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나왔다는 그 찬가?”
기자의 아버지 연배쯤 돼 보이는 남성이 쓱 다가와 묻는다. 급작스러운, 그것도 초면에 반말로 하는 질문이 이젠 놀랍지도 않다. 쌍용자동차의 신차 G4 렉스턴으로 약 700km를 돌아다니면서 자주 겪은 일이기 때문이다. 정확한 정보를 전해야 한다는 기자의 본분을 되새기며 친절하게 답하고 있으려니 나이든 분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에 정말 성심 성의껏 답변을 했다. 올해의 우수 영업사원상은 기자가 받는 걸로.
G4 렉스턴은 멋들어진 슈퍼카도 아니고, 요즘 유행하는 콤팩트한 크로스오버카도 아니다. 커다란 덩치에 정통 SUV의 라인을 그대로 따르는 보수적인 모습이다. 요즘 말로 온몸에서 아재 감성이 풍긴다고 할까? 그래서인지 나이 많은 남성들에게 커다란 관심을 받았다.
쌍용차에 따르면 5월말까지 G4 렉스턴의 판매대수는 2,703대이고, 구매자의 대부분이 40대 이상의 남성이다. 쌍용차는 올봄 서울모터쇼에서 새차를 소개하며 주고객층을 40~50대 남성으로 잡고, 여기에 맞춰 홍보와 마케팅을 할 것이라 했다. 인기가 좋았던 렉스턴을 모델명에 포함시킨데는 이런 계산이 깔려 있다. 쌍용차의 예상은 적중했다.
최근 대형 SUV 시장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콤팩트 SUV의 붐이 넘어온 듯 그간 관심받지 못했던 커다란 차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좀더 크고 고급스러운 SUV를 원하는데, 국산 차 중엔 딱 맞는 모델이 별로 없다. 현대차 베라크루즈는 진작에 단종됐고 기아차 모하비는 나온 지 오래돼 식상하다.
찬거리가 부족하니 소비자들은 가격대가 그리 높지 않은 포드 익스플로러나 혼다 파일럿 같은 수입차로 눈을 돌렸다. 쌍용차가 이 공백을 정확히 짚어내고 재빨리 G4 렉스턴을 투입한 것이다. 나온 지 한달이 조금 지난 시점이어서 성공 여부를 판단하기엔 이르지만, 주변의 반응과 긴 구매 대기표를 보면 매우 긍정적이라 할 수 있겠다. 쌍용차는 이 기세를 쭉 이어가기 위해 하반기에 7인승 모델도 데뷔시킬 예정이다. 티볼리와 티볼리 에어가 쌍두마차가 돼 판매를 이끌었듯이 말이다.
G4 렉스턴은 요즘 보기 드문 프레임 방식에 뒷바퀴굴림을 기본으로 하는 정통 SUV다. 파워트레인과 휠, 서스펜션 등을 단단한 프레임에 고정시키고 그 위에 고장력 강판 비율 81.7%의 차체를 얹었다. 프레임 방식은 모노코크에 비해 무겁지만 구조가 간단하고 뒤틀림 강성이 좋다. 전통적인 자동차 설계형태로, 하드코어 오프로더나 트럭에 많이 사용된다.
최근엔 고장력이나 초고장력 강판으로 강성 확보, 모듈러 방식을 통한 플랫폼 공유, 가벼운 무게등의 이점 때문에 대형 SUV들도 모노코크 보디를 많이 사용한다. 이 때문에 프레임 방식 SUV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G4 렉스턴이 유니크한 차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G4 렉스턴은 길이×너비×높이가 4,850×1,960×1,825mm, 휠베이스는 2,865mm다. 차체가 그리 긴 건 아니지만 높이가 1.8m에 달해 엄청나게 커 보인다. 게다가 차체가 높아 여성이나 어린이가 탑승하기 부담스러울 정도다. 오프로드 주행이 많지 않다면 꼭 사이드스텝을 장착하길 바란다.
커다란 덩치와 함께 쌍용차만의 패밀리룩도 눈에 띈다. 티볼리에서 시작돼 최근 부분변경된 코란도C를 거쳐 G4 렉스턴에도 사용된 날개 형태의 프론트 그릴이 그것이다. 새차의 크롬 라인은 한결 정돈된 모습이다. 강인한 직선으로 볼륨감을 살린 전면부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옆모습은 G4 렉스턴 디자인의 백미다. 2박스의 전형적인 SUV 형태에, 직선 사용을 절제했다. 요즘 유행하는 슬로핑 루프라인을 어설프게 적용하느니 보수적인 디자인을 채택하는 쪽이 낫다. 뒷도어 중간에서 시작돼 뒤펜더 위로 연결된 캐릭터 라인은 티볼리의 그것을 부풀려놓은 모양으로, 브랜드 정체성을 잘 담아냈다.
리어 오버행은 언뜻 보면 BMW X5가 떠오른다. 뒷면을 널찍한 면으로 마감해 조금 심심했는지 프론트 그릴쪽에 사용한 날개형태의 크롬 라인을 뒷범퍼 아래에 넣었다. 이것 대신 범퍼 일체형 배기구를 뚫었으면 어땠을까.
시승차는 최상급 트림에 풀옵션을 갖춰 값이 5,000만원에 이른다. 비싼 차인 만큼 높은 기대감을 안고 들어선 실내는 몇가지 단점이 눈에 띄긴 하나 전체적으로 괜찮아 보인다.
좋은 것부터 말하면 맨 먼저 큼지막한 디스플레이를 들 수 있다. 속도계와 엔진 회전계 사이에 7인치 TFT LCD창을 배치했는데 시인성도 좋고, 복잡하지 않다. 센터페시아 한가운데 놓인 디스플레이는 무려 9.2인치(옵션으로, 인피니티 오디오가 따라온다). 국내 SUV의 최대 크기로 시인성이나 터치감이 뛰어나다.
이것으로 애플 카플레이는 물론이고 스마트폰 와이파이를 이용해 양방향 풀미러링을 실현할 수도 있다. 시력이 떨어지는 주고객층에 딱 맞는 옵션이다. 하지만 아직 안드로이드 오토는 안되고, 미러링은 연결이 어려워 스마트기기에 익숙하지 않은 어르신들이 많이 사용할지는 모르겠다.
스티어링 휠은 크기에 비해 좀 얇은 편이다. 기어 시프트...음, 할 말이 없다. 센터페시아에 달린 공조 버튼도 그저 넓은 공간을 메우려는 듯 특색 없이 크기만 크다. 커다란 다이얼만 있는 유선전화기가 떠오른다.
시승차에는 고급성을 강조하기 위해 검은색과 황갈색의 투톤 인테리어가 적용됐는데 단색이 더 나을 것 같다. 도어트림과 등받이의 퀼팅 가죽 테두리도 브로셔의 문구처럼 고급스러워 보이진 않는다. 잠깐 시승을 같이한 동승자는 과자 ‘누네띠X’ 같다고 말했다.
뒷도어가 엄청 커서 광활한 2열좌석을 예상했지만 생각만큼 넓지 않다. 공간도 남는데 좌석을 앞뒤로 밀게 했으면 어떨까 싶다. 대신 누울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젖혀지고, 무척 편안하다. 적재함의 기본용량은 820L. 트렁크엔 바닥을 나눠 쓸 수 있도록 파티션이 마련됐다. 기자의 생각이지만, 가을 출시될 7인승 모델을 위해 적재함을 깊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2열을 접으면 짐공간이 1,977L까지 늘어나고, 접은 2열 시트는 뒷부분을 들어서 한번 더 접을 수 있다. 이것 역시 7인승 3열 좌석의 접근성을 위한 설계로 보인다. 프레임 보디 특성상 넉넉한 공간을 뽑아내기 어려운데, G4 렉스턴은 위쪽을 늘여 공간을 마련했다.
엔진은 쌍용차가 두루 사용하는 LET 2.2 터보 디젤이다. 주소비층에게 의미 없는 최고속도나 0→100km/h 가속성능보다는 실질적인 사용영역에 초점을 맞췄다고 한다. 낮은 rpm에서부터 나오는 최대토크, 정차 후 다시 움직일 때의 기민한 움직임 등이 그것이다. 실제로 2.1톤에 달하는 차체를 끌고가는 4기통 디젤이라고 생각되지 않은 만큼 초반가속이 무척 빠르다. 변속기는 7단 자동을 사용한다.
G4 렉스턴의 주행감각은 부드럽다. 아니 부드럽다 못해 출렁거린다. 이는 프레임 보디 특성이긴 하나 서스펜션 트래블까지 높여놔 증상이 더 심하다. 시승차를 받고 바로 고속화도로에 올랐는데,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고속으로 달리니 출렁거림으로 인한 불안감이 크게 다가왔다.
속도에 따른 스티어링 감각도 굉장히 무디다. 피드백이 별로 없고 고속에서도 너무 가볍다. 조금 빠르게 코너에 접어들면 휘청거려 나도 모르게 브레이크 페달을 밟게 된다. 브레이크 캘리퍼도 덩치에 비해 작아 많이 밀리는 편이다.
가속은 꽤 부드럽고, 추월가속을 위해 급하게 가속페달을 밟아도 힘겨움 없이 차체를 쭉 밀어 보낸다. 곧게 뻗은 고속도로를 편안하게 달리는 미국차 같은 주행감각이다.
G4 렉스턴을 타보고 기자처럼 불편함을 느꼈다면 독일차같이 단단한 서스펜션과 즉각적인 스티어링 반응과 피드백을 선호하며 고속주행을 즐기는 쪽일 것이다. G4 렉스턴의 주고객은 고속도로에서 아찔하게 속도를 높이거나 어지럽게 차선을 넘나들진 않을 것이다. 정속주행차로에서 제한속도에 맞춰 느긋하게 운전하기 좋도록 세팅됐다.
도심이나 가벼운 오프로드를 달릴 때는 세상 부러울 것이 없는 차가 된다. 서스펜션의 포용력이 커서 어지간한 고속방지턱은 부담 없이 넘어가고 자잘한 요철이나 포트홀은 지나간 줄도 모른다. 오프로드에서는? 흔하게 접하는 흙이나 파쇄석이 깔린 길은 온로드처럼 넘나들 수 있다.
멋진 사진을 위해 일부러 거친 오프로드에 들어갔는데, 망설임 없이 거뜬하게 달려냈다. 다만 두바퀴에서 네바퀴굴림으로의 전환이 느리고 네바퀴굴림일 때는 각 바퀴에 힘이 매끄럽지 전달되지 못한다. 또한 전동식 사이드스텝이 장애물에 걸릴까봐 노심초사했다. 리얼 오프로드를 신나게 즐기고 싶다면, 하드코어 오프로더로 눈을 돌리길 바란다.
장거리 시승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정말 조용하다는 것이다. NVH를 확실히 차단했다. 창문을 닫으면 디젤차인지 알아채기 힘들 정도이고, 노면소음이며 풍절음도 확실히 잡았다. 과장하면 시야각이 높은 조용한 세단을 타는 느낌이다. 디젤차 특유의 잔 진동이 있지만, 흠을 잡을 정도는 아니다.
쌍용차는 이 차의 주고객을 40대 이상으로 잡았고, 그들이 좋아할 만한 수준으로 세팅을 잘해놓았다. 가격 경쟁력도 충분하고 덩치와 편의장비도 전혀 꿀리지 않는다. 쌍용차가 잘하는 것 중 하나가 시장이 납득할 만한 가격에 차를 출시한다는 것이다. 보도자료에서 쌍용차가 강조한 ‘4가지의 위대한 진화’나 프리미엄을 느낄 수 없었지만 성공 가능성은 충분해 보였다. 저쪽에서 또 아버지 연배의 남성이 눈을 반짝이며 걸어온다. “어서 오십시오 고객님, 무엇이 궁금하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