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해보지 않은 일을 직접 경험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본 적 있는가? 기자는 최근 그 비슷한 일을 겪었다. 아직 우리나라에 출시되지 않아 타볼 수 없는 차인데, 직접 시승을 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어떤 차를 말하고 있는지는 짐작했을 것이다.
신형 디스커버리 5를 처음 본 건 지난 3월 서울모터쇼에서였다. 하지만 직접 앉아보거나 운전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후부터 디스커버리를 직접 몰아봤다는 착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매달 영국에서 넘어온 디스커버리 관련 기사를 읽다 보니 그렇게 되어버렸다.
크게 달라진 디자인은 머릿속에 완전히 각인됐고, 성능 제원과 신기술도 줄줄 꿰게 됐다. 이 정도 되니 ‘연애를 글로…’ 아니 ‘디스커버리를 글로 배웠어요’라는 말이 떠오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간접경험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동차 평가 때는 좋지 않다. 그간의 경험으로 봐도 직접 타보기 전과 후의 자동차는 분명 달랐다. 긍정적인 평가가 대부분인 디스커버리도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
논란이 많은 디자인에 대해 해외 기자들(UK 편집부 구성원을 포함해)은 관대한 평가를 내렸다(아니면 아예 언급을 않거나). 이 부분에서 경계심을 가졌다. 솔직히 사진으로 본 디스커버리는 별로였다. 이전 모델과 이미지가 전혀 다른 게 주된 원인이다.
디스커버리 하면 ‘각’이 생명이다. 2011년 이보크가 데뷔한 이후 모든 랜드로버가 부드럽고 날렵하게 바뀌었으나 적어도 디스커버리는 각을 유지할 줄 알았다. 그랬던 디스커버리에서 변화의 조짐이 보인 것은 2014년 비전 디스커버리 콘셉트카가 나오면서다. 이름에서 예고된 대로 신형 디스커버리는 콘셉트카의 모습 그대로 등장했다. 그리고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논란은 사그라들었다. 해외에서 날아온 디자인에 대한 평가가 기자의 그것과 너무 달라 당혹스러웠다. 이젠 왜 그랬는지 알 것 같다. 당시 그들은 디스커버리를 직접 봤고, 기자는 그러질 못했다.
신형 디스커버리 디자인에 대한 논란에 불을 지핀 사람들은 실제로 차를 접하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직접 보면 아니라는 걸 알 것이다. 각이 약해지긴 했으나 5세대 역시 디스커버리의 아이덴티티를 따르고 있다. 가장 큰 부분은 고유한 실루엣이다. 껑충한 듯하면서도 묘하게 안정감이 느껴지는 측면의 보디 라인이 그대로 살아 있다. 그러면서 이전세대엔 없었던 근육을 키웠다. 앞뒤 범퍼와 자연스럽게 연결된 펜더 근육은 레인지로버 스포츠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럽다.
사진이나 실물에 관계없이 얼굴만 보면 레인지로버 스포츠나 디스커버리 스포츠가 떠오른다. 헤드램프의 LED가 훨씬 더 입체적이고 프론트 범퍼가 더 두껍지만, 랜드로버의 스포츠 라인업과 전체적으로 유사하다. 디스커버리의 얼굴이 이렇게 날렵해질 줄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디스커버리의 디자인에 대한 논란은 뒷부분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전과는 모든 게 다르니까. 상징과도 같던 세로형 테일램프가 사라진 것도 모자라 상하 분할식 테일게이트도 과감히 없애버렸다. 그 자리를 최신 랜드로버 벨라와 유사한 가로형 테일램프와 매끈한 테일게이트로 메웠지만 마음 한구석이 헛헛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런 큰 변화 때문에 디스커버리만의 개성이 약해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과연 그럴까? SUV 시장 전체로 시야를 확대하면 이만한 개성파를 찾기도 힘들다. 레인지로버와는 또다른 종류의 위압감이 디스커버리 5에서 느껴진다.
개성을 뽐내는 외관과 달리 실내는 별다른 느낌이 없다. 영국에서조차 실내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었는데, 왜 그랬는지 이해가 간다. 디스커버리만의 특징이 너무 약하다. 적어도 운전석 주변만 보면 그렇다. 스티어링 휠이나 12.3인치 가상계기판이 아닌 전통적인 형태의 계기판만 보면 이 차가 어떤 랜드로버인지 알기 어렵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4세대와 큰 차이를 보이는 외관만큼 실내도 전세대와 차이가 확실하다. 구형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급스럽고, 쓰임새가 좋아졌다. 이미 검증을 끝낸 레인지로버나 레인지로버 스포츠의 실내 디자인을 그대로 갖다 썼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4세대와 5세대를 모두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인정할 것이다. 그 어떤 랜드로버보다도 높은 운전위치로 모든 걸 발아래에 둔 것 같은 우월감 말이다.
2열은 다른 말 필요 없이 엄청 넓다. 큰 키 덕분에 넉넉한 머리공간은 말할 것도 없고 2,923mm(4세대는 2,885mm)로 늘린 휠베이스로 무릎공간도 여유롭다. 디스커버리만의 장점인 3열도 한층 여유로워진 기분이다. 다만 앉는 자세에 따라 여유로움이 살짝 달라진다. ‘쩍벌’ 자세로 구부정하게 앉으면 공간이 남고, 꼿꼿하게 앉으면 머리와 무릎공간이 꽉 찬다. 덩치가 좀 작은 사람은 자세에 관계없이 편하게 앉아갈 수 있다.
여기까진 기존 디스커버리에서도 누릴 수 있었던 것들이다. 5세대는 몇발짝 더 나아갔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전좌석을 원격제어할 수 있는 인텔리전트 시트 폴드 기능이다. 센터페시아 터치스크린과 3열 뒤 트렁크 측면의 버튼, 그리고 인컨트롤(InControl) 앱이 설치된 스마트폰을 사용해 2열과 3열 시트를 자유로이 접었다 펼 수 있다. 기대 이상으로 작동이 신속정확하다. 한번 쓰고 나면 손잡이를 당겨 시트를 접는 게 구시대적 행태로 느껴질 만큼 편하다.
안타깝게도 이 기능은 1억원이 넘는 퍼스트 에디션에만 기본이다. HSE 트림 이상은 178만원을 내야 한다. 그밖에도 여러가지 첨단기능이 눈앞에서 아른거리지만, 대부분은 추가금액을 내지 않으면 그림의 떡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신형 디스커버리에서 기대할 수 있는 기본기는 추가금액 없이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단, 랜드로버가 자랑하는 전자동 지형반응 시스템 2나 전지형 프로그레스 컨트롤(ATPC)은 상급 트림에만 기본인 게 거슬리지만, 옵션으로 챙기지 않아도 오프로드 성능이 충분히 강력하다는 걸 영국에서 온 ‘글’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속단은 금물이다.
시승차에는 앞에 적은 두가지 기능 외에 하이/로 레인지를 제공하는 2단 트랜스퍼 변속기, 에어 서스펜션, 전자식 리어 디퍼렌셜 등이 달려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이런 기능을 제대로 쓰면서 달릴 사람이 몇이나 될까. 본격적인 오프로드 코스를 찾기도 힘들뿐더러, 험난한 곳을 이렇게 크고 고급스러우며 비싼 SUV로 뛰어들 용자가 몇이나 될지 궁금하다.
설령 물 만난 고기처럼 디스커버리 5의 한계를 시험할 만한 장소를 찾았다고 해도 모든 걸 차가 알아서 해결해버린다. 그러니 운전자는 이런 첨단장비들이 언제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챌 수 없다.
사진 촬영을 위해 강원도 정선군의 산골짜기를 찾아들어갔는데, 그때 기자가 한 일이라고는 전자동 지형반응 시스템 2를 오토 모드에 맞춘 게 전부였다. 그 사이 디스커버리는 스스로 구동력을 확보하며 앞으로 우직하게 나아갔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다. 오토 모드로 모든 것을 처리하지 못할 때는 지형반응 시스템의 로터리를 상황에 맞게 돌리면 된다.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심한 가뭄 탓에 바닥을 훤히 드러난 계곡을 건너기 위해 암반 모드를 택했다. 차가 성큼성큼 커다란 돌덩어리를 타고넘을 땐 행여 바닥이 긁힐까봐 조마조마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시 아스팔트길에 올라섰다. 여기서 다시 한번 글로 배운 내용을 떠올려 보면 이렇다. ‘차체가 가벼워진 덕분에 가속이 쉽고, 섀시 감각이 몰라보게 좋아졌다. 오프로드뿐만 아니라 온로드에서도 강점을 보이는 전천후 SUV가 됐다’. 솔직히 너무 뻔한 내용 아닌가?
디스커버리 5가 알루미늄 모노코크를 쓴 덕분에 450kg 가벼워졌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파워트레인이 약해지진 않았을테니 가속력이 좋아진 건 너무나 당연하다. 그리고 최근 SUV 시장의 흐름이나 랜드로버 최신모델의 운동성능을 봤을 때 디스커버리 5의 온로드 주행실력은 당연히 좋아야 한다.
실제로 디스커버리가 보여준 모습은 글로 배운 내용 및 기자의 예상과 비슷했다. 그런데 주행이 거듭될수록 훨씬 더 월등한 실력을 보였다. 450kg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그만한 무게가 줄었을 때의 효과가 얼마나 큰지 디스커버리를 통해 알 수 있다.
엔진은 V6 3.0L 디젤에서 기대할 수 있는 딱 그 수준이다. 토크는 강력하고 2.0L 엔진과 달리 고회전대에 접어들어도 갑자기 힘이 빠지는 기색 없이 꾸준히 속도를 올린다. 엔진힘을 받아내는 8단 자동변속기는 무난하다.
체감가속은 기대 이상이다. 액셀 페달을 밟고 있으면 가속이 예상보다 가뿐하다. 무게가 많이 줄었다고 해도 공차중량 2.2톤을 넘는 거구인데, 느낌은 한두 체급 낮은 SUV를 탄 것 같다. 웬걸? 일부에서 지적하던 추월 가속 능력도 탁월하다. 혹여 힘이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변속기를 스포츠 모드(스포츠 주행 모드는 따로 없다)에 두거나 왼쪽 시프트패들을 당기면 된다.
오프로드에서 부드럽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준 스티어링과 서스펜션 등의 섀시 특성은 고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차들은 고속에서 불안하기 마련인데, 디스커버리는 고속 안정성이 대단하다. 네바퀴가 노면을 붙잡는 힘도 월등하지만 그보다는 매끈한 외관이 빚어낸 공기역학의 도움을 더 많이 받는 것 같다. 제원상 최고속도에 근접해 달리는 상황에서도 풍절음이나 잡소리가 전혀 없을 정도로 차체는 매끄럽다.
여기저기 파이고 완만한 코너가 이어지는 강원도의 국도를 달려보면 이 차의 승차감이 얼마나 좋은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전세대도 프레임 보디치고는 승차감이 좋은 편이었는데, 모노코크로 바꾸고 나서 그 수준이 한층 높아졌다. 마치 레인지로버를 타는 기분이다. 때때로 노면정보를 꽤 자세하게 전달할 때는 F-페이스를 타는 기분도 든다.
장점은 딱 여기까지다. 짧은 코너가 연속된 와인딩 로드에 접어들자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한계가 보인다. 우선 스티어링 감각이 불분명하다. 장시간 운전을 해도 스티어링 휠을 얼마나 돌려야 앞바퀴가 돌아가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시종일관 너무 가벼운 것도 불안함을 부추긴다. 재미는 고사하고 안정된 느낌을 받을 수 없다.
서스펜션이 부드럽지만 코너에서 차체를 빠르게 안정시킨다. 그러나 애매한 스티어링 감각이 이런 노력을 허사로 만든다. 직선로를 달릴 땐 딱히 드러나지 않던 무게가 와인딩 로드에서 본모습을 드러낸다. 앞머리는 생각보다 무겁지 않은데, 차체가 길어 회두성이 떨어진다.
아마도 디스커버리 5를 운전하게 될 사람 대다수는 차의 한계를 경험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 친구나 가족을 태우고 3열을 접어서 만든 1,137L 용량의 거대한 트렁크(3열을 세우면 258L로 줄지만, 2열까지 접으면 2,406L가 된다)에 짐을 가득 실은 채 유람을 다닐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커다란 돌이 굴러다니는 오프로드에서 로기어를 선택하고 지형반응 시스템 다이얼을 3시 방향으로 돌릴 일도, 와인딩 로드에서 스티어링 휠을 끝까지 감을 일도 없을 것이다.
여행을 다닌다는 분명한 목표를 세우면 디스커버리 5는 한대 갖고 싶은 차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하루 꼬박 727km를 함께한 결과, V6 3.0 디젤은 아니다. 거칠게 달리긴 했지만 10.6km/L에 불과한 연비가 첫번째 이유고, 가격도 그에 못지않게 부담스럽다. 그런 면에서 240마력의 2.0L 터보 디젤 인제니움 엔진이 괜찮을 것 같다.
물론 이것저것 필요한 장비를 넣다 보면 가격이 훌쩍 올라간다. 디자인에 대한 논란도 한동안 디스커버리 5를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한대 갖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자동차를 글로 배우면 안되고, 경험해보기 전에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되는 걸 알지만, 적어도 디스커버리 5만큼은 먼저 경험한 이들의 말을 믿어야 할 것 같다.
랜드로버 디스커버리 퍼스트 에디션
가격: 1억230만원
엔진: V6 2993cc 터보 디젤, 258마력/3750rpm, 61.2kg·m/1750~2250rpm
변속기: 8단 자동, 4WD
성능: 0→100km/h 8.1초, 209km/h
무게: 2223kg(유럽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