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보르기니에게 2016년은 매우 의미 있는 해였다. 설립자인 페루치오 람보르기니 탄생 100주년이 되고, 람보르기니의 기념비적인 모델 미우라 출시 50주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농기계나 만들던 사람이 무슨 수퍼카냐”라는 엔초의 비아냥을 듣고 절치부심, 와신상담하며, ‘타도 페라리’를 위해 수퍼카를 만든 람보르기니. 엠블럼인 황소마저 날카로운 뿔을 한껏 치켜세우고, 울부짖는 말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이니 두 수퍼카 브랜드는 숙명적인 라이벌일 수밖에 없다.
센테나리오가 아시아 최초로 공개됐다
람보르기니는 창업자 탄생 100주년 파티도 할 겸, 미우라 출시 50주년도 기념할 겸, 창업자에게 헌정하는 센테나리오도 구경시켜줄 겸해서 지난해 9월 일본 도쿄 근교에서 람보르기니 데이를 열었다.
이 행사는 일본 내 람보르기니 클래식카들이 한자리에 모여 ‘내가 더 람보 덕후다’를 겨루는 콩쿠르 델레강스와 람보르기니의 최신 카본파이버 기술 세미나, 람보르기니 퍼레이드 등으로 구성됐다.
하룻동안 이것저것 꼼꼼하게도 챙겨놓았다, 놀 생각 말고 취재 많이 하라는 뜻인가 보다. 여기에 이튿날 후지 서킷에서 ‘블랑팡 수페르 트로페오’도 열린다. 이 경기는 우라칸 베이스의 경주차들이 참가하는 원메이크 레이스다.
LAMBORGHINI CFRP TECHNOLOGY
탄소섬유는 수퍼카의 단골소재다. 탄소는 같은 부피의 철에 비해 4배나 가볍고, 인장강도는 10배 높다. 때문에 경량화가 중시되는 수퍼카뿐만 아니라 항공기, 자전거, 운동용품 등 다양한 분야에 사용되고 있다. 요즘엔 탄소섬유 가공기술이 발달해 대중차에도 사용이 늘고 있다.
람보르기니는 탄소섬유 사용에 적극적인 브랜드 중 하나다. 골프 브랜드 캘러웨이와 기술제휴를 통해 포지드 컴포지트라는 탄소섬유 기술도 보유하고 있다. 이번 람보르기니 데이에서도 탄소섬유 기술 세미나가 커다란 비중을 차지했다.
람보르기니는 경량화를 위해 가볍고 강도 높은 3세대 CFRP 기술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수퍼카에 탄소섬유가 많이 사용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왜? 라는 물음을 던지면 경량화라는 답변밖에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람보르기니는 기술 발전으로 수퍼카들의 성능이 평준화됐다고 판단하고, 다른 분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바로 경량화와 보디의 강성이다.
같은 출력이라면 차체가 가벼운 쪽이 높은 성능을 낼 수 있다. 또한 최근의 화두인 연소효율이나 배출가스도 가벼운 차가 유리하다. 하지만 차무게를 줄인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다.
극한의 성능을 끌어내는 수퍼카는 차체에 가해지는 스트레스가 상당하다. 빠른 가감속과 코너링 등을 버텨야 하는 만큼 차체가 탄탄해야 한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소재가 바로 탄소섬유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탄소섬유에 에폭시나 플라스틱 수지를 혼합해서 만든 탄소섬유 강화 플라스틱(Carbon Fiber Reiforced Plastic, CFRP) 차체를 쓰는 것이다.
CFRP의 가공방법도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초기에는 탄소섬유 위에 에폭시나 플라스틱 수지를 바르거나 뿌린 다음 열성형을 했다. 당연히 시간도 오래 걸리고 생산단가도 높았다. 다음 단계로 탄소섬유를 엮은 직조물에 접착성분을 입혀 원하는 형태나 두께로 층층이 쌓는 프리 프레그(pre-preg) 방식이 등장했다. 초기보다 제조시간도 줄고 단가도 내려갔지만 여전히 CFRP는 비싼 소재다. 현재는 원하는 형태의 몰딩을 만든 다음 탄소섬유를 쌓아 눌러서 만드는 RTM(Resin transfer molding) 방식이 사용된다.
우라칸에 사용된 포지드 컴포지트 CFRP
람보르기니는 CFRP를 1983년부터 사용해왔다. 경쟁업체에 비해 무척 빠른 편이다. 1983년 카운타크 프로토타입 모노코크 프레임에 프리 프레그 방식의 CFRP를 사용했다. 이후 1990년 디아블로, 2001년 무르시엘라고 등으로 CFRP 사용을 늘렸다. 2005년 출시된 가야르도 스파이더는 RTM 방식을 이용해 보디를 제작한 최초의 람보르기니다.
2010년 발표한 콘셉트카 세스토 엘레멘토의 보디는 포지드 컴포지트(Forged composite) 공법으로 만든 첨단 CFRP로 제작했다. 포지드 컴포지트는 실 형태가 아닌 덩어리 형태의 탄소섬유 칩을 사용한다. 틀에 탄소섬유 칩과 접착물질을 넣고 고온, 고압으로 압축해 CFRP를 만든다. 포지드 컴포지트 방식은 대량생산에 적합하고, 어떤 형태로든 성형이 가능하다. 또한 가공하면 표면이 군용 카무플라주 형태를 띠어 심미적인 장점이 있다.
LAMBORGHINI BLANPAN SUPER TROPEO
람보르기니 데이 다음날, 취재단은 후지 서킷으로 이동했다. 블랑팡 수페르 트로페오를 보기 위해서다. 이 경기는 우라칸 베이스의 경주차들이 참가하는 원메이크 레이스다. 2009년 유럽에서 처음 열린 이후 모든 대륙에서 펼쳐지고 있다.
오랜만에 서킷을 방문하니 타이어 냄새와 기름 냄새가 상큼하게 느껴졌다. 일정상 예선전만 구경했는데, 결승전 못지않게 치열했다. 경기는 람보르기니 데이 마지막을 장식한 람보르기니 퍼레이드 참가자들의 서킷 주행으로 막을 열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원메이크 레이스가 후지 인터내셔널 서킷에서 열렸다
이번 수페르 트로페오는 준프로, 아마추어, 람보르기니 컵 3개 클래스가 동시에 열렸다. 준프로와 아마추어를 나누는 기준은 수페르 트로페오의 참가 경력이다. 여기서 충분한 경력을 쌓으면 프로 레이스인 GT3 클래스에 출전할 수 있다.
람보르기니는 레이싱 꿈나무를 육성하는 주니어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카트를 시작으로 포물러 주니어, GT3 주니어 프로그램을 통해 유능한 드라이버를 발굴해내고 있다. 이번 후지 대회의 우승자 역시 람보르기니 주니어 프로그램이 배출한 선수다.
LAMBORGHINI CONCOURS d’ELEGANCE
콩쿠르 델레강스는 클래식 자동차 경연대회다. 누가 더 진귀하고 오래된 차를 얼마나 정성들여 관리했는지 평가하는 대회로 미국 페블비치, 이탈리아 빌라데스테 콩쿠르가 제일 유명하다. 람보르기니는 이번 행사에 맞춰 일본에서 처음으로 콩쿠르 델레강스를 개최했다. 출품차는 36대로, 모두 컨디션이 훌륭했다.
행사기간 동안 비가 내렸는데, 차주들은 자신의 애마, 아니 애우(牛)가 젖지 않게 커버를 씌우거나 에어브러시로 연신 닦고 조이고 기름 치느라 바빴다. 본인들은 홀딱 젖어가면서 말이다.
누가 더 ‘람보 덕후’인가를 가려보자
클래식 자동차 문화가 발달해야만 이런 행사를 열 수 있다는 사실이 내심 부러웠다. 대회장을 천천히 둘러보는데 생전에 한번 볼까말까 한 모델이 널려 있었다. 진귀한 차가 많다 보니 가장 많이 출품된 미우라가 평범해 보일 지경이었다.
1. 350GT
람보르기니의 첫 양산모델이다. 프로토타입 350GTV를 기반으로 1963년 첫선을 보인 후 1964년부터 1966년까지 124대가 생산됐다. 람보르기니의 상징과도 같은 V12 엔진을 사용하고 배기량은 3.5L다. 5단 수동변속기를 사용해 최고출력 274마력, 0→100km/h 가속성능 6.8초를 자랑한다. 엔진과 차체를 알루미늄으로 만들었고, 구동방식은 FR이다.
2. 400GT
350GT의 후속으로 1966년 첫선을 보였다. 350GT의 V12 3.5L 엔진을 V12 4.0L로 늘여 최고출력이 324마력으로 높아졌다. 구동방식은 FR이다. 400GT는 본격적인 그랜드 투어러를 지향해 차체를 키우고 뒤쪽에 +2 개념의 시트를 달았다. 모두 247대가 생산됐다.
3. 카운타크
카운타크(이탈리아어 발음은 쿤타치지만, 국내에서는 영어식 이름인 카운타크가 쓰임) 역시 미우라만큼이나 람보르기니뿐만 아니라 다른 수퍼카 메이커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차다. 현재 람보르기니의 디자인 특징이 된 쐐기형 차체가 처음으로 사용됐다. ‘커팅 에지’라는 날카로운 디자인은 람보르기니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다. 1열을 앞쪽으로 최대한 밀어 뒤쪽에 엔진룸을 확보한 형태도 다른 스포츠카에 큰 영향을 끼쳤다.
디자인뿐만 아니라 현재의 명명법도 카운타크에서 시작됐다. 카운타크는 ‘카운타크 LP400’으로 불렸는데, LP는 Longitudinale Posteriore의 약자로, 엔진을 뒤쪽에 세로로 배치했다는 뜻이다. ‘모델명 LP 최고출력-구동바퀴’ 순서인 요즘의 모델명과 다른 점은 400이 최고출력이 아닌 4.0L 엔진을 뜻한다. 카운타크는 또한 도어가 위로 열리는 시저 도어 방식을 최초로 사용한 차다. 1974년부터 1990년까지 2,042대가 생산됐고, 엔진은 V12에 4.0L, 5.0L, 5.2L 3가지다.
4. 미우라
1966년 데뷔한 미우라는 람보르기니 플래그십의 출발점이자 아벤타도르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P400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P는 이탈리아어 Posteriore, 뒤를 뜻한다. 엔진을 뒤에 얹어 붙여진 이름이며, 최초의 도로용 미드십 스포츠카다. 1972년까지 764대가 판매됐다.
미우라는 람보르기니에서 의미가 큰 모델이고, 자동차 수집가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아 가격이 어마어마하다. 람보르기니 중에서도 가장 빠른 차에 붙이는 SV(Super Veloce) 배지도 미우라에 처음 사용됐다.
미우라라는 모델명은 페루치오가 직접 붙였는데, 싸움소를 돌보던 사육사의 이름이라고 한다. 미우라는 400GT와 동일한 V12 4.0L 엔진과 5단 수동변속기를 사용해 최고출력 350마력을 냈다(미우라 S는 370마력, 미우라 SV는 385마력).
5. LM002
이번 콩쿠르 델레강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람보르기니는 SUV LM002다. 300대만 생산된 이 SUV는(무려 픽업트럭이다. 뒤에 소를 싣고 다니면 되나?)는 군용을 목적으로 만들었으나 납품이 좌절되어 일부를 손봐 민수용으로 돌렸다. 1986년부터 1993년까지 판매됐다. 카운타크용 V12 5.2L 450마력 엔진을 사용했다. 2.7톤의 거구지만 고출력 엔진을 바탕으로 0→97km/h 가속을 8초대에 끝낸다. 내년에 본격적인 고성능 SUV 우루스가 나온다.
6. 디아블로
카운타크 뒤를 이어 1990년 출시된 람보르기니의 새로운 플래그십. 람보르기니 최초로 네바퀴굴림을 사용했고, 역시 최초로 최고속도 320km/h를 달성했다. 팝업식 전조등의 유무에 따라 1세대(1990-1999)와 2세대(1999-2001)로 나뉜다. 카운타크처럼 시저 도어를 달고 엔진은 V12 5.7L와 6.0L를 장착했다. 총생산대수는 2,884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