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모나 수준을 따지지 않고 말하면, 미국에는 자동차 박물관이 아주 많다. 그러니 라스베이거스에 자동차 박물관이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라스베이거스라고 했을 때 사람들이 한결같이 떠올릴 바로 그 모습을 지닌,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번화가에 자동차 박물관이 떡 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좀 의외이지 않은가? 호텔과 카지노가 있어야 할 장소에 말이다.
실은 그게 약간의 함정이다. 지금 소개하는 라스베이거스의 자동차 명소 - 오토 컬렉션을 지도 상의 위치만 보고 찾아나섰다간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단독건물이 아닌데다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이 자동차 ‘전시장’은 링크(LINQ)라는 호텔 카지노 안에 있다. 라스베이거스 중심가 건물들이 흔히 그렇듯이 1층에 자리한 카지노를 통과해 안쪽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까지 올라가야 비로소 입구를 만날 수 있다. 화려하고 요란스러운 바깥동네와 달리 이곳은 아주 조용하고 외진 느낌을 준다. 그리고 허름하다.
이런 곳에서 존 웨인을 만날 줄이야
입장료를 내고 전시실로 들어서면 비로소 대로 반대편에 있는 가건물 형태의 주차장 안쪽 공간임을 눈치챌 수 있다. 수십대의 차가 늘어선 1만㎡ 면적의 전시실은 크게 3구역으로 나뉘는데, 그중 한곳은 바닥이 내리막이다. 아래층 주차장과 연결된 통로였던 모양이다. 천장에는 골조가 훤히 드러나 있고 기둥들을 지지하는 와이어 로프들이 시선을 가리기도 한다.
그러면 어떤가. 침침한 조명 아래 자체 발광을 하는 다양한 차들에 눈이 돌아가고 나면 이런 것들은 전혀 신경쓰지 않게 된다. 소개 자료에는 ‘세계 최대 클래식카 쇼룸’이라는 표현과 함께 전시차가 250여대라고 적혀 있지만 실제로는 100대 정도다. 1910년대부터 2000년대 차까지, 저렴한 차부터 집 팔아도 못 살 차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미국차의 비중이 높지만 다른 나라 차들도 많다.
1950년대 주유기는 330만원
차마다 간단한 설명이 붙어 있고, 일부는 오디오 해설까지 제공한다. 흥미로운 것은 가격이 적혀 있다는 점이다. 시판 당시의 가격이 아니라 돈을 지불하면 지금 당장 살 수 있는 가격이다. 앞에서 박물관이라고 했다가 전시장이라고 말을 바꾼 이유가 이것이다. 이곳은 클래식카 매매가 이루어지는 쇼룸인 것이다.
다만 차를 사지 않을 사람도 호객행위에 시달리지 않고 마음 편히 둘러볼 수 있도록 열려 있다. 관광객도 환영한다. 홈페이지에서 쿠폰을 출력해 가면 입장료도 받지 않는다. 그렇게 구경하다가 지름신이 내리면 상주하고 있는 직원에게 구매 상담을 하면 된다.
혹시 전시차들은 도박 빚 때문에 저당잡혔던 게 아닐까? 아무튼 이곳의 특색을 반영해 전시차 몇대를 가격과 함께 소개한다. 독자들이 읽을 때쯤엔 이미 팔린 차도 있겠지만.
1980 푸조 505 세단 : 1만9,500달러(2,164만원)
웬 푸조? 전시 차종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주행거리가 8,000km밖에 안된 상태 좋은 505다. 주행거리가 607km인 1968년형 푸조 204 세단과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값은 같다.
1915 미첼 라이트 식스 : 7만5,000달러(8,325만원)
전시차 중 가장 오래된 모델. 미첼은 위스콘신에서 모터사이클을 만들던 회사인데, 1903년부터 1923년까지 품질 좋은 차로 명성을 얻었다. 이 6인승 투어링은 현존하는 2대 중 1대. 1987년 미시간의 헛간에서 발견돼 복원됐다.
1986 뷰익 르사브르 그랜드 내셔널 : 3만3,000달러(3,108만원)
뷰익의 6세대 르세이버는 앞바퀴굴림 세단이다. 그랜드 내셔널 버전은 나스카 경주용차 인증을 위해 쿠페 보디로 117대 생산됐다. 뷰익 중 희귀한 차라고 할 수 있다. 주행거리도 2만7,000km에 불과하다.
1963 쉐보레 임팔라 SS 409 스포츠 쿠페 : 7만5,000달러(8,325만원)
매칭 넘버를 가진 진짜 409(6.7L V8) 엔진의 SS로, 바닥과 트렁크를 녹 없이 유지하고 있다. 복원을 통해 배선과 하체 구성품을 새것으로 싹 교체하고 전문업체에서 엔진을 다시 조립했다. 변속기는 먼시 수동 4단이다. 나사 하나하나까지 정성 들여 손본 차다.
영화속 허비는 뉴 비틀과 사랑에 빠진다
1963 폭스바겐 비틀 핌프 허비 : 9만9,999달러(1억1,100만원)
옛날 허비 말고, 2005년의 영화 <허비 - 첫시동을 걸다>에 등장하는 여러가지 허비 중 하나다. 버려졌던 1963년형 비틀 ‘허비’를 매기 페이튼(린제이 로한)이 되살려 튜닝한 것이 이 핌프 허비이다. <분노의 질주> 속 일본차들이 부럽지 않은 파이버글라스 차체와 레이싱 시트, 빵빵한 오디오 시스템을 갖췄다. 이 핌프 허비는 촬영용으로 6대가 제작됐다. 함께 전시된 정크야드 허비에는 10만달러(1억1,110만원), 나스카 허비에는 15만달러(1억6,650만원)의 가격표가 붙어 있다. 같은 값이면 고물차보다는 핌프 버전을 살 것 같은데….
1967 쉐보레 콜벳 427/435 로드스터 : 19만9,000달러(2억2,089만원)
매칭 넘버의 차대와 435마력 427(7.0L V8) 엔진을 탑재해 가치가 높은 2세대 콜벳이다. 솜씨 좋게 복원됐고 주행거리는 6만km 미만이다. 검은색 소프트톱에, 탈착식 하드톱이 딸려 있다.
1971 올즈모빌 442 컨버터블 : 12만5,000달러(1억3,875만원)
작지만 실력 있는 복원업체가 2년간 13만달러를 들여 신차상태로 돌려놨다. 455(V8 7.5L) 엔진이 팔팔한 힘을 낸다고. 그럼에도 값이 복원비에 미달하니 이를 어쩌나.
1923 아렌스 폭스 소방차 : 15만달러(1억6,650만원)
아렌스 폭스는 존 아렌스와 찰스 폭스가 1910년 오하이오에서 설립한 소방차회사다. 전시차는 오리지널 그대로일 뿐 아니라 상태가 워낙 좋아서 당장이라도 불을 끄러 달려나갈 수 있을 것 같다.
1928 메르세데스-벤츠 SSK : 13만5,000달러(1억4,985만원)
이것은 레플리카 즉 똑같은 모양으로 만든 가짜다. 이 복제차는 1977년 진짜 SSK 복원모델을 갖고 있던 일본 의류업체 사장의 주문으로 영국 업체가 제작했다. 전직 F1 디자이너가 개발에 참여했고, 일일이 손으로 만든 프레임과 보디에 BMC, 재규어의 부품과 벤츠 280의 엔진, 변속기를 얹었다. 참고로, 4대쯤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진 오리지널 SSK가 매물로 나온다면 값은 1,000만달러(111억원)가 넘을 것이라고 한다. 이 정도면 레플리카도 매력적이지 않나?
1933 패커드 1001 쿠페 로드스터 : 29만5,000달러(3억2,745만원)
1950년대에 없어진 미국 브랜드 패커드의 차다. 다운 드래프트 카뷰레터의 8기통 엔진과 풀 싱크로 변속기를 사용하고 매력적인 장비들을 갖췄다. 이 스타일은 1년 동안 만들어졌다. 솜씨 좋게 복원되어 다수의 수상 경력을 자랑한다.
1983 란치아 037 : 35만달러(3억8,850만원)
란치아가 아바스, 피닌파리나와 함께 만들어 1982년 토리노 모터쇼에 출품한 037은 그룹B 랠리카 인증을 위해 200대 제작됐다. 전시차는 1983년 독일인이 신차로 구매한 것이고 1990년 미국으로 넘어갔다.
커버를 모두 벗기면 눈알 괴물이 된다
1986 포드 RS200 에볼루션 : 60만달러(6억6,600만원)
아담하고 귀여운 외관과 달리 너무 빠르고 위험해서 폐지된 1980년대 그룹B 랠리의 전설인 차다. 오토 컬렉션에 전시된 다른 두대의 RS200이 32만5,000달러(3억6,075만원)인 것에 비해 2배나 비싼 가격표가 붙어 있다. 24대 생산된 에볼루션 중 1대이고, 거의 달리지 않아 출고 당시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2대는 도로용이다.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는 차는 야마하가 소유했었고 주행거리가 1,700km이다. 다른 한대는 8,300km, 1인 오너차다.
1939 : 크라이슬러 로열 세단
토크쇼 진행자로 유명했던 자니 카슨(<투나잇 쇼>를 30년 이상 진행했다)이 소장했던 차다. 원래는 그의 아버지 차인데, 카슨은 이 차로 운전을 배웠고, 졸업 파티 데이트에도 이용했다. 그래서 훗날 출세한 뒤 추억이 깃든 이 차를 수소문해 사들인 다음 복원했다고 한다. 1994년 자니 카슨이 오토 컬렉션에 기증해 소장품으로 보존되고 있다.
1960 링컨 컨티넨탈 리무진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백악관 시절 개인용무에 사용했던 차다. 유리 격벽과 독립 공조장치, 무선전화, 파워 스티어링을 갖추었고, 차체는 방탄이다. 외관은 복원을 거쳤지만 실내는 오리지널 그대로라고.
2002 롤스로이스 팬텀 프로토타입
개발 막바지에 테스트용으로 사용했던 차다. 시판차와는 약간 차이가 있다(차체가 주저앉은 걸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1974 홍기 CA770
1세대 홍기는 1950년대~80년대 중국의 고위관료나 국빈 의전용으로 소량생산된 차다. CA770은 리무진 버전. 파는 차는 아니지만 100만달러(11억1,000만원)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