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외길의 뚝심, 세기의 자동차 브랜드 - 미국
2016-05-16 09:31:30 글 탑기어 편집부
자동차와 세기의 열애에 빠진 브랜드에 대해 알아본다
1769년, 프랑스. 공병장교인 조셉 퀴뇨는 증기기관이 달린 3륜자동차를 개발해 시험운행에 성공했다. 무지막지한 크기에, 15분마다 물을 공급해야 하고, 사람이 뛰는 속도보다 느린 이 자동차는 당시 사람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끌기엔 역부족이었다. 퀴뇨는 이에 굴하지 않고 증기자동차 개발에 매진했지만 이 위대한 발명품은 뒤이어 발생한 프랑스 대혁명으로 잊혀지고 만다.
245년이 흐른 지금, 자동차산업은 천지개벽 수준으로 발전했다. 이제 자동차는 운전자 없이 스스로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을 정도다. 현대기술산업의 총화라 불리는 자동차산업은 멀고 먼 안드로메다에서 외계인들이 온다면 현생인류를 정의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만큼 현대 문명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현대 자동차산업은 조셉 퀴뇨, 니콜라스 오토, 칼 벤츠, 루돌프 디젤 등의 선구자들뿐 아니라 수많은 발명가와 엔지니어의 피와 땀으로 이뤄졌다. 특히 100년 이상 자동차 기술개발에 매진한 회사가 없었다면 현재 우리가 누리는 최첨단의 자동차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번 기획기사는 한세기 넘게 자동차와 열애에 빠진 브랜드를 위한 오마주다. 그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노고에 감사 드린다.
미국의 대표적인 럭셔리 브랜드 캐딜락은 1902년 헨리 릴랜드에 의해 설립됐다. 릴랜드는 당시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던 디트로이트 자동차회사(헨리 포드가 설립)을 인수해 1701년 미국 디트로이트시를 개척한 프랑스 귀족 ‘르쉬외르 앙투안 드라 모스 카디야’의 이름을 따서 캐딜락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이후 릴랜드는 1903년 캐딜락 최초의 양산차인 모델A를 출시하며 미국 상류층 시장을 공략했다. 모델A는 단기통 10마력 엔진을 사용해 48km/h의 속력을 낼 수 있다. 1907년 캐딜락은 세계 최초로 250개의 자동차 부품을 표준화해 부품 호환이 가능한 모델S를 선보였다. 이어 미국차 최초로 영국왕립자동차클럽에서 수여하는 드와 트로피를 수상했다.
1909년 캐딜락은 GM과 계약을 맺고 합병된다. 캐딜락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거대한 차체와 후면을 장식한 테일핀 장식일 것이다. 이 테일핀은 GM의 디자이너였던 할리 얼이 록히드 P38 라이트닝 전투기의 쌍발 꼬리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했다. 테일핀 캐딜락은 1950~60년대 미국의 호황기의 상징물이 될 정도로 큰 인기를 누리게 된다. 특히 캐딜락 엘도라도는 테일핀 디자인의 정점을 이루며 록큰롤의 아이콘, 엘비스 프레슬리의 애마로도 유명했다.
다른 미국 브랜드가 그랬듯이 캐딜락도 1970년대 두차례 석유파동을 거치고 유럽산 프리미엄 브랜드에 밀려 주춤거리기도 했지만 여전히 미국에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2001년 브랜드 100주년을 기념해 출시한 캐딜락 CTS를 비롯해 다양한 라인업을 갖추고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캐딜락의 크레스트 엠블럼은 카디야 가문의 문장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됐다
자동차의 왕 헨리 포드(1863~1947년)는 어렸을 때부터 손재주가 뛰어나 열다섯살 때 기계공으로 취직해 자동차 만들기에 열중했다. 1896년의 어느 날, 엔진에 대한 책을 읽던 포드는 자신만의 엔진을 만들어 그것을 마차에 달아 말이 없이도 달릴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해 6월 첫 번째 자동차를 완성했다. 1903년 디트로이트의 작은 사무실에서 11명의 직원으로 출발한 포드자동차는 세계적인 자동차회사로 성장하게 됐다.
성공의 시발점은 1908년 10월 발표한 포드 모델T였다. 부유층만 차를 타던 시절에 포드는 서민들이 탈 수 있는 차를 만들어 825달러(98만원 정도)의 저렴한 가격표를 붙였다. 그의 예상은 적중해 1914년까지 50만대 이상이 팔리며 미국 전체 자동차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둔다. 이 차는 1927년 단종될 때까지 총 1,500만대가 판매됐다.
이러한 성공은 1913년 도입한 포드 시스템이 한몫을 했다. 대량생산을 위해 만든 이 시스템은 컨베이어 벨트로 부품을 옮기고, 노동자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분업을 하는 방식으로, 오늘날 대부분의 공장에서 도입할 정도로 앞선 방식이었다. 포드는 자동차만 많이 만든 것이 아니라, 노동시간을 줄이고, 급료를 넉넉하게 지급했다. 노동자들이 곧 포드자동차의 고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드는 변화를 거부한 탓에 1920년대 말 GM에, 1937년에는 크라이슬러에 뒤져 3위로 밀려났고, 경영이 어려워졌다. 1945년부터 1979년까지 헨리 포드의 손자인 포드 2세가 경영을 맡아 토러스 등의 히트상품을 만들기도 했으나 끝내 옛 영광은 되찾지 못했다.
결국 2001~2002년 64억달러(약 7조4,240억원)의 영업손실을 냈고, 주가가 3분의 1로 떨어지는 등 또 다시 위기에 몰렸다. 다행히 2009년에는 29억원가량의 흑자를 기록해 디트로이트에 자리잡은 빅3 메이커 가운데 유일하게 미국 정부의 구제금융을 받지 않았다.
포드가 인수한 재규어와 랜드로버는 2008년 인도의 타타모터스에 매각했고, 2010년에는 볼보를 매각해 현재는 포드와 링컨만 운영하고 있다.
포드는 창업자인 헨리 포드의 이름을 땄다. 첫 치프 디자이너가 제작한 엠블럼을 1910년경부터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쉐보레는 1911년 GM의 설립자 월리엄 듀런트와 레이싱 드라이버였던 루이 쉐보레가 창업했다. 미국 자동차의 메카인 디트로이트에서 출발한 쉐보레는 GM의 대표적인 브랜드로, 세계 4위의 생산규모를 자랑한다. 쉐보레의 첫 모델은 루이 쉐보레가 개발에 참여한 시리즈C 클래식 Six다.
이 차에는 당시 고급차에만 사용되던 전기 시동장치와 헤드램프 등을 장착했지만 가격은 포드 모델T보다 낮아 큰 인기를 누렸다. 쉐보레의 대표차종은 콜벳과 카마로다. 콜벳은 1953년 GM의 디자이너 할리 얼의 작품으로, 유럽 스타일의 유려한 차체로 큰 인기를 누렸다. 콜벳의 대표모델은 스팅레이다. 1961년 마코 샤크라는 콘셉트카로 데뷔한 이후 1963년 가오리를 뜻하는 스팅레이로 출시됐다.
쉐보레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는 스몰블록 V8 엔진이 탑재된 스팅레이는 미국산 머슬카답지 않게 뛰어난 코너링 성능으로 사랑을 받았다. 콜벳과 함께 쉐보레의 아이코닉 모델은 바로 카마로다. 포드 머스탱의 대항마로 1966년 출시된 카마로는 아메리칸 머슬카를 대표하는 차다.
나비 넥타이를 연상하는 쉐보레의 보타이 엠블럼은 1914년부터 사용됐다. 쉐보레 로고에 대해서는 공동 설립자인 루이 쉐보레 부모의 국적인 스위스 국기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설과 윌리엄 듀런트가 파리의 호텔 벽지를 보고 생각해냈다는 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