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에서 주인공이 한땀한땀 장인이 바느질한 트레이닝복이라고 자랑하거나 귀한 한정판 모델이라고 고급시계를 흔들어 보이는 모습을 가끔 볼 수 있다. 또한 패션의 도시 파리에서는 해마다 ‘오트 쿠튀르’(맞춤복) 패션쇼가 성황리에 열린다.
자신만의 개성을 표현하기 위해 큰돈을 쓰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사치품, 다른 말로 명품이라고 불리는 시장이 나날이 커지고 있다. 이는 자동차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단 한대뿐인 나만의 맞춤 자동차를 폼나게 몰아보는 것이 카마니아들의 공통된 소망 아닐까?
자동차 주문제작방식은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고급차와 수퍼카, 일부 프리미엄 브랜드 기함급 모델에 적용하는 비스포크(bespoke) 방식과 제조사에서 제공하는 자동차 옵션 중에서 필요한 모든 기능을 고를 수 있는 일명 팩토리 오더 방식이 그것이다.
비스포크는 최고급 모델을 사는 고객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옵션 리스트에 없는 보디컬러를 주문한다든지 적재함에 고급 피크닉세트를, 2열시트 가운데 샴페인용 냉장고를 짜넣는 것 등이 대표적인 예다. 브랜드에 따라 인디비주얼, 디지뇨 등 여러가지 명칭으로 부른다.
ROLLS-ROYCE
전세계 도로를 돌아다니는 롤스로이스 중 똑같은 차는 단 한대도 없을 것이다. 모두 고객의 취향에 맞춰 주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롤스로이스 비스포크의 한계는 구매자 상상력의 한계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롤스로이스는 4만4,000여가지 색상의 가죽과 2만여가지 목재로 꾸밀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자기 집 마당에 있는 나무를 이용해 대시보드를 짠다든지 사랑하는 사람의 눈동자 색상의 시트도 고를 수 있다. 무한대에 가까운 옵션이 존재하다 보니 길고 긴 리스트 앞에서 공황장애를 일으킬 수도 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패션 디자이너, 화가, 민속예술가들과 협업한 에디션도 준비돼 있다.
롤스로이스 구매자들은 대부분 비스포크 시스템을 이용하며, 차값의 4~5배가 넘는 돈을 비스포크에 쓰는 고객도 적지 않다고 한다.
롤스로이스는 지난해 9월말 인천광역시 영종도에 위치한 BMW 드라이빙 센터에 브랜드 스튜디오를 열었다. 이곳은 영국 굿우드 본사의 아틀리에를 제외하고 세계에서 단 한곳뿐인 롤스로이스 상시 스튜디오다. 이곳을 방문하면 비스포크 전문가가 나만의 롤스로이스를 꾸밀 수 있도록 도와준다.
BENTLEY
벤틀리는 뮬리너(Mulliner)라는 이름의 비스포크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뮬리너의 경우 다른 메이커에 비해 한정판 에디션이 많다. 긴 옵션 리스트를 들고 머리 아파하는 소비자는 한정판 에디션을 구입하거나, 이미 출시된 한정판 에디션에서 마음에 드는 요소만 추려담을 수 있다.
뮬리너에는 한국 에디션도 있다. 지금은 제네시스로 자리를 옮긴 벤틀리 선행디자이너 출신의 이상엽씨와 남성패션 잡지가 기획한 플라잉 스퍼 뮬리너 한국 에디션이 그것. 남성의 비즈니스 슈트를 떠올리는 검은색과 흰색 보디를 갖추고, 2대가 만들어졌다.
McLAREN
영국의 수퍼카 메이커 맥라렌은 MSO(McLaren Special Operations)를 운영하고 있다. 2011년 생긴 이 부서는 맥라렌차에 F1 경주차 같은 성능과 감성을 담아내는 것이 주요 임무다. 카본파이버를 사용해 맥라렌 수퍼 및 스포츠 시리즈를 꾸미는 MSO 디파인드, 내외장의 소재와 색상을 바꿀 수 있는 MSO 비스포크, 한정판 모델 MSO 리미티드로 구성된다.
LAMBORGHINI
람보르기니는 ‘AD 페르소남’(Personam)이라는 비스포크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이탈리아 볼로냐 본사에서 AD 페르소남 스튜디오를 운영 중인데 돈과 시간이 충분하다면 이탈리아로 날아가 직접 소재와 색상을 보면서 주문할 수도 있다. 현재 AD 페르소남을 이용할 수 있는 모델은 아벤타도르와 우라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람보르기니 서울 매장을 방문해 컴퓨터를 통해 주문제작을 할 수 있다. 준비된 리스트에 없는 경우 가죽이나 색상 샘플을 본사로 보내면 구매자의 요구에 맞게 만들어준다.
BMW
BMW의 비스포크 프로그램인 인디비주얼(Individual)은 거의 모든 차종에 적용할 수 있다. 기함급 모델에만 비스포크를 운영하는 경쟁업체와는 다른 BMW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BMW 인디비주얼은 BMW M에서 출발했다. BMW 고성능 모델을 대표하는 M이 일반모델을 고성능화하는 비스포크라면 인디비주얼은 일반형을 주문자의 요구에 맞게 제작하거나 6, 7시리즈 같은 모델을 고급스럽게 꾸미는 일을 한다. M과 인디비주얼의 인기로 1993년 두 부서는 모터스포츠에서 독립해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BMW 인디비주얼은 일부 럭셔리카와 스포츠카에 국한됐던 비스포크 시스템을 대중화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PORSCHE
포르쉐는 모든 차종을 비스포크 방식으로 생산한다고 볼 수 있다. 배기량과 출력을 정한 다음 변속기부터(국내에서는 PDK만 선택할 수 있다) 하나하나 골라 나만의 차를 짜맞춘다. 어떤 옵션을 넣느냐에 따라 값이 달라지기 때문에 기본 모델의 가격은 크게 의미가 없다고 말할 정도다.
포르쉐는 웹사이트를 이용한 자동차 조합체계가 잘 짜여져 있다. 국내 수입차업체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동차를 조합할 수 있는 시스템을 운영 중이다.
〈탑기어〉 독자들 중에도 웹사이트에 들어가 나만의 차를 만들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옵션 리스트에 일일이 가격이 적혀 있어 나만의 포르쉐를 가지려면 돈을 얼마나 모아야 할지 계획을 세우는데도 도움이 된다.
JAGUAR LAND ROVER
재규어랜드로버(이하 JLR)는 최근에 비스포크 전담부서 SVO(Special Vehicle Operations)를 만들었다. SVO는 고성능 모델 제작과 함께 럭셔리 비스포크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고성능 모델은 SVR(온로드), SVX(오프로드) 배지가 달리고, 럭셔리 비스포크 모델은 오토바이오그래피(Autobiography)로 출시된다.
국내에는 레인지로버 스포츠 SVR과 재규어 F-타입 SVR, 레인지로버 오토바이오그래피가 출시됐다. SVO는 특히 뛰어난 자동차 도색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영국의 SVO 옥스포드 로드 시설에서 진행되는 이 프리미엄 페인팅은 다양한 색과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한다. 현재 국내에서는 16가지 프리미엄 보디 컬러를 선택할 수 있다.
팩토리 오더는 국내 소비자들에겐 아직 낯설지만 선진국에서는 보편화되어 있다. 유럽산 자동차는 현지에서 모두 팩토리 오더 방식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제조사 웹사이트에 접속해 모델을 선택하면 ‘CONFIGURATE’나 ‘BUILD’ 버튼이 활성화된다. 이것을 클릭해 나만의 자동차를 완성해나가는 것이다.
나만의 C-클래스 카브리올레를 만들어보자. 국내에는 2.0L 가솔린 모델 한가지밖에 없다. 메르세데스-벤츠 UK 웹사이트에서 C-클래스 카브리올레 팩토리 오더 페이지에 들어가면 가솔린 모델은 기본형인 C 200 스포츠 카브리올레부터 AMG C 63 S 에디션1 카브리올레까지 8가지, 디젤은 C 220 d 스포츠 카브리올레부터 AMG 라인 4매틱까지 6가지 모델을 고를 수 있다.
AMG C 63 S를 선택했다. 변속기는 자동 7단. 기본가격은 7만1,420파운드(1억430만원)이다. 이제 본격적인 장바구니 채우기가 시작된다. 운전 편의장비의 경우 패키지로 묶어서 선택할 수도 있고, 필요한 기능만 넣을 수도 있다. 고성능 라인인 만큼 AMG 패키지는 기본으로 들어가 있다. 좀더 공격적인 외관을 위해 카본과 나이트 패키지를 선택했다. 보디와 소프트톱 색깔, 휠, 브레이크 캘리퍼, 실내 소재와 색상, 시트 모양, 인포테인먼트 시스템까지 취향껏 선택할 수 있다.
팩토리 오더의 좋은 점은 기본으로 장착되어 있는 장비 중에서 필요 없는 것은 뺄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AMG 모델에는 고가의 부메스터 사운드 시스템이 들어가 있는데, 차에서 음악을 잘 듣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를 생략해 가격을 낮추거나 그 돈을 다른 퍼포먼스 장비에 투자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기자의 AMG C 63 S는 8만3,650파운드(1억2,200만원). 기본형보다 2,000만원쯤 비싸다. 내가 꾸민 자동차는 파일로 저장하거나 인쇄할 수 있고, 주문내역은 온라인 코드로 기록된다. 따라서 바로 딜러숍에 가서 주문을 해도 된다(영국으로 날아가서 주문해야 한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왜 선택폭이 좁을까? 외국의 경우 소비자가 계약금을 내고 차를 주문하면 큰 문제가 없을 경우 대부분 차를 구입한다. 하지만 국내 고객들은 계약을 취소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수입차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주문제작 자동차의 인수를 거부한 예는 거의 없지만, 만약 소비자가 인수를 거부할 경우 계약금을 돌려주어야 하고, 그 차는 딜러에서 처리해야 한다. 이런 부담감 때문에 독특한 색상이나 특이한 장비를 처음부터 옵션 리스트에서 빼버린다고. 기간 문제도 있다. 주문제작 자동차는 일반형보다 3~5개월 더 걸린다. 수입차의 경우 일반형도 선적해 들어오는 시간이 꽤 걸리는데 팩토리 오더까지 진행하면 인수까지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또 특이한 보디 색상이나 휠캡을 선택할 경우 추가비용이 든다. 보디 색상을 바꾸려면 돈을 더 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소비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국내 메이커의 주문제작방식은 어떨까. 현대자동차 그랜저(IG)의 경우 엔진, 배기량에 맞춰 모델을 선택하면 모던, 프리미엄, 프리미엄 스페셜의 세부 트림이 나온다. 여기에 선택할 수 있는 장비는 헤드업 디스플레이(HUD)와 주행안전 관련장비, 프리미엄 사운드 정도인데, 패키지로 구성돼 있어 한꺼번에 구입해야 한다.
또 아랫급 트림에서는 일부 장비를 아예 달 수 없다. 2.4 가솔린 모델에 HUD를 장착하고 싶다면 120만원 정도 더 내고 프리미엄 트림을 선택해야 한다. 여기에 HUD 장착비용 100만원이 추가된다. TUIX 패키지라는 별도의 튜닝 패키지가 있지만 휠이나 보디키트 같은 외관 정도만 바꿀 수 있어 선택이 제한적이다.
프리미엄을 지향하는 제네시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제네시스의 상위 모델인 EQ900의 3.3T 모델은 럭셔리, 프리미엄 럭셔리, 프레스티지 등 3가지 트림이 있고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선루프와 VIP좌석 패키지뿐이다.
자동차 구매자의 요구는 점점 늘어날 것이고, 국내 메이커들의 판매방식도 차츰 외국처럼 바뀔 것이다. 원하는 장비만 골라 담아 소박한 나만의 차를 만드는 날이 언제쯤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