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다 CR-V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말이 국내 SUV 시장(특히 중소형 SUV)에서 보기 힘든 가솔린 모델이라는 것이다(전체적으로 가솔린 모델의 비중이 낮은 것은 아니지만, 고성능 및 하이브리드 모델에 편중되어 있다). 이런 희소성 때문인지 CR-V는 국내에서 꾸준한 판매실적을 보여왔다. 물론 미국에서 세운 2012년부터 2016년까지 5년 연속 SUV부문 판매 1위라는 업적에 비할 수 없고, 3세대 모델이 국내에서 잘 나가던 시절과 비교하면 수치를 들먹이기 민망한 게 사실이다. 그래도 4세대까지 이어져온 안락하고 실용적이며 운전하기 편한 CR-V만의 특성이 나름의 팬덤을 형성하기도 했다.
CR-V가 풀체인지를 거쳐 5세대로 변신했다. 국내 데뷔식은 지난 4월초 서울 모터쇼에서 치렀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두달이 지나서야 도로에서 만날 수 있게 됐다. 요즘 나오는 풀체인지 모델들은 변화가 뜨뜻미지근하고, 어디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5세대 CR-V 터보는 변화가 크다. 볼륨감과 곡선을 강조한 3세대 및 4세대와 달리 5세대는 탄탄한 이미지의 2세대로 회귀한 느낌이다.
▲ 중앙의 디지털 스크린은 네바퀴굴림 구동계, 트립 컴퓨터, 엔터테인먼트, 전화 통화, 차체 설정 등 다양한 기능을 지원한다
파격적으로 바뀌었지만 앞모습이 완벽하게 정리된 것 같지 않다. 뭔가 개성적이긴 하나 모습이 선명하게 각인되지 않는다. 기사를 쓰고 있는 지금도 CR-V 터보의 얼굴이 얼른 떠오르질 않는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도로 위에서 미미했던 존재감이 이젠 명확해졌다는 사실이다.팡파짐하던 엉덩이가 한껏 올라가면서 잔근육이 새겨진 것도 좋은 변화다. 그러면서 구형의 장점이던 낮고 넓은 트렁크 입구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직선을 많이 사용하고, 캐릭터 라인도 강해졌다. 그럼에도 누가 봐도 CR-V의 후속작이란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다.
▲ 헤드업 디스플레이는 엔진 회전수와 속도, 엔터테인먼트 정보 등을 제공한다
실내는 반가움과 아쉬움이 교차한다. 무엇보다 나이든 티가 많이 나던 계기판과 센터페시아가 싹 달라진 게 반갑다. 터치스크린은 요즘 유행하는 태블릿PC 스타일로 바뀌어 실내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세련됐다. 화면이 꺼져 있을 땐 독일차의 10인치 와이드 스크린 같지만 블랙 베젤이 두꺼워 실제 크기는 7인치에 불과하다. 구형에 달려 있던 센터페시아 상단의 듀얼 스크린은 사라졌다. 겹치는 내용이 많고 디자인도 별로라는 걸 혼다가 알아챈 것 같다. 3개의 원이 겹쳐 있던 기존의 계기판은 사이버틱하게 바뀌었다. 중앙에 디지털 스크린이 자리하고 좌우에는 LED로 꾸민 수온계와 연료 게이지가 있다.
▲ 예나 지금이나 트렁크 하나는 정말 넓다. 바닥은 높이를 두단계로 조절할 수 있다
계기판은 태블릿PC 스타일의 터치스크린과 함께 CR-V 실내를 산뜻하게 만드는데 일조를 하지만 시인성이 구형만 못한 것 같다. 그밖에도 스티어링 휠 등 달라진 부분이 더 있지만 전체적으로 이전 세대와 비슷하다. 센터페시아에 붙어 있는 기어 레버와 커다란 센터콘솔 수납함, 좌우로 넓게 펼쳐진 대시보드 등이 그것이다. 인테리어에 큰 변화를 주지 않는 게 요즘 트렌드이긴 하다. 전체적으로 괜찮은 디자인이다. 하지만 구형에서 불만이었던 질 낮은 소재를 그대로 쓴 게 아쉽다. 싸보이는 우드 트림도 요즘 트렌드에 맞지 않는다. 5명이 앉을 수 있는 실내공간은 여전히 넉넉해 불만이 없다.
▲ 몸을 잡아주는 능력보다는 안락함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래도 구형보다 좀더 단단하고, 디자인도 스포티해졌다
파워트레인은 크게 바뀌었다. 기존 2.4L 엔진을 버리고 다운사이징의 유행에 발맞춰 1.5L 터보를 올렸다. 배기량이 거의 1.0L나 빠졌는데도 힘부족을 느낄 수 없다(출력은 5마력 커지고, 토크는 0.2kg·m 줄었다). 터보 엔진에 기대할 수 있는 압도적인 토크감은 없지만 회전수를 높여야 큰 힘이 나오던 자연흡기 엔진과 비교할 때 2,000~5,000rpm에서 충분한 가속력이 발휘된다. 따라서 시가지나 고속도로 어디에서든 답답함을 느끼기 어렵고, 힘 분출도 자연스럽다. 터보 래그도 없는 편이어서 스로틀 반응만 보면 자연흡기 엔진 같다.
자연흡기 엔진의 장점인 정숙성도 그대로다. 시동을 걸어도 잡소리나 진동이 전달되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다(밖에선 약간의 소음이 들린다). 마치 하이브리드 SUV 같다. 뛰어난 정숙성은 스로틀을 열어도 이어진다. 그러나 5,000rpm에 근접하는 시점부터는 신경질적인 소리가 앞에서 넘어온다. 이 차를 타면서 고회전을 쓸 일은 많지 않을 터이니 신경 쓰지 말자.
▲ 2열의 낮고 평평한 바닥, 널찍한 공간은 CR-V의 최대 장점이다
엔진힘은 충분한데, 이전세대와 마찬가지로 CVT가 말썽이다. 엔진과 따로 노는 느낌도 들고 원하는 시점에 원하는 만큼 가속하기가 쉽지 않다. 다른 차에는 인위적으로 단수를 나눠 수동 모드를 제공하는 CVT도 달리지만 CR-V엔 없다. 단순히 스포츠 모드만 갖추었을 뿐이다. 이마저도 회전수를 약간 높게 유지하는 데 그쳐 노멀 상태와 별 차이가 없다. 변속기가 아쉽지만 스티어링과 서스펜션 등의 섀시 설정을 보면 혼다가 왜 CVT를 썼는지 얼추 이해가 간다. 바로 안락함을 위해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터보 엔진도 폭발력을 억누른 느낌이 강하고, CVT도 필요 이상으로 부드럽다. 섀시는 이런 특성이 더하다.
스티어링 휠은 손가락 하나로 돌릴 수 있을 정도로 부드럽다. 민첩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스트레스 없이 운전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서스펜션은 구형보다 좀 단단해진 느낌인데, 전반적으로 부드럽고 안락하다. 완만한 요철은 고급세단에 비견될 정도로 부드럽게 소화해낸다. 굴곡이 많은 곳에서는 차체가 통통 튀는 경향도 보이긴 하나, 장시간 운전해도 피곤해 할 일이 없다. 운전자는 운전이 편하고, 탑승객은 안락한 승차감을 보장받기 때문이다.
▲ 힙업과 잔근육으로 완성된 뒤태
부드러운 섀시는 코너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다. 롤도 심하고 앞바퀴는 스티어링 조작에 반박자 늦게 반응한다. 바로 이 부분에서 CR-V에 대한 결론이 나온다. 무리하게 재미를 좇지 말고, 가족과 함께 트렁크에는 짐을 가득 싣고 편안하게 여행을 하기 위한 차 말이다. CR-V는 항상 그래왔고 5세대도 마찬가지다. 새 CR-V를 구입할 사람들 역시 이런 라이프스타일을 염두에 둔 경우가 태반일 것이다. 따라서 이런 면에서만 보면 5세대 CR-V는 아주 훌륭한 차다.
혼다 CR-V 터보
가격: 4,300만원(투어링)
엔진: I4 1498cc 터보, 193마력, 24.8kg·m
변속기: 무단변속기, AWD
연비: 12.2km/L, 138g/km
무게: 1600k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