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73년 등장한 차가 45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10세대에 걸쳐 진화해왔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뉴스거리가 된다. 더군다나 세계에서 2,400만대 이상이 판매됐다면 놀라움은 배가 된다. 10세대까지 진화했다는 것에서는(풀모델 체인지 주기가 5~7년인 것을 감안하면) ‘메이커가 꽤 부지런히 그리고 자주 신모델을 내놨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바로 혼다 시빅 이야기다. 앞에 나온 숫자만 보면 시빅은 찬란한 역사와 위대한 유산을 지니고 있는 자동차가 분명하다.
국내에 시빅이 공식 수입된 것은 2006년, 아시아 버전의 8세대 세단이 처음이다. 기자의 경우 2011년에 처음 접한 8세대 시빅은 매력 있는 차였다. 당시 비슷한 급의 국산차가 정체성 없는 디자인을 지니고 있던 것과 달리 시빅은 미래지향적이고 스포티해 보였다. 달리기 실력은 경쾌하고 승차감까지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쨌든 시빅은 괜찮은 차였다. 그럼에도 판매 실적이 좋지 못했고, 이듬해 들어온 9세대도 잠깐 팔리다가 2015년에 단종됐다.
이제 최신 플랫폼과 혼다의 새로운 디자인 테마가 적용된 10세대가 나왔다. 9세대를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10세대 모델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매우 궁금했다.
외관은 차이가 크다. 8세대부터 이어져온 캡포워드 스타일을 벗어 던지고 패스트백 스타일을 입었다. 낮고 적당히 넓은 차체 덕분에 자세 또한 당당하다. 보디 곳곳에 전에 없던 근육도 키웠다. LED 헤드램프와 굵은 크롬바로 마무리한 프론트 그릴을 갖춘 얼굴은 입체적이고 미래지향적이다. 뒷유리와 트렁크리드가 거의 일직선으로 연결된 뒤쪽은 엉덩이가 높고, 날카로운 테일램프가 더해져 밋밋했던 기존의 시빅 세단과는 차원이 다른 스포티함을 뽐낸다. 그런데 가만 보니 이 디자인, 어디서 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맞다. 유럽에서 팔리는 해치백 모델과 비슷하다(프론트 범퍼의 흡기구를 키우고 거대한 리어윙을 달면 타입 R이라고 착각할 것 같다). 세단과 해치백 버전에 디자인 차이를 뒀던 이전 세대와 달리 10세대부터는 디자인이 통일됐다.
사실 과거의 세단은 디자인에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다. 반면 스포티하고 과격하기까지 한 해치백은 대체적으로 후한 평가를 받았다. 세단과 해치백 어느쪽에 맞춰 이번 시빅을 디자인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시빅 세단이 멋있어졌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그런데 겉만 멋지게 변했을 뿐 실내는 그렇지 못하다. 전체적인 디자인은 CR-V와 흡사하다. 좌우대칭이던 CR-V와 달리 운전자 중심의 디자인을 적용한 것이 다르지만 커다란 틀은 같다. 디지털 스크린을 기준으로 3분할 된 계기판과 직관성을 자랑하는 스티어링 휠, 깔끔한 디자인의 터치스크린이 적용된 센터페시아 등 혼다만의 디자인 통일성을 강조하고 있다.
과거 모델(구체적으로 기자가 경험한 8세대)과 비교하면 굉장히 멋있어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내장재의 품질은 두번의 풀체인지를 거친 최신모델의 것이 맞는지 의심스럽다. 8, 9세대는 고급스럽지 않았지만 적어도 최첨단 이미지를 짙게 풍겼고, 화려한 맛도 있었다.
반면, 10세대는 지나치게 평범하고, 곳곳에서 원가절감의 흔적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감성품질도 국산 준중형차에 비해 부족하다. 외관이 유럽형 해치백에 가까워져 실내도 유럽차 같은 오밀조밀하고 알찬 구성일 줄 알았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시대에 뒤떨어진 실내 구성을 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야 할 차가 시대를 잘못 선택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공간도 넉넉하지 않다. 뒷좌석은 바닥 중간이 높게 솟았고, 머리 공간은 디자인에 의해 희생됐다. 패스트백 스타일이어서 유럽차처럼 트렁크가 뒷유리까지 크게 열릴 줄 알았는데, 아니다. 시빅은 스타일과 실용성 둘 다 챙길 수 있었지만 한쪽만 선택했다.
파워트레인은 요즘 보기 힘든 2.0L 가솔린 엔진을 기반으로 한다. 해외 모델에는 1.6L, 1.8L 엔진도 있고, 강력한 1.5L 터보(CR-V에 탑재), 다운사이징 엔진의 결정판인 3기통 1.0L 터보도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2.0L 엔진과 CVT 조합만 판매된다.
중저속 토크가 강한 터보 엔진에 익숙해진 탓에 4,200rpm에서 19.1kg?m의 최대토크를 내는 자연흡기 엔진이 성에 찰까 걱정이 앞섰다. 160마력의 최고출력 또한 까마득한(?) 6,500rpm까지 도달해야 나오기 때문에 성질 급한 운전자는 이 차의 최고출력을 끌어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의외로 저속에서 알찬 힘을 만들어낸다. 최대토크가 나오기 훨씬 전부터 힘이 넉넉하다. 가속할 때도 답답하다는 느낌이 없다. 답답한 것은 CVT쪽이다. 엔진은 힘차게 회전하면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데, 변속기가 갈팡질팡한다. 오른발을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최고회전수를 써야 할 순간과 저회전대를 유지해 정속주행해야 하는 경우를 파악하지 못한다. 이럴 때 쓰라고 CVT에 스포츠 모드와 저단 모드가 추가된 것 같다. 하지만 이 또한 깔끔하게 해결되진 않는다. 부디 혼란스러운 이 모습이 CVT에 익숙하지 못한 기자의 경험 미숙에서 비롯된 것이길 바랄 뿐이다.
파워트레인의 조합이 최신 트렌드에 맞지 않고 실망스럽기도 하지만 섀시만큼은 조금 다르다. 스티어링이 민첩하고 적당한 피드백을 만들어내는 게 꼭 유럽산 해치백 같다. 서스펜션도 마찬가지. 단단한 쪽에 초점을 맞춰 코너를 돌 때 롤이 심하지 않고, 노면 정보도 적당히 전달한다. 승차감도 괜찮다. 속도에 관계없이 요철의 충격을 잘 걸러내고, 불안한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이 부분만큼은 과거 시빅이 보여줬던 장점이 잘 유지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시빅의 주행감각이 과거에는 장점이었을지 몰라도 요즘은 그렇지 않다는 것. 시빅의 주행감은 최신 국산 준중형 세단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과거와 달리 요즘 국산차는 잘 달리고 승차감도 좋다. 오히려 엔진힘은 더 세다. 국산 준중형 세단에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운전 재미도 시빅보다 뛰어난 것 같다. 실내의 장비와 감성품질은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시간이 흘러 시빅의 내구성이 빛을 발할 수는 있다. 하지만 소비자들이 그것까지 헤아릴 것 같진 않다. 가격이 비슷해도 시빅의 손을 들어주기 어려운데, 차값이 3,000만원에 달하니 상황은 더욱 비관적으로 보인다. 시빅이 내세우는 긴 역사와 찬란한 유산이 국내에서는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