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시한지 수년 지난 자동차가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다. 부분변경을 통해 상품성을 개선할 수 있고 새로운 차체 형태를 추가할 수도 있다. i8을 생각해보자. 양산 모델이 나온 것은 2013년이다. 하지만 i8 컨셉트카는 2011년 나왔고 같은 해 개봉한 <미션 임파서블 : 고스트 프로토콜>에 출연해 이미 유명세를 얻었다. i8의 모태가 된 비전 이피션트다이내믹스 컨셉트카(외관 특징을 물려줬다)가 등장한 것은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 i8을 보며 10년전에 그린 한물간 디자인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여전히 미래의 차 같고 도로를 달리기 보다는 모터쇼 턴테이블 위에 조심스레 모셔져야 할 것 같다.
하지만 BMW는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하는데 머뭇거림이 없어 지난해 부분변경 모델을 내놓았다. 외관이나 실내를 급하게 뜯어고칠 필요는 없지만 부분적인 전기차인 만큼 최신 모터?배터리 기술을 업데이트할 필요가 있었다. 앞바퀴를 굴리는 전기모터 출력을 12마력 높은 143마력으로, 실내 중앙에 세로로 놓인 배터리 용량을 7.1kWh에서 11.6 kWh로 개량했다. 전기모터만으로 주행 시 최고시속이 70km에서 105km로 높아졌고 주행거리도 최대 55km(유럽기준)로 개선됐다.
아울러 새로운 차체 형태를 추가했다. 4도어 세단? 슈팅브레이크? 아니 컨버터블이다. 사실 i8 컨버터블 역시 컨셉트카는 2012년에 나왔다. 때문에 쿠페에 이어 곧 컨버터블이 추가될 것으로 예상한 이들이 많았지만 BMW 내부적으로는 계획이 없었다고 한다. 즉 애초에 지붕이 없는 구조를 고려한 설계가 아니었던 것. 오히려 양산된 쿠페 지붕을 제거해 만든 ‘오픈카’로 이리저리 테스트해보니 썩 괜찮아서 양산절차를 밟았다는 후문이다. 2018년 봄에야 출시한 이유다. i8 로드스터는 2017년 LA오토쇼에서 데뷔했고 우리나라에는 지난해 6월 부산모터쇼에 출품됐다.
컨버터블은 지붕을 여닫을 수 있는 차를 통칭하는 말이고 그 중 2인승 날렵한 차는 로드스터, 스파이더 모델명을 주로 쓴다. 아우디 TT 로드스터, R8 스파이더, 람보르기니 우라칸 스파이더, 아벤타도르 로드스터, 맥라렌 570 스파이더, AMG GT 로드스터 등등. BMW의 경우 4인승 2,4,6,8시리즈는 컨버터블, 2인승 Z4는 로드스터다. i8 쿠페는 작으나마 뒷좌석이 있지만 컨버터블은 2인승이라 i8 로드스터가 됐다. 그런데 왠지 스파이더가 i8에 더 잘 붙는 기분이다. 생김새 때문인가 싶다가 곰곰 생각해보니 2012년 선보인 컨셉트카 이름이 i8 스파이더였다. 양산화하면서 자연스레 기존 라인업 차명과 통일성을 고려한 것 같다. 나 같은 이들의 혼란을 줄이기 위함인지 혹은 시비를 거부하려는 목적인지 차체 옆면과 뒤쪽 윗면에 붙인 ‘Roadster’ 배지가 유난스럽게 보인다(신형 i8 쿠페는 ‘Coupe’ 배지를 붙인다…).
지붕을 컨버터블로 바꾸면서 예뻤던 몸매를 망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i8은 성공적이다. i8의 특징적인 후측면 입체 형상을 고스란히 살렸을 뿐 아니라 전혀 어색함 없이 새로운 매력을 덧입혔다. 조금 냉정하게 말하자면 쿠페의 후측면 유리를 대신해 검게 칠한 가짜 창문 부분이 값싸 보인다. 그 외엔 원래 로드스터로 만들어진 차로 믿어질 만큼 완성도 높다. 창문 프레임이 사라진 도어는 쿠페와 동일하게 A필러를 축으로 해서 바깥쪽으로 벌어지며 위로 열린다(BMW는 ‘걸윙도어’로 칭한다). 옆 차 문에 닿지 않을 정도로 간격을 띄워 주차했다고 마음 놓고 도어를 열어 올렸다가 옆 차 사이드미러가 파손될 수도 있다. 문턱이 높아 타고 내리긴 여전히 불편하지만 지붕이 열렸을 때는 한결 낫다.
부피를 최소화한 지붕에는 후방 창이 없다. 대신 운전자와 동승자 머리 뒤로 하나씩 솟은 둔덕 사이로 바람막이 역할을 겸하는 후방 유리가 있다. 헤드콘솔의 스위치로 높이를 조절할 수 있고 지붕을 여닫을 때는 알아서 움직인다. 지붕 개폐 스위치는 중앙 팔걸이 덮개 안쪽에 숨겼다. 단단한 지붕을 뚝뚝 떼어서 따로 보관하는 탈착식 하드톱 같은 외관이지만 사실 전동으로 작동하는 소프트톱이다. 로드스터 배지가 있는 측면 은색 장식의 절개선을 경계로 쌍봉이 열리고 거짓말처럼, 아주 조용하고 부드럽게 지붕을 접어 삼킨다. 15초가 걸리고 시속 50km 주행 중에도 작동한다.
지붕을 수납하는 쌍봉 덮개 부분이 딱 쿠페의 뒷좌석 위쪽 공간에 해당한다. 사람이 앉을 수 없게 된 아래쪽 공간은 짐칸으로 비우고 필요에 따라 칸막이로 나눠 쓸 수 있도록 했다. 어린이 둘을 포기하는 대신 적재공간이 92L 늘었지만 뒤쪽 트렁크가 쿠페보다 66L 작아진 점을 고려해야 한다. 기존 트렁크와 사이에 엔진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두 적재공간을 터서 긴 짐을 실을 수도 없다. 납작한 차체 앞쪽에는 내연기관이 없지만 앞바퀴 구동을 맡은 전기 모터와 2단 자동변속기가 만만치 않은 부피를 차지해 추가 적재공간은 없다.
그러고 보니 앞유리 근처 보닛 가운데를 푹 파서 열 배출 구조를 보였던 기존 i8과 달리 로드스터는 통풍구 부분이 보닛과 거의 평편하게 연결된다. 이 부분에서 흘러나온 열이 앞유리를 타고 지붕 열린 실내로 침투하는 문제를 개선한 구조인데 부분 변경된 i8 쿠페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실내는 요즘 등장하는 최신 BMW들과 비교해보면 약간 구식 분위기다. 가령 변속레버는 유리 공예가 가미된 최신 디자인이 아니고 운전석 주변 마감은 분명 공들인 가죽과 금속 장식이 있음에도 플라스틱이 주를 이루는 인상을 준다. 다행히 그런 아쉬움을 쉽게 털어낼 정도로 주행감성이 쾌적하다. 슈퍼카로 부르기에 손색없는 외관에 고작 1.5L 3기통인 엔진(미니 쿠퍼의 '쩜오' 터보를 튜닝해 231마력을 낸다)이 실소를 자아내고 놀림거리가 되기도 하지만 실제로 달려보면 가뿐하게 움직이는 차체를 내 맘대로 몰아 붙이는 만족감이 높다. 때론 보조역할로 때론 단독으로 앞바퀴를 구동하는 전기모터뿐 아니라 엔진에 물린 6단 자동변속기와 전기 부스터 역할을 하는 스타트모터 등 복잡한 하이브리드 구동계 덕분이다.
▲ 가상 계기판 외에 변속타이밍을 확인할 수 있는 헤드업디스플레이도 있다
탄소섬유강화플라스틱(CFRP) 모듈이라 지붕을 제거할 때 차체강성 보강이 덜 필요할 것 같고 뒷좌석을 덜어낸 것도 도움이 됐을 테지만 그럼에도 쿠페보단 60kg 무겁다. 대신 로드스터만의 하체 세팅으로 이전보다 언더스티어 경향을 줄이고 앞뒤 균형을 잘 잡아냈다. 여기에 지붕을 열고 달릴 수 있는 기능은 화룡점정이다. 머리 뒤 둔덕에 스피커를 내장했을 뿐 목덜미를 덥혀주는 기능은 없지만 아직 쌀쌀한 새벽에 지붕 열고 타더라도 목덜미가 서늘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속도를 제법 높이 올려도 머리를 엉망으로 만드는 바람의 장난을 잘 막아낸다.
▲ 백조의 호수 같은 주행을 기대하시라
스포츠모드에선 작은 터보 엔진이 열등감을 감추려는 듯 꽤나 꽥꽥거리지만 컴포트모드로 조용하게 바람을 가르며 봄맞이 채비가 한창인 산속 도로를 구비구비 통과하다 보면 쿠페와 차별된 로드스터의 가치가 빛난다. 플러그로 충전해온 배터리를 아꼈다가 이 지점에서 풀어놓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국내 기준 1회 충전 주행거리는 35km. 충전 포인트만 적당하다면 엔진 안 켜고 출퇴근(?)이 가능한 수준이다. 설사 외부 전기로 충전해온 배터리가 소진됐더라도 주행 중 시나브로 자체 충전해 전력이 다시 차오른다. 시동버튼 아래 있는 e드라이브 버튼을 누르면 최고시속 120km까지 전기모터만으로 달릴 수 있다. 엔진으로 주행할 때 뒷바퀴굴림 또는 네바퀴굴림이던 차가 돌연 앞바퀴굴림으로 바뀐다는 사실이 어색하고(기본형 20인치 휠 타이어가 앞 195/50, 뒤 215/45 사이즈인걸 고려하면 더더욱) 코너에서 그리려던 궤적이 적극적인 회생제동으로 인해 어긋나기도 하지만 역시 엔진 소음 없이 글라이더처럼 산들산들 바람을 타고 달리는 맛에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싶어진다. 쿠페보다 비싼 값을 주고 좌석 2개가 적고 무거운 차를 살 이유는 충분하다. 아니, 이제 쿠페는 단종하던지 고성능 i8 S, i8 M으로만 파는 게 어떨까?
SPECIFICATION
엔진 I3 1499cc 터보+전기모터, 4WD, 374마력, 58.1kg·m
연비 12.7km/L, 3.2km/kWh, 55g/km
성능 0→100km/h 4.6초, 250km/h
무게 1660kg
가격 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