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효율적인 차, 위험한 차로 천대 받던 SUV가 오늘날 시장 판세를 좌지우지하는 중심 모델로 부상했다. 브랜드별 원조 SUV를 모았다
너도 나도 SUV다. SUV라야 잘 팔리는 시대다. 비효율적인 차, 위험한 차로 천대 받던 차가 어느덧 가장 쓸모 있고 능력 있는 차의 지위를 노리고 있다. 사실, 차 한대로 모든 것을 소화하자면 요즘 SUV만 한 차도 없다. 그래서 수요는 전세계적으로 급성장 중이고 적어도 앞으로 5년간은 그 기세가 유지될 전망이다. 전통적으로 SUV에 무관심했던 탓에 시장 대응이 늦었던 유럽 자동차 메이커들이 부랴부랴 SUV 라인업을 확장하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한술 더 떠, 체면상 절대 ‘그런 짓’은 안 할 것 같던 스포츠카, 럭셔리 브랜드들 역시 슬슬 눈치를 보며 숟가락을 얹고 있다. 덕분에 불과 십수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브랜드의 SUV들이 속속 선보여지고 있다.
그런데, SUV(Sport Utility Vehicle)가 대체 뭔가? 실은 명확한 정의가 없다. 우리 모두 ‘SUV라면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라는 어렴풋한 이미지를 갖고 있을 뿐이다. 즉,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SUV로 봐야 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SUV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 널리 퍼지기 시작한 것 자체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전까지, 사람들은 오프로더, 4×4, 혹은 그냥 스테이션 왜건이란 말을 애용했다. 따라서, 이제 와서 어느 차가 어느 브랜드의 첫 SUV였는가를 돌이켜보는 것은 자칫 논란에 휘말릴 여지가 있지만, 그만큼 흥미로운 일이라 할 수 있다.
내릴 때는 탈 때의 역순으로...
GM은 1935년 등장한 서버번 캐리올이 세계 최초의 SUV였노라고 주장한다. 0.5톤 트럭 섀시에 8인용 3열 시트 배치의 2도어 왜건 보디를 얹은 기능성 차였다. 흠, 당시 차는 다 이렇게 생긴 것 아니었나? 아무튼 그 명맥이 현재까지 쉐보레의 풀 사이즈 SUV 서버번으로 이어지고 있으니 그 튼튼한 생명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쉐보레는 국내 판매 중인 트랙스, 캡티바 외에도 트레일블레이저, 이퀴녹스, 타호, 트레버스 등 다양한 사이즈의 SUV를 보유하고 있다.
Jeep Willys Station Wagon
우리나라에서 판매된 신진 지프에도 왜건 보디가 있었다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군용차의 오프로드 주파력과 실용성이 관심을 끌게 됐고, 민수용으로 전환되면서 일약 스타로 떠오른 것이 지프였다. 특히 전형적인 지프 보디를 탈피한 윌리스 지프 스테이션 왜건(1946)은 이후 등장한 SUV들의 본보기가 됐다. 사실 SUV라는 말이 생겨나기 전까지 우린 ‘지프차’, ‘지프형차’라는 말을 쓰지 않았던가? 현대적 SUV의 시초로 꼽히는 차 또한 지프 체로키(1984)이다. 이제 지프는 레니게이드에서부터 컴패스/패트리어트, 체로키, 그랜드체로키, 랭글러에 이르는 SUV 라인업을 완성했다.
1966년, 브론코는 지프의 경쟁 모델로 흙바닥에 뛰어들었고 1990년대 명맥이 끊기기에 앞서 ‘OJ 심슨’ 사건으로 전 세계적인 유명세를 탄 바 있다. 현존 포드의 대표작은 1990년 데뷔 이래 미국의 베스트셀링SUV로 꼽히고 있는 익스플로러. 요즘은 동생 이스케이프/쿠가의 인기가 만만치 않다. 에지, 에베레스트, 테러토리 등등 서브콤팩트급의 에코스포트부터 풀 사이즈 8인승의 엑스퍼디션까지 다양한 SUV들이 글로벌 포드의 라인업을 채우고 있다. 포드의 글로벌 판매에서 유틸리티 차 비중은 2012년 17%, 2013년 23%였으며 2020년엔 29%에 달할 전망이다.
지프와 마찬가지로, 브랜드 역사가 곧 SUV 역사인 랜드로버다. 국물을 우릴 대로 우린 사골에 해당하는 디펜더가 곧 퇴역하는 가운데, 고급 SUV를 지향하는 레인지로버 시리즈와 대중적 레저용 차인 디스커버리 시리즈로 라인업이 재편되어가고 있다.
한국전쟁에 공급할 지프를 위탁생산했던 것이 전설의 시작이었다. 토요타는 RAV4, 하이랜더, 4런너, FJ 크루저, 포추너, 세쿼이아, 랜드크루저, 프라도 등의 SUV를 보유하고 있다.
대대로 랜드크루저의 경쟁 모델인 패트롤 역시 초기에는 짝퉁 지프의 모습이었다. 현재의 닛산 SUV로는 쥬크, 캐시카이, 로그, 엑스트레일, 무라노, 패스파인더, 알마다 등이 있다.
이른바 G-바겐, G-클래스를 군용차에서 파생된 오프로더가 아닌 SUV로 친다면, 그 역사는 19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늘날의 SUV 기준에 더 가까운 M-클래스(현행 모델명은 ML)는 1997년에 나왔는데, G-클래스 후속 모델로 미쓰비시 파제로를 도입하려던 협상이 결렬되지 않았다면 시기는 더 당겨졌을지 모른다. M-클래스 바탕으로 나온 GL-클래스 역시 G-클래스 후속으로 기획되었으나 G-클래스는 불멸이었다.
1970년 359cc 공랭2행정 2기통 엔진의 경지프 LJ10이 시초였다. 이후 일본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정통 사륜구동 시스템 및 사다리 프레임을 고집하는 오프로드용 경차, 경SUV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1998년 등장한 3세대 모델이 아직도 판매되고 있다. 이외에 스즈키 SUV로는 에스쿠도, 비타라가 있다.
1982년 데뷔하긴 했지만 첫 프로토타입은1973년에 등장했다. 랜드크루저, 패트롤에 대항할 레저용 차가 목표였다. 우리에겐 현대 갤로퍼의 왜건 보디가 익숙하지만 초기에는 숏휠베이스의 3도어뿐이었다. 데뷔 이듬해부터 파리 다카르 랠리에 나가기 시작했으며 결국 12번 우승, 7연속 우승의 대기록을 남겼다.
1993년 이스즈 SUV에 상표를 바꿔 붙여 판매한 것을 제외하면 혼다의 첫 SUV는 1995년의 CR-V였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팔리는 SUV로 손꼽힌다. 현재 혼다 라인업에 남아 있는 SUV는 CR-V 외에 HR-V(베젤), 파일럿 정도다.
메르세데스-벤츠 M-클래스가 쥐라기공원에서 흙먼지를 날리는 사이, BMW는 굽어진 포장도로에서 가능성을 찾았다. 메르세데스-벤츠보다 SUV 시장 진입이 한발 늦은 BMW는 오프로드 성능은 물론 스포츠카 같은 온로드 성능을 지닌 SUV를 원했다. X5가 SUV가 아닌 세계 최초의 SAV(Sport Activity Vehicle)임을 자처하는 이유다. 생산 공장은 메르세데스-벤츠와 마찬가지로 SUV 최대 시장인 미국에 마련했다. BMW SUV는 1999년 X5를 시작으로 동생 X3, X1, 쿠페형X6, X4까지 식구를 늘린 상태다. X7 출시 계획이 발표되었으며 X2 역시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1세대는 배지만 바꾼 드날리 같았다
1포드의 링컨 네비게이터 출시에 대응해 1999년 GM이 서둘러 내놓은 풀사이즈 럭셔리 SUV가 에스컬레이드였다. 바탕은 GMC 유콘드날리. 첫 시도는 날림이었는데 지금은 용 됐다. 지난해 나온 4세대 모델은 6.2L V8을 얹었고, 차체를 연장한 ESV 버전의 전장은 5.7m에 달한다. 아래급 크로스오버 SUV인 SRX는 2009년 데뷔 이래 캐딜락의 베스트셀링 모델로 자리 잡았다. SRX 후속 모델은 XT5로 이름이 바뀐다.
나름 SUV의 저평가주란다
포르쉐 카이엔, 아우디 Q7과 공동 개발되어 2002년 시장에 나왔다. 셋 중 가장 빠지는 브랜드를 만회하기 위해 V10 디젤 엔진을 탑재하고 보잉747을 끄는 ‘차력쇼’를 선보였는가 하면, 이제 막 벤틀리 벤테이가가 뽑아 든 6.0L W12 카드도 진작 써먹었다. 동생 티구안은 2007년 나왔고 올해 새 모델로 바뀐다.
인피니티의 SUV라고 하면 역시 ‘치타’ FX(2002년)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첫 SUV는 1996년에 나온 QX4였고, 그 정체는 상표를 달리한 닛산 패스파인더였다. 현재 인피니티SUV 라인업은 QX50, QX60, QX70, QX80으로 구성되며 이들은 과거 EX, JX, FX, QX(56)으로 불렸던 모델들이다. 곧 Q30 해치백 바탕의 막내인 QX30이 추가될 예정이다.
LX는 1996년 처음 출시된 이래 지금까지 토요타 랜드크루저를 일부 변형한 모델로 운영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한 단계 아래급인 GX는 랜드크루저 프라도를 바탕으로 한다. 최초의 럭셔리 크로스오버를 자처했던 RX는 올해 4세대 모델이 등장했으며 NX가 막내다.
진작부터 사륜구동 승용차에 집중해온 스바루는 아웃백이라는 뛰어난 SUV 대체재를 갖고 있었지만 비교적 빠른 시기에 크로스오버 SUV 또한 시장에 투입했다. 포레스터는 임프레자의 플랫폼을 유용했으며, 물론 스바루의 상징인 수평대향 엔진과 사륜구동을 결합한 시미트리컬 AWD를 채용했다. 2세대까지는 왜건의 크로스오버 분위기가 강했으나 2007년 나온 3세대부터는 SUV다워졌다.
혼다의 고급차 브랜드 아큐라는1995년부터 북미에서 SLX라는 SUV를 팔았으나 정체는 이스즈 트루퍼 OEM이었다. 2000년, 혼다 자체 개발의 MDX가 SLX를 대체했으며, 형제차지만 전혀 다르게 생긴 혼다 파일럿은 2002년에야 나왔다. CR-V에 해당하는 아래급 모델 RDX도 추가됐다.
1997년 최대 8인승의 풀 사이즈 럭셔리 SUV로 등장한 네비게이터는 포드 익스퍼디션을 바탕으로 했지만 차별화에 성공했다. 아래급 모델인 MKC, MKX, MKT는 모두 크로스오버 SUV이다.
PSA는 2007년 미쓰비시로부터 아웃랜더의 변형 모델을 OEM으로 공급 받아 푸조4007, 시트로엥 C-크로서로 판매했다. 각각의 후속인 4008과 C4 에어크로스 역시 미쓰비시 RVR의 변형이다. 현재 푸조는 자체 SUV(라지만 MPV 색채가 짙은) 모델로 2008과 3008을 갖고 있으며, DS 브랜드에서 중국 시장용으로 DS 6를 내놓고 있다.
오프로드는 못갈것 같나? 천만의 말씀
비난과 우려 속에 등장했지만 포르쉐가 만들면 다르다는 것을 인정받았다. 주행 성능에 놀란 저널리스트들의 묘사는 과장이 심했지만 어쨌든 덕분에 맘 놓고 세단까지 만들 수 있었다. 이제 카이엔 없는 포르쉐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든든한 돈줄이 되고 있다. S, GTS, 터보, 터보S, 디젤, 디젤 S, 하이브리드 등 버전도 다양하다. 아우디 Q5와 플랫폼을 공유한 마칸이 2014년 추가됐다.
과거의 미니가 넘지 않았던 ‘차체 길이 4m, 4도어, 네바퀴굴림’이라는 경계를 처음 벗어난 컨트리맨은 2010년 등장한 이래 아직 풀체인지를 거치지 않았다. 3도어 미니의 한계를 벗어나 보다 많은 미니 고객을 확보하고자 했지만 지금은 내부의 적들이 많다. BMW X5의 쿠페형 SAC(Sport Activity Coupe) X6처럼 컨트리맨 역시 페이스맨이라는 형제차를 갖고 있다.
볼보에는 SUV 대용으로 V70XC(크로스컨트리)가 있었다. 현행 XC70의 전신이다. 좀 더 SUV다운 XC90은 2002년 나왔으며 유독 안전을 강조했다. 껑충한 XC90보다 크기를 줄이고 디자인을 날렵하게 다듬은 XC60은 2008년에 추가되었으며, 2015년 XC90의 2세대 모델이 나왔다. 요즘 볼보는 V40, S60, V60 등 기존 해치백, 세단, 왜건 모델에 SUV 분위기를 입힌 ‘크로스컨트리(CC)’ 버전을 더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투아렉, 카이엔과 플랫폼을 공유했지만 2005년 그들보다 한발 늦게 시장에 나왔고 그만큼 차체와 승차인원을 늘렸다. V12 디젤 엔진을 탑재해 기선을 제압하기도 했다. 2015년 2세대 모델이 나왔다. 아우디 SUV 라인업 역시 팽창 중이다. Q5, Q3에 이어 Q8, 그리고 최근 Q6에 해당하는 전기차 SUV의 양산 계획이 발표됐다. Q1, TTQ에 대한 소식도 들린다. Q7 등장 이전에는 A6 아반트 바탕의 올로드콰트로가 있었다.
시발자동차나, 신진 지프(코란도)를 제외한다면 이스즈 빅혼을 베이스로 1988년 나온 쌍용 코란도 훼미리가 SUV 첫 모델로 보인다. 현대차는 1991년 미쓰비시 파제로 바탕의 갤로퍼를 내놓았다가 2000년에야 자체 개발로 싼타페를 출시했다. 승용차 플랫폼의 크로스오버 SUV로서는 비교적 빠른 시장 대응이었다. 기아자동차가 1993년 내놓은 스포티지는 프레임을 가졌지만 승용차에 가깝게 생긴, 당시 보기 드문 형태로 콤팩트 SUV 시장을 개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