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이맘때 국내 판매를 시작한 신형 E-클래스는 빠르게 가짓수를 늘려왔다. 그 결과 현재 판매 중인 트림만 10여종에 달한다. 쿠페, 카브리올레, AMG 버전을 제외하고도 이만큼이다. 독자가 이 글을 읽을 때쯤이면 두어가지 트림이 더 추가됐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세포분열이 왕성하게 이뤄지고 있다.
비슷한 세력확장은 AMG에서도 볼 수 있다. AMG는 C, E-클래스에 43와 63 두가지 고성능 버전을 제공한다. C, E 모두 세단, 왜건, 쿠페, 카브리올레가 있는데 각 클래스에 43와 63를 붙였으니 가짓수가 많을 수밖에 없다. 전통적인 클래스뿐만 아니라 GLC, GLC 쿠페 같은 SUV에도 AMG 모델이 가세하고 있다.
그중 43 버전은 메르세데스-벤츠의 신차가 공개될 때 뜸들이지 않고 거의 동시에 등장하고 있다. 그만큼 43는 AMG에서 대중적인 버전이고, 바꿔 말하면 벤츠의 일반형에 가깝다.
좋은 예가 AMG E 43다. 이 차는 국내 시장에서 몇달간 E-클래스의 꼭짓점에 섰던 E 400보다 상급모델로 출시되어 1억원의 벽을 가뿐히 넘어버렸다. 추후 E 63가 출시되면 맨 윗자리에서 내려와야 하겠지만, 꼭 그럴 것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E 63는 정통 AMG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어 일반 E-클래스 범주에 넣기엔 어색해 보이는 만큼 E 43가 E-클래스의 최고모델처럼 보일 가능성이 높다. 그 정도로 E 43는 AMG만의 개성이나 E 400와의 차별성이 약해 보인다.
주된 이유는 함께 쓰는 V6 3.0L 트윈터보 엔진이다(E 43는 401마력, E 400는 333마력으로 출력 차이가 크긴 하다). 아울러 9단 자동변속기도 같고, 네바퀴를 굴리는 것, 에어 서스펜션을 갖춘 것도 똑같다.
다행히 외관은 차이가 크다. E 400가 엠블럼을 보닛 위에 세운 익스클루시브 디자인을 채택한 반면 E 43는 커다란 세꼭지별을 그릴 안에 집어넣고 다이아몬드 문양의 AMG 그릴과 스포티한 범퍼를 달았기 때문이다.
미쉐린 파일럿 스포츠 4S 타이어를 끼운 20인치 휠과 카본 패턴의 사이드미러, 리어 스포일러도 차별점이다. 그밖에 검게 처리된 창틀과 불거져 나온 사이드스커트, 배기구 형상 등이 다르다. 이런 차이점을 눈치채지 못하더라도 한눈에 ‘스포티’ 버전임을 알 수 있다. 물론 E 63와 비교하면 평범한 수준으로, 고성능 이미지는 약하다.
실내는 빨간색 박음질로 멋을 낸 대시보드와 스포츠 시트, 알칸타라 마감의 D컷 스티어링 휠 등이 잘 달리는 차라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계기판도 체크무늬 바탕과 AMG 로고를 넣어 차별화했는데, 12.3인치 화면에 그래픽으로 표시되는 가상계기판이어서 AMG 전용 부품을 썼다는 특별함은 덜하다.
도로에 나선 다음에도 한동안은 E 400와 다르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저속에선 단단한 하체가 도드라지지만 편안함과 고급스러움을 해치지 않는 수준에서 타협한 덕분이다.
하지만 오른발을 적극적으로 움직이면 E 400와 지향점이 다른 차임을 알 수 있다. 회전수를 높일수록 엔진소리가 카랑카랑해지고 1.9톤의 가볍지 않은 체구로 힘차게 달려나간다. 0→100km/h 가속성능은 E 400보다 0.6초 빠른 4.6초. E 400도 느린 차가 아닌데 체감성능이 그보다 한차원 높다.
지루함이 사라지고 살며시 미소가 번진다. 연속된 코너를 돌아나갈 때도 마찬가지. 서스펜션을 단단하게 조이고 구동력을 네바퀴로 고루 나눠 차체가 허둥대지 않도록 잘 통제해낸다.
시내를 저속으로 통과하는 사이 갑작스러운 변속충격에 한번 놀라긴 했으나 변속성능도 마음에 든다. 튜닝된 변속기는 패들로 조작할 때 고분고분 말을 잘 듣고, 제멋대로 기어를 갈아타지도 않는다.
다만 6,250rpm에서 시작되는 레드존은 갑갑하다. 최고출력이나 최대토크가 나오는 시점이 E 400보다 뒤로 물러나 있지만 오히려 조금 서둘러서 변속해줘야 한다. 자동으로 맞춰도 알아서 시원시원하게 움직이지만, 운전자가 나서서 쥐어짜면 꿍쳐놨던 보따리를 좀더 꺼내 보인다.
E 43는 네바퀴굴림이지만 구동력의 69%가 뒷바퀴로 가도록 세팅되어 있다. 그렇다고 꽁무니를 쭉쭉 미끄러뜨리는 순수한 뒷바퀴굴림차 같은 느낌을 주진 않는다. 여기서 비롯된 안정감을 바탕으로 편하게 고성능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 AMG 43 모델들의 공통분모다. 운전자가 느긋함을 추구할 때는 고성능차라는 내색을 하지 않고 안락한 E-클래스 세단으로 되돌아간다.
신형 E-클래스가 자랑하는 첨단 안전장비 및 편의장비를 망라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사실 이 차를 타며 감탄사가 나오는 순간은 타이트한 코너를 빠져나오며 회전계 바늘이 6,000rpm을 향해 치달을 때가 아니라 첨단 마사지 기능을 갖춘 시트가 등짝을 뜨끈뜨끈하게 꾹꾹 눌러줄 때였다.
메르세데스-AMG E 43 4매틱
가격: 1억1,200만원
엔진: V6 2996cc 트윈터보, 401마력, 53.0kg·m
변속기: 9단 자동, AWD
성능: 0→100km/h 4.6초, 250km/h
연비: 8.9km/L, 197g/km
무게: 1915k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