말려 있어 실제보다 짧게 느껴진다. 코너 바깥쪽이 도드라지게 높은 구간이 있는가 하면 노면이 툭 튀어나온 부분도 있고 앞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만큼 높은 언덕도 존재한다. 흥미로운 한편 까다로운 서킷이다.
우선 인스트럭터가 모는 911 카레라 4S를 718 카이맨 S로 뒤따르며 탐색전을 벌였다. 중요 포인트를 통과할 때마다 문짝 포켓에 끼워진 무전기를 통해 도움말들이 흘러나왔지만 “코너의 정점이 뒤로 치우쳐 있으니 속도를 충분히 줄여서 진입하고 빠르게 탈출하라”는 말 이후로는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눈과 팔다리는 앞차의 궤적과 움직임을 따르기 바쁘고, 귀는 우당탕거리는 배기음과 웅웅거리는 엔진음에 가려 잘 알아듣질 못했다. 코스는 이리 구불, 저리 구불 정신없이 이어졌고, 모처럼 속도 좀 내볼까 하면 금세 확 틀어지는 코너나 가슴 철렁한 내리막길이 나왔다.
햐, 이거 제대로 달릴 수 있을까? 조금 걱정이 됐다. 그런데 왠걸, 대면식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을 때, 너무나도 차분해진 자신과 그보다 더 차분한 카이맨을 발견했다. 가속 페달과 감속 페달을 번갈아 밟아 속도를 조절해가며 스티어링 휠을 감아주고 몸이 덜 쏠리게끔 팔다리에 힘을 주면 그걸로 끝. 요구되는 성능을 뽑아내기 위해 필요한 나머지 과정은 차 스스로 해결하고 있었다.
스포츠 플러스 모드를 선택하면 PDK 변속기가 패들조차 건드릴 필요 없을 만큼 상황에 적합한 높은 회전수를 유지시키고, 잠시 가속을 늦추거나 브레이크를 밟을 때는 스스로 과급압이 떨어지지 않도록 관리해 재가속시 터보 래그 없이 즉각 튀어나갈 수 있다. 다이내믹 부스트를 비롯한 첨단기술로 단점을 틀어막은 최신 터보 엔진의 수혜는 단연 낮은 회전수부터 폭넓게 발휘되는 강력한 토크라 할 수 있다. S의 경우 1,900rpm부터 4,500rpm까지 42.8kg·m의 최대토크가 유지된다. 수치상으론 3.8L 카이맨 GT4보다 낫다. 실제로 밟았을 때 힘이 쫙 붙는 회전수는 2,500rpm에 근접해서지만, 서킷 주행에선 여기까지 회전수를 떨굴 일도 없다.
최대로 가속할 때 자동으로 기어를 갈아타는 회전수는 7,200rpm을 넘기면서다. 터보 엔진이지만 자연흡기보다 400rpm 낮아졌을 뿐이다. 원한다면 수동 변속으로 시점을 7,500rpm까지 늦출 수도 있고, 이때도 6,500rpm에서 나오는 최고출력의 95%가 유지된다. 부우엉~ 퍽, 부우엉~ 퍽, 하면 디지털 속도계는 이미 115km/h를 가리킨다. 짤막짤막하게 이어지는 이 서킷에선 4단(200km/h까지 커버한다)까지 이용할 여유가 없다. 3단으로 150km/h까진 속도를 높일 수 있지만 곧바로 감속에 들어가야 한다. 봉~ 봉~ 하면서 시프트다운에 맞춰 회전수가 튕겨 오르고 가속 페달을 확 떼면 배기구에서 팝콘 튀는 소리가 난다.
처음엔 갑작스러운 코너에 놀라 브레이크 페달을 힘껏 밟았다가 뒤에서 허리춤을 잡아챈 것 같은 감속에 더 놀랐다. 바퀴가 노면을 뜯어냈거나 타이어가 벗겨져나간 줄 알았다. 그렇게 제동성능에 신뢰가 생기고 나니 브레이크 페달을 놀려 차체를 다루는 재미가 쏠쏠해졌다. PCCB(카본 세라믹 브레이크)가 아닌 기본 브레이크지만 트랙 몇 바퀴를 소화하는 정도로는 약해지지도, 지치지도 않았다. 기본형 718은 기존 카이맨 S의 브레이크를 가져왔다. 718 카이맨 S는? 911 카레라의 것을 가져왔다.
요즘 포르쉐의 업그레이드는 돌려막기 스타일이다. 718은 카이맨 GT4의 보강 노하우도 가져왔다. GT4는 911 GT3에서 상당 부분을 가져왔다고 했다. 911 터보에서 가져온 718의 조향기어는 이전보다 10%쯤 더 직접적이다. 이러한 구성품 변경은 터보 엔진 사용에 따른 패키징 문제 해결과 함께 거동 특성 차이를 반영한 것이다. 강화된 서스펜션과 함께 튜닝으로 롤링과 피칭을 줄였고 뒷바퀴 림 폭을 0.5인치 늘여 안정성을 높였다. 여기에 상황에 맞게 엔진과 변속기를 붙들어 매주는 다이내믹 마운트, 차머리를 선회방향 안쪽으로 밀어넣어주는 토크벡터링은 여전하다.
자신감이 붙으면 PSM에 새로 추가된 스포츠 모드(주행안정장치 개입을 최소화한다)를 선택해 운전자와 차의 한계를 좀더 깊이 시험해볼 수도 있다. 빠른 템포로 반복되는 최대한의 가속과 감속, 그리고 오장육부가 이리저리 쏠리는 코너링에서 카이맨 S는 물을 만난 듯했다. 그 와중에 코스를 이탈해 휠 안쪽을 흙과 풀로 채우고 돌아온 차도 있긴 했지만…. 정평이 있는 핸들링에는 획기적인 변화가 없다. 점진적이고 선형적인 움직임으로 인해 금세 친숙함을 느낄 수 있다. 차분 모드였던 정신상태는 어느새 희열 모드로 바뀌어 있었다. 급기야 카레라 4S의 무겁고 펑퍼짐한 엉덩이를 쪼아대며 더 속도를 높이라고 채근댔다.
기본형 카이맨으로 옮겨탔을 때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조금이라도 실수하거나 최선을 다해 몰입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앞차와의 거리가 벌어졌다. 그 갭을 줄이려면 코너에서 어떤 라인을 타고 언제 가감속을 할지, 하중이동을 어떻게 가져갈지 운전자가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했다. 단순히 동력성능의 차이(최고출력이 50마력 낮다)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본질적인 핸들링의 출중함엔 차이가 없다 해도 반응의 신속성과 차체 쏠림, 하다못해 제동성능에서도 차이가 벌어졌다. 서킷에선 카이맨 S가 좋아 보일 수밖에 없다.
능동형 서스펜션인 PASM만 해도 카이맨의 것은 일반 서스펜션보다 10mm 낮지만 S에는 이제 20mm 낮은 ‘PASM 스포츠’가 적용된다(기존의 20mm 낮은 스포츠 서스펜션은 PASM이 아니었다). 휠, 타이어의 경우 이전처럼 카이맨은 18인치, S는 19인치가 기본. 다만, 시승차들은 디자인만 다른 20인치(앞 235/35, 뒤 265/35, 피렐리 P제로)를 끼웠다. 휠사이즈가 커져도 타이어 단면폭은 동일하다.
기본형 카이맨은 서킷 밖으로 나오자 비로소 한숨 돌릴 수 있었다. S는 아니지만 시승차는 스포츠배기, PASM 등을 장비했다. 차체색상에 맞춘 노란색 안전벨트도…. PASM은 트랙에서 차를 더 단단하게 받쳐줄 뿐만 아니라 일반도로에서 기본 서스펜션보다 나은 편안함을 제공한다. PASM이 적용된 차들은 트랙 밖 요철이 많은 시골길에서도 나긋한 승차감을 보여주었다. 이 경우 20인치 휠 타이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노면 마찰음은 작지 않은 엔진 소리 속에서도 두드러졌다. 다른 소음들이 뒤섞이는 박스터와는 차이가 벌어졌다.
길쭉했던 헤드램프가 좌우로 넓어졌다. LED 헤드램프가 아니더라도 봐줄 만하다. 리어램프는 가로줄로 차쪽을 강조했다
고정된 지붕과 뒤창이 엔진룸 위를 덮고 있는 만큼 귓가를 두드리는 엔진음도 박스터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스포츠 배기 옵션이 적용되지 않은 718 박스터가 기대 이상의 사운드를 들려줬던 것과 달리 카이맨들은 둔탁함이 강조돼 가끔은 피곤하게 느껴졌고, 스포츠 배기 스위치를 꺼도 부담스런 소음은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먹먹함이 부각되는 스포츠 배기를 끄면, 엔진 소리가 더 풍성하게 다가오는 면은 있다. 낮은 속도에선 포르쉐(혹은 폭스바겐)의 공랭식 차들을 연상시키는 낭만적인 소리도 즐길 수 있다.
고회전 영역만 놓고 보면 자연흡기 6기통이 가진 감칠맛나는 사운드에 미련이 남고, 모름지기 스포츠카라고 하면 고회전 영역에서의 감성이 중시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될 영역에서는 718 버전의 매력이 만만치 않다. PDK(기본형과 S의 기어비가 같다)의 100km/h 정속주행 시 엔진 회전수는 7단에서 1,700rpm 정도. 물론 동력전달을 끊는 타력주행과 오토 스타트 스톱도 지원한다. 카이맨의 경우 350km 구간 연비가 7.4km/L였다. 서킷 주행을 포함한 연비다. 서킷에서 탄 차들은 일행이 공항에 내려 숙소까지, 그리고 숙소에서 다시 서킷까지 타고 간 차들이었다.
도로 시승코스가 꽤 길어 다양한 환경을 경험할 수 있었다. 대부분은 길 양쪽이 넓은 평야이거나 한쪽은 평야, 다른 한쪽은 바다였다. 이게 스웨덴이라고? 싶으면서도 멋진 배경과 흥미로운 도로에 감사했다. 어떤 구간에선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락내리락 하는 언덕이 반복됐다. 재미있긴 한데 마음껏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이 넓은 땅에 나 혼자뿐인 듯하다가도 고개를 넘거나 코너를 돌려는 순간 갑자기 다른 차가 나타났다.
차 두대가 지나가기 부담스러울 만큼 길이 좁아서 자꾸만 속도를 줄여야 했고, 동승자는 멀미가 난다고 했다. 수십km를 달려도 가로등 하나 없는 그런 길이기도 했다. 시야가 확보돼 한껏 내지를까 싶으면 이번에는 드문드문 나오는 농가들이 신경 쓰였다. 이쯤 되니 굳이 S를 탈 필요는 없어 보였다. 박스터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공기가 맑고 쾌적하며 경치가 아름다운데 지붕을 내릴 수 없다니….
(좌) PCM이 현대적으로 업그레이드됐다. 내비게이션 외엔 쓸 일이 없었지만 (우) 박스터와 달리 엔진 위에도 짐공간이 있다
이국적인 주변경관을 빠짐없이 주워담느라 눈이 쉴새 없이 움직였고 가끔씩 방정맞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구역에 따라 노란색으로, 초록색으로 아름답게 물든 평야는 의도적으로 배색한 예술작품 같았다. 이렇게 넓은 경작지를 관리하려면 외계인의 도움이라도 받아야 되겠다고 생각하며 코너를 도는 찰나, 집채만한 트랙터가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와 황급히 속도를 줄였다. 외계인일지 모를 운전자는 통화를 하느라 땅바닥에 깔려 다가오는 노란색 스파이더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요란한 감속음은 들었는지 느릿느릿 길을 터주었다.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길, 말뫼 변두리의 낡고 우중충한 건물들 사잇길을 통과할 때는 체감온도를 높여주는 많은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주로 이민자들이 거주하는 동네였다. 무채색 풍경 속에서 홀로 총천연색 빛을 내는 카이맨이 자전거를 타거나 버스를 기다리던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스포츠 배기, 그리고 오토 스타트 스톱을 껐지만 원색의 포르쉐를 탄 아시아인을 외계인 보는 듯한 시선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마치 실수로 수르스트뢰밍(악취로 명성이 자자한 스웨덴의 청어 발효음식)을 터뜨리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시내에서 만난 다른 기자의 하늘색 카이맨이 그리 반가울 수 없었다.
(좌) 가죽과 직물을 섞은 ‘스포츠텍스’ 시트커버가 새로 추가됐다 (우) 갈색이 좋다고? 원한다면 마호가니 나무장식도 선택할 수 있다
내친 김에 말뫼의 랜드마크인 터닝토르소와 외레순 다리를 둘러봤다. 터닝토르소는 2005년 완공된 54층짜리 주상복합 건물이다. 낮은 건물들 사이에 이상할 정도로 우뚝 솟아있는데, 말뫼, 스웨덴뿐 아니라 스칸디나비아에서 가장 높은(그리고 가장 비틀린) 건물로 꼽힌다. 터닝 토르소는 코쿰스 크레인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과거 말뫼 조선소가 자랑했던 세계 최대 골리앗 크레인으로, 2002년 우리나라 기업에 단돈 1달러에 매각되면서 ‘말뫼의 눈물’로 알려진 바로 그것이다.
과거 세계 조선업의 중심지였다가 경쟁력을 잃고 쇠퇴하면서 경제가 추락하고 인구가 대폭 감소하는 등 위기에 처했던 말뫼는 외레순 다리 건설 등 자구책에 힘입어 안정을 되찾고 이제 친환경 문화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2000년 개통된 외레순 다리는 유럽에서 가장 긴 교량으로, 4차로 도로와 철로를 통해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유럽과 연결하는 것은 물론이고 말뫼에서 코펜하겐으로의 통근을 가능케 해주었다. 외레순 다리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718들의 모습이 의미심장해 보였다.
기존 모델의 페이스리프트 정도로 여기기 쉬운 새 카이맨은 이름은 물론이고 외관과 실내, 엔진, 섀시, 심지어 라인업의 포지션까지 바뀌었다. 핵심은 4기통 터보로 다운사이징된 엔진이지만 ‘순수한 운동성능에의 집중’이라는 측면에서 장점이 돋보인다. 포르쉐가 ‘라이트사이징’이라고 표현했듯이, 제거나 하향이 아니라 향상에 의미를 둘 수 있다.
718 카이맨을 7월 18일에 시승했음에 뿌듯해하며 만 이틀을 채우지 못한 말뫼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도착했을 때처럼 다시 고속버스… 아니, 포르쉐 전세기를 타고 말뫼를 떠났다. 다음 행선지는 드레스덴이었다. 그곳에는 내년 상반기 국내 출시될 신형 파나메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 <탑기어> 2016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