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뛰어난 플라시보 효과, 푸조 2008 SUV
2017-05-16 00:28:07 글 김종우 기자
기자에게 푸조 2008은 꿀렁거리는 MCP 변속기, 환상적인 연비, 전위적인 디자인의 프랑스차가 아니다. <탑기어> 한국판이 막 창간됐던, 그러니까 2015년 10월 수입차 판매 5위를 했던 당당한 2008의 모습이 떠오른다.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독일 프리미엄 3사+폭스바겐이 장악하고 있던 수입차 판매 스프레드 시트의 상위권에 푸조의 소형 크로스오버카 이름이 올라올 줄을.
2015년은 푸조에게 핑크빛 나날이었다. 전체 판매량 7,000여대로 2014년 대비 124% 증가했다. 돌풍의 중심에는 2008이 있었다. 2008은 콤팩트 SUV의 인기에 힘입어 2015년 푸조 전체 판매량의 58%를 점유하는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판매 돌풍을 이듬해까지 이어가지 못했다. 신차 효과도 떨어졌고, 실력 있는 경쟁모델들이 속속 추가됐기 때문이다. 여기에 디젤 게이트로 인한 수입 디젤차에 대한 불신도 찬물을 끼얹었다. 2008의 인기 하락은 푸조의 판매실적 하락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암울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새 희망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지난 봄 2017 제네바 모터쇼에서 푸조 3008이 올해의 자동차에 선정됐다. 2014년 푸조 308이 이 타이틀을 가져간 후 또 한번의 쾌거다(역대 수상모델 중 최초의 SUV라는 영예도 가져갔다). MPV라는 정체성을 버리고, 요즘 대세인 SUV 시장에 합류한 결과다. 올해 안에 윗급 5008이 더해질 예정이어서 이 기세는 당분간 이어질 듯 보인다. 푸조에게 SUV는 인수를 선언한 오펠·복스홀만큼이나 2017년의 중요한 키워드가 아닐까 싶다.
이런 이유로 국내 데뷔한 새 2008의 정식 명칭은 푸조 2008 SUV다. 겉모습도 제법 SUV답다. 오프로드를 달릴 때 차체 손상을 방지하기 위해 앞뒤 범퍼와 옆, 휠하우스 가장자리에 검은색 패널을 두르고 시승차엔 없지만 상급 GT 라인에는 오프로더에나 있을 법한 다이얼식 그립 컨트롤도 달려 있다(본격 오프로드 주행용이 아니라 앞바퀴의 트랙션을 조절해 주행안정성을 높이는 장비다).
새 2008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SUV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검은색 테두리도 아니다. 프론트 그릴과 헤드라이트가 달라진 앞모습이다. 격자무늬 위에 수직 크롬 패턴을 넣은 프론트 그릴과 보닛에서 그릴로 자리를 옮긴 벨포르의 사자가 차의 성격을 180˚ 다르게 보이게 한다. 그릴만 보면 다카르 경주차인 3008 DKR의 감성이 풍긴다고 할까. 당장 모래언덕으로 차를 거칠게 던지고 싶어진다. 새차에는 본격적인 SUV를 표방한 3008과 5008의 감성도 느껴진다(사실 새로운 패밀리룩은 2008이 먼저 사용했다).
멋스럽게 바뀐 외관을 감상하고 나서 본격적인 시승을 시작했다. 2008은 기자가 열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많이 시승해본 모델이다. 하지만 스포티해진 외관 때문인지 익숙했던 그 느낌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플라시보 효과라는 거구나. 외형만으로 차의 성격을 다르게 느끼도록 만들다니, 디자인의 힘은 위대하다(티볼리 보고 있나?). 엔진은 1.6L 디젤로 99마력, 25.9kg·m를 낸다.
여기에 푸조 특유의 MCP 변속기를 물린다. 꿀렁거리는 변속감 탓에 국내에선 사랑받지 못한다. 한가지 노하우를 소개하자면, MCP가 적용된 푸조나 시트로엥을 타기 전 ‘이 차는 수동변속기다’라고 되뇌어보는 것이다.
실제로 MCP는 자동변속기가 아니고, 자동화된 수동변속기다. 수동변속기지만 클러치도 없고, 오르막에서 바짝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면 이보다 편한 차가 없다. 정 안되겠다 싶으면 시프트패들을 이용해 수동 모드로 변속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MCP로 인한 인내의 열매는 연비로 보상받는다. 주로 시가지에서 150km를 달렸는데, 평균연비 20.5km/L가 찍혔다. 무척 달콤했다.
저속이나 시가지 구간에서의 승차감은 부드러운 편이다. 서스펜션은 앞 스트럿, 뒤 토션빔의 평범한 구성. 세팅을 잘해놨는지 예기치 못한 방지턱이나 포트홀에서도 너그럽게 충격을 흡수한다. 고속에서도 적당히 부드러워 출렁거리지 않는다. 급하게 스티어링 휠을 돌려대도 흔들거림 없이 잘 따라온다. 흔히 독일차의 서스펜션은 단단하고, 프랑스차는 쫀쫀하다고 한다. 더 이상의 단어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딱 맞는 표현이지 싶다.
지난 4월 유럽을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는 3008이 국내에 들어왔다. 올해말 5008까지 더해지면 푸조의 SUV 라인업이 순식간에 완성된다. 너도나도 SUV를 깎는 요즘, 푸조는 소형 크로스오버카인 2008을 억지로 SUV 카테고리에 끼워맞춰 힘겹게 버텨왔다. 하지만 새로 SUV 형제들도 생겼고 디자인도 꽤 SUV태가 난다. 우울했던 지난 날은 잊고 2008 앞에 화사한 꽃길이 펼쳐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