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외길의 뚝심, 세기의 자동차 브랜드 - 프랑스
2016-05-16 09:30:45 글 탑기어 편집부
자동차와 세기의 열애에 빠진 브랜드에 대해 알아본다
1769년, 프랑스. 공병장교인 조셉 퀴뇨는 증기기관이 달린 3륜자동차를 개발해 시험운행에 성공했다. 무지막지한 크기에, 15분마다 물을 공급해야 하고, 사람이 뛰는 속도보다 느린 이 자동차는 당시 사람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끌기엔 역부족이었다. 퀴뇨는 이에 굴하지 않고 증기자동차 개발에 매진했지만 이 위대한 발명품은 뒤이어 발생한 프랑스 대혁명으로 잊혀지고 만다.
245년이 흐른 지금, 자동차산업은 천지개벽 수준으로 발전했다. 이제 자동차는 운전자 없이 스스로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을 정도다. 현대기술산업의 총화라 불리는 자동차산업은 멀고 먼 안드로메다에서 외계인들이 온다면 현생인류를 정의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만큼 현대 문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현대 자동차산업은 조셉 퀴뇨, 니콜라스 오토, 칼 벤츠, 루돌프 디젤 등의 선구자들뿐 아니라 수많은 발명가와 엔지니어의 피와 땀으로 이뤄졌다. 특히 100년 이상 자동차 기술개발에 매진한 회사가 없었다면 현재 우리가 누리는 최첨단의 자동차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번 기획기사는 한세기 넘게 자동차와 열애에 빠진 브랜드를 위한 오마주다. 그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노고에 감사 드린다.
후추 그라인더 회사가 자동차를 만들기까지, 푸조
푸조의 역사는 18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창기 푸조는 후추, 커피, 소금 분쇄기(그라인더)는 물론 우산 프레임, 철사 등을 만드는 회사였다. 가업을 물려받은 아르망 푸조가 1890년 자동차회사를 설립하면서 푸조자동차의 역사가 시작된다.
초기 푸조는 증기기관을 얹었으나 고장이 잦아 1891년부터 다임러사의 가솔린 엔진을 사용했다. 1893년, 2,045km 거리의 파리-브레스트 왕복 레이스에서 푸조 타입3이 우승을 차지하면서 유명해졌다. 타입3은 1891~94년 64대가 생산된 첫 양산차로, V2 565cc 2마력 엔진을 사용했다.
이후 푸조는 대중을 위한 자동차뿐 아니라 모터스포츠에도 꾸준히 참가해 자동차 기술을 차곡차곡 쌓아간다. 1929년에는 푸조의 역사적인 모델 201이 등장한다. 이 차는 푸조의 첫번째 대량생산 모델이자 새로운 작명법을 사용한 첫번째 모델이기도 하다.
새로운 모델명은 맨 앞에 숫자는 차의 크기, 뒤 두자리는 세대명을 뜻한다. 즉, 푸조 201은 푸조의 2시리즈 첫 번째 세대라는 뜻이다. 이 작명법은 일찌감치 푸조가 특허등록을 해 포르쉐가 901을 911로 바꿔야 했다는 일화로도 유명하다. 또한 4자리수 모델은 크로스오버를 뜻한다. 하지만 2012년부터는 새 모델이 발표돼도 X08은 유지한다.
1983~1998년 생산된 푸조 205는 이탈리아 피닌파리나가 디자인한 소형차로, 선풍적인 인기 속에 약 500만대가 팔려 프랑스 국민차로 자리를 잡았다. 또한 푸조는 골프 GTI와 경쟁하기 위해 스포츠성을 살린 205 GTI, 푸조 최초의 터보차저 엔진을 장착한 205 T16도 선보인다. 석유파동이 한창이던 1975년 푸조는 같은 프랑스 자동차회사인 시트로엥을 인수해 현재의 PSA그룹이 되었다.
1978년에는 크라이슬러 유럽을 인수해 몸집을 불렸다. 현재 푸조는 북미를 제외한 전세계 시장에서 자동차를 판매하고 있으며 국내에는 동부그룹에 의해 1988년에 진출했다. 하지만 외환위기의 여파로 1998년 철수했고 2002년 현 수입사인 한불모터스에 의해 다시 수입되기 시작했다.
푸조의 엠블럼은 1847년부터 사용되고 있다. 푸조의 공장이 있던 벨포르의 수호 동물인 사자를 브랜드 상징으로 삼은 것이다
부가티는 이탈리아 밀라노 출신의 에토레 부가티가 독일 점령지였던 프랑스 몰스하임에 세운 자동차회사였다. 부유한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난 부가티는 10대 시절 직접 삼륜차를 만들어 레이스에 참가할 만큼 일찍이 기술자로서의 재능을 보였다. 1900년에 첫 자동차를 만들고 1909년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를 세웠다.
1920년대가 되어 부가티의 진가가 드러났다. 1924년 데뷔한 부가티 T35는 공기역학적인 차체와 최초의 알루미늄 합금휠 등 앞선 기술을 채용, 수많은 경주에서 우승을 차지해 명차의 반열에 올라섰다.
1차대전 당시 프랑스로 망명해 16기통 전투기 설계를 했던 부가티는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왕족과 부호들을 겨냥한 호화차를 만들기도 했다. 1926년의 T41 르와얄이 그 주인공이다. 이 차는 8기통 12,700cc 엔진을 탑재하고 길이가 6.7m나 되는 당대 최고의 리무진이었다. 부가티는 제2차세계대전 발발로 직격탄을 맞았고, 1947년 부가티 사망 후 회사도 잊혀져갔다.
1987년 부가티라는 이름을 되살린 사람은 이탈리아 사업가 로마노 아르티올리였다. 그는 새로운 수퍼카를 개발해 부가티 EB110이라는 이름으로 시장에 내놓았으나 1995년 도산했다.
1998년, 부가티 상표권은 폭스바겐그룹으로 넘어갔고, 2005년 마침내 몰스하임 공장에서 부가티 베이론 16.4가 굴러나왔다. 이 차는 W16 8.0L 쿼드터보를 얹고 1,001마력의 무시무시한 출력을 뽑아냈다. 이후 개량을 거쳐 1,200마력까지 성능을 높인 베이론은 최고속도 431km/h로 내달려 도로용차 속도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말을 사랑했던 에토레는 자신이 만든 차에 편자 모양 프론트 그릴을 달고는 했다. 타원형은 우아함과 기술을 상징하며 에토레 부가티의 이니셜과 함께 60개의 작은 진주를 박았다
단추공장 사장의 아들인 루이 르노가 처음 자동차를 만든 해는 1898년, 21살 때였다. 그런데 차를 만든 이유가 좀 엉뚱했다. 몽마르트 언덕을 오를 수 있는지 친구들과 내기를 하여 드디옹 부통의 3/4마력 엔진에 훗날 특허를 낸 3단 기어를 달고, 구동장치를 직접 만들어 차를 완성한 것이다. 1899년 형제인 마르셀과 페르낭이 합류해 르노공작소를 창업했다. 초창기 르노는 해마다 성장을 거듭했으며, 특히 택시를 많이 만들었다. 하지만 제2차대전 때 독일군의 포격으로 대부분의 공장시설이 파괴되고, 히틀러의 압력에 못이겨 독일군에 차를 납품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나치 협력자로 찍혀 고초를 겪다가 1944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1945년 국영 자동차회사로 재출범한다.
전후 처음으로 등장한 차는 바퀴를 뒤에 얹고 뒷바퀴를 굴리는 4CV다. 이 차는 루이 르노가 전쟁 중 비밀리에 개발한 것으로 1947년 생산에 들어가 1961년까지 110만대가 생산되었다. 1969년 해치백인 르노 12와 6(4도어) 등을 발표해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듬해 100만대를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다. 1994년, 프랑스정부는 마침내 여러 회사와 제휴와 결별을 반복하고, 실패와 성공이 엇갈리는 차들을 내놓으며 갈팡질팡하던 르노를 민영화하기로 하고, 일본 닛산과 손을 잡아 르노-닛산 얼라이언스를 출범시켰다.
초창기 함께 회사를 운영했던 형들과의 우애를 형상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