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으로 자동차 정체성 찾기
2016-11-22 08:00:00 글 김준혁 기자
디자인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아니 변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그 시대를 관통하는 사상 그리고 환경이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이다. 디자인은 이런 여러가지 요소가 맞물려 나온 결과물이기 때문에 어떤 물건을 단순히 멋지고 예쁘게 꾸미는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자동차 디자인도 마찬가지. 시대가 바뀌면서 자동차 디자인도 지속적으로 달라져왔다. 최근에는 변화의 주기가 점점 빨라져 조금만 방심하면 그 흐름을 놓치고 만다. 그런데 수십년 동안 똑같은 디자인을 고수하는 차들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오리지널 디자인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핵심적인 부분을 살리면서 자잘한 변화를 거듭해왔다. 그 결과 전통과 현대미가 잘 버무려진, 누가 봐도 ‘ 아, 그 차’ 하고 알아볼 정도로 강한 정체성을 갖게 됐다.
MINI Hatch
미니 해치백만큼 고유 디자인을 잘 지켜오고 있는 차는 흔치 않다. 클래식한 디자인이야말로 미니의 상징이며 오늘날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다. 미니 해치백은 1959년 등장해 2000년까지 똑같은 모습으로 생산됐다. 4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3m 안팎의 차체, 사다리꼴에 가까운 육각형 프론트 그릴, 원형 헤드램프, 짧은 오버행 같은 오리지널 디자인을 그대로 유지해왔다. 이후 BMW 소속이 되어 새로워진 미니 해치백이 등장했지만 알다시피 디자인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차체를 키우고 자잘한 변화를 주었을 뿐이다. 물론 성능과 편의성은 크게 개선됐다. 뉴 미니 2세대와 3세대 역시 디자인 원칙을 충실하게 따랐다. 3세대는 너무 커져서 미니답지 않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디자인은 크게 변한 것이 없다.
MERCEDES-BENZ G-Class
36년 전에 나온 디자인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면 ‘살아 있는 화석’, ‘사골국’이라는 비아냥을 듣는 게 보통이지만 G-클래스에는 통하지 않는다. 잘 만든 디자인 하나만 있으면 몇년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는데 G-클래스가 그 경우다. G-클래스는 크게 2세대로 분류된다. 1세대인 460은 1979년부터 1991년까지 생산됐다. 차체에 비해 왜소한 범퍼와 둥근 헤드램프, 각진 실루엣, 사다리꼴 휠아치 등이 G-클래스의 특징이다. 2세대인 463은 1990년 등장했다. 풀 체인지였지만 원조 모델의 특징을 이어받으면서 덩치를 키우고 스타일을 다듬었다. 1997년과 2005년, 2012년에 작은 변화가 있었지만 배기규정을 충족시키기 위해 파워트레인을 개선하고 편의장비를 더했을 뿐이다. G-클래스의 화석 같은 디자인은 너도나도 비슷해지는 자동차들 속에서 눈에 띄는 ‘레어템’으로 여겨지고 있다.
MAZDA MX-5
마쯔다 MX-5는 1989년 데뷔 후 현재 4세대가 판매되고 있다. MX-5를 이 자리에 넣기에는 애매한 구석이 있다. 소형 로드스터의 전형적인 공식을 따른 차이기 때문이다. 비교적 긴 보닛과 최소한의 실내공간, 짧은 트렁크 등 ‘롱 노즈, 숏 데크’ 디자인은 FR 구동계 스포츠카의 전형적인 구성이다. 그럼에도 MX-5는 25년 이상 똑같은 방식을 지켜오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자리에 나올 자격이 충분하다. 초기의 귀여운 이미지가 공격적인 모습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디자인 정체성은 약한 편이다. 좋게 말하면 세대마다 개성이 뚜렷하다. 2세대까지는 여성적인 이미지였고, 3세대는 중성적이며, 지난해 데뷔한 4세대는 단단하고 다부진 모습이다. 다행인 것은 그동안 디자인에 대한 호불호가 없을 만큼 완성도가 높다는 점. 경량 로드스터 고유의 디자인 공식과 실루엣도 잘 유지하고 있다.
NISSAN Z Series
닛산의 소형 뒷바퀴굴림 스포츠카 Z시리즈의 역사는 꽤 길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350Z는 5세대였고, 1세대 240Z가 나온 게 1969년이니 5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셈이다. 240Z는 지금의 370Z와 많이 닮았다. 1세대는 콤팩트하면서도 날렵한 소형 스포츠카의 특징을 잘 보여줬다. 2세대 280ZX는 차체가 조금 커졌으나 패스트백 실루엣을 그대로 유지했다. 3세대인 300ZX(Z31)는 패스트백 디자인만 살렸을 뿐 이전 모델과 공통점이 거의 없었다. 4세대인 300ZX(Z32)는 1990년대 유행한 유선형 디자인을 채택해 Z시리즈라는 사실을 전혀 알 수 없을 정도로 달라졌다. 다행히 2002년 등장한 5세대 350Z에서는 옛 이미지를 회복했다. 그리고 2009년 나온 6세대 370Z에서 마침내 Z시리즈의 디자인이 부활했다. 콤팩트하면서 긴 보닛과 패스트백 스타일, 귀여운 소형 스포츠카의 특징을 30여년만에 되찾은 것이다.
CHEVROLET Corvette
쉐보레를 대표하는 스포츠카 콜벳은 1953년에 데뷔했으니 환갑이 훌쩍 넘었다. 콜벳의 특징은 낮고 뾰족한 쐐기형 노즈와 긴 보닛, 패스트백 스타일의 뒷모습을 들 수 있다. 전형적인 스포츠카의 날렵한 디자인이다. 그러나 1세대는 날렵함과는 거리가 먼 낭만파(?) 디자인이었다. 앞에서 적은 콜벳의 디자인 특징은 1963년 발표된 2세대(C2)에 처음 적용되었는데, 지금 봐도 상당히 미래지향적인 모습이다. 이후 콜벳은 이 흐름이 유지하면서 변화를 거듭해왔다. 6세대(C6)에서는 쐐기형 디자인과 함께 콜벳의 또 다른 상징이던 팝업식 헤드램프가 일반형으로 바뀌었다. 이때문에 콜벳의 개성이 많이 흐려졌다는 악평을 들어야 했다. 2014년 데뷔한 최신형 7세대(C7) 모델에서는 근육질과 모던함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2세대와 7세대를 따로놓고 보면 비슷한 구석을 찾기 어렵다. 이렇듯 한번 집 나간 디자인 정체성을 다시 불러들이기는 쉽지 않다.
PORSCHE 911
포르쉐 911이 데뷔한 해는 1963년이니 반세기가 넘었다. 하지만 1세대 911과 최신 6세대 모델은 커다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바로 개성 있는 측면 실루엣이다. 수평대향 엔진을 뒤차축 뒤에 놓은 독특한 구성은 기존 자동차와 전혀 다른 실루엣을 만들어냈다. 곧추선 윈드실드와 A필러에서 정점을 찍고 루프와 뒷유리, 엔진 리드를 거쳐 리어 범퍼까지 완만하게 떨어지는 독특한 라인은 911의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디자인 요소다. 이 디자인은 1세대부터 964와 993, 996, 997을 거쳐 최신 991까지 이어지고 있다. 50년 동안 디자인이 조금씩 변하긴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윈드실드 각도가 낮아졌고, 리어 범퍼가 두툼해지면서 뒤쪽 라인도 상당히 완만해졌다. 하지만 911만의 실루엣은 변함이 없다. 이 실루엣이 911을 넘어 브랜드의 상징으로 자리를 잡았기에 포르쉐는 카이엔·파나메라·마칸에도 적용하려 했다. 하지만 세단과 SUV에도 잘 어울리는지는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