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자동차 디자이너 하면 유럽이나 미국 출신의 서양인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자동차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디자인이 매력적인 자동차는 언제나 ‘외국인’ 디자이너의 작품이었으니까. 개인적으로는 이탈디자인의 조르제토 쥬지아로나 BMW를 이끌었던 크리스 뱅글이 떠오른다. 아니면 올해 초에 만났던 재규어의 이안 칼럼이나.
근래 들어 유명 자동차 디자이너에 한국인 이름이 심심치 않게 오르내리고 있다. 영화 <트랜스포머>에 나왔던 카마로를 디자인하고 벤틀리에 있다가 최근 현대차 제네시스로 옮긴 이상엽 디자이너부터 BMW의 강원규, 포르쉐 정우성 디자이너 등이 바로 그들이다. 외국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카디자이너의 수는 400명(국내 디자이너 제외)이 넘는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한국인 디자이너가 없는 자동차회사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업계에서의 영향력이 대단하다고 한다. 자동차 디자인의 한류시대가 열린 셈이다.
왼쪽부터 임범석(상하이 트랜스 랩 대표), 이상엽(현대차 제네시스 디자인 상무), 리차드 정(ADIENT 신상품·디자인 총괄 부사장), 루크 동커볼케(현대차 제네시스 브랜드 전무)
한류가 확산되면 당연히 한류 스타도 생겨나는 법. 앞에서 언급한 디자이너들은 누군가에게는 한류 아이돌 스타 못지않은 선망의 대상일 것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 디자이너를 꿈꾸는 어린 학생들 말이다. 하지만 스타를 만나기는 힘들다. 그들은 무척 바쁘고 주로 외국에서 활동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9월 24~25일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스타 디자이너들을 직접 만나볼 기회가 있었다. 한국 출신 자동차 디자이너들이 만든 KADA(Korean Automotive Design Association)에서 주최한 스마트 모빌리티 디자인 워크숍을 통해서다.
닛산 디자인 총괄 부사장 나카무라 시로(좌)와 크리스토프 듀퐁 르노그룹 아시아지역 디자인센터장(우) 등 디자인 업계 주요인사들이 참석했다
스마트 모빌리티 디자인 워크숍은 현역 디자이너들이 자동차 디자이너를 꿈꾸는 고등학생과 대학생을 대상으로 그들의 꿈과 열정을 일깨워주고 안내하기 위해 마련된 행사였다. 워크숍은 24일 두차례의 세미나, 25일 세미나와 디자인 그랑프리로 구성됐다.
다양한 주제를 놓고 발표가 이어졌다
24일 오전, ‘자동차 디자인이란 무엇이며, 자동차 디자이너의 길과 미래’에 대한 주제로 임범석 트랜스 랩 상하이 대표의 강연이 있었다. 오후에는 현대차 아이오닉, 쉐보레 볼트, 기아차 니로 같은 친환경 자동차의 개발과정에 대한 소개가 이어졌다. 25일 오전 세미나에서는 현대차 제네시스의 이상엽 상무를 포함해 여러 디자이너가 참여해 자동차 디자이너가 하는 일과 스마트 모빌리티의 미래에 대해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세미나는 어려운 용어와 내용이 포함돼 있어 학생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굉장히 흥미로워했고, 집중해서 들었다. 고등부 대상 24일 오전 세미나에는 중학생들도 눈에 띄었다. 심지어 초등학교 2학년 어린이도 있었다.
어린 학생들은 ‘자동차 디자인은 자동차의 겉모습, 눈에 보이는 부분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 전체를 이해하고 새로운 콘셉트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한다’는 내용을 쉽게 받아들였다. 또 1930~40년대에 자동차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처음 생겼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그 정도로 예비 자동차 디자이너들은 아는 것이 많았다.
이들의 모습에서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열정과 함께 자신들의 진로에 대해 걱정하는 것도 느껴졌다. 다행히 많은 궁금증과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해소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현역 디자이너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의 자리에 오게 되었는지 자세히 알려주고 뒤이어 열린 질의응답 시간을 통해서였다.
소속도 이름도 유명한 포르쉐 정우성 디자이너가 조언을 하고 있다
포르쉐와 토요타, 닛산, 포드 등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들이 자동차 디자인을 하게 된 이유는 다양했다. 단순히 차가 좋았던 이유도 있고, 그림을 좋아하다가 어느 순간 자동차 디자인에 꽂혀 디자이너로 들어서게 된 이야기, 자동차 공학을 공부하다가 전공을 바꿔 어렵게 디자이너가 된 사연도 있었다.
학생들은 어떻게 하면 카디자이너가 될 수 있는지를 물었다.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성실히 답해줬고 직접 스케치 시범까지 보이며 학생들의 갈증을 풀어주었다. 검색만 하면 모든 지식을 알려준다는 인터넷으로도 알아낼 수 없는 고급 정보가 디자이너와 학생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오갔다.
같은 날 오후 대학부 세미나는 좀더 심도 깊은 주제를 다뤘다. 현대기아차와 한국지엠 디자이너들이 나와 아이오닉과 니로, 볼트 같은 친환경 자동차가 어떤 과정을 거쳐 개발되고, 최종 디자인이 나왔는지 자세히 알려줬다. 그 과정에서 흥미로운 비하인드 스토리가 소개됐고 학생들은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졌다.
이어서 자동차 디자인의 현재와 미래를 주제로 한 세미나가 진행됐다. 훌륭한 자동차 디자이너에 대해 리차드 정 KADA 회장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예전에는 스케치나 렌더링만 잘하면 좋은 자동차 디자이너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어야 한다. 또한 자동차가 소유에서 공유의 개념으로 바뀌고 있는 만큼 카디자이너도 사고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25일 오전 세미나 주제는 ‘자동차 디자인의 세부적인 카테고리’로 익스테리어와 인테리어, CMF(Color, Material, Finishing), 디지털 모델링 등에 대한 소개가 있었다. 해당 분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학생들에게 많은 도움이 됐다.
현역 디자이너들과 학생들 사이에 진지하고 알찬 대화가 오갔다
세미나가 끝나고 대학생과 현역 디자이너들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도 가졌다. 학생들은 진로에 대한 고민은 물론이고 유학, 어학 연수와 같은 디자이너가 되기 전의 과정에 대해서도 질문을 쏟아냈다. 디자인을 진행할 때 어디서 영감을 얻고, 스케치 연습은 어떻게 하며, 회사에서는 어떤 프로그램으로 디지털 렌더링을 하는지 등등 전문적인 내용도 적지 않았다.
학생들의 궁금증에 대해 리차드 정 회장은 간단하게 정리를 해줬다.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얘기를 들어 머릿속이 복잡해진 학생들을 위한 배려였다.
“자동차와 산업을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좋은 디자이너가 될 수 없다. 관련산업을 두루 알고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판단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다양한 분야에 흥미를 갖고 공부하기 바란다. 디자이너가 된 뒤에 컬러, 소재, 엔지니어링, 인테리어, 익스테리어 중 어떤 것을 맡게 될지 모른다. 그러니 한 분야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경험을 쌓을 필요가 있다.”
참가 대학생들은 디자인 그랑프리를 통해 창의력과 실력을 발휘했다
25일 오후에는 스마트 모빌리티 디자인 그랑프리가 펼쳐졌다.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디자인 경연대회다. 학생들은 제시된 주제에 대해 20분의 짧은 시간에 디자인 스케치를 제출해야 했다. 대회는 서바이벌 방식으로 치러졌다. 100명에 가까운 학생이 참가해 1라운드에서 30명을 선발하고, 2라운드에서 최종 결선에 오를 10명을 뽑았기 때문에 오디션 프로그램 같은 긴장감이 느껴졌다.
1라운드 주제는 ‘60대 이상의 노년층을 위한 자동차’, 2라운드 주제는 ‘자율주행시대에서 운전자를 위한 미래 자동차’가 주어졌다. 결승인 3라운드에서는 ‘2030년 서울에서 탈 수 있는 개인형 모빌리티’라는 주제가 나왔다. 꽤 무겁고 전문적인 주제였지만 학생들은 스타 디자이너들에게 자신의 기량을 직접 평가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난 것 같았다. 결과물의 수준도 매우 높았다.
1라운드를 통과한 작품 중 하나를 살펴보면, 미래에는 농촌 지역에 노년층이 많이 거주하게 된다는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 지역에서 노년층이 재밌게 탈 수 있는 오프로드 자동차가 등장했다. 현역 디자이너에게도 꽤 어려운 주제였던 3라운드에서는 게임 속 테트리스 개념을 서울 도심에 접목한 임도균 학생의 Volvo OFFICE, Future Module Concept가 대상에 선정됐다.
대상 작품. 게임 속 테트리스 개념을 접목해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 콘셉트는 서울 도심의 빌딩을 테트리스 블록으로 생각해, 블록(빌딩)의 빈 자리를 블록 모듈 형태의 자동차가 채운다는 개념이다. 콘셉트카의 디자인은 사선 형태의 윈도를 써서 박스형 차체의 식상함을 없애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임도균 학생의 작품은 미래 서울 도심의 복잡함과 주차 문제를 테트리스라는 게임의 개념으로 해결하는 동시에 재미까지 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홍익대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 중인 임도균 학생의 작품이 대상을 받았다
최종심사를 진행한 이상엽 디자이너는 “아이디어도 훌륭하지만, 구성을 잘 짜서 디자인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한 점이 인상 깊었다. 디자인이 정해진 틀이나 특정 구도에 얽매이지 않은 것도 훌륭하다”고 평했다. 그랑프리 전체에 대한 총평으로는 “수준 높은 작품을 봐서 설레었다. 짧은 시간에 아이디어를 뽑고 스케치와 렌더링까지 한다는 것이 힘든 일이라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즐길 줄 알아야 훌륭한 디자이너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학생들의 디자인 스케치 실력은 KADA 멤버들이 놀랄 정도로 훌륭했다
스마트 모빌리티 디자인 워크숍에 참가한 학생들은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 같았다며, 워크숍을 통해 기분 좋은 자극을 받았다고 말했다. 또한 글로벌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명 디자이너를 직접 만날 수 있어서 정말 좋았고, 워크숍을 통해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좀더 분명해졌다고 소감을 밝혔다.
1박 2일의 워크숍은 단순히 자동차 디자인 관련 세미나를 열고, 학생들의 디자인 실력을 확인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자동차’와 ‘디자인’, 이 두가지에 흠뻑 빠져 사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디자이너와 학생으로 서로의 위치는 다르지만 자동차 디자인이라는 공통된 관심사로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이 열정을 아주 오랫동안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탑기어> 한국판을 발행하는 천재교육 산하 프린피아는 이번 행사를 공식 후원했다. 본지 필자로 활약 중인 리차드 정을 비롯한 KADA 회원들의 열의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재규어코리아와 LG, 네이버 등도 힘을 보탰다. 내년에도 성공적인 행사가 이어지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