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는 자동차 박물관이 무척 많고, 규모와 수준도 천차만별이다. 피터슨 박물관과 지난번 소개한 오토 컬렉션만 비교해봐도 그렇다. 어느 쪽이 더 낫다는 얘기보다는 두곳의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고 해두자. 건물 분위기부터 넘사벽이 감지된다.
1994년 문을 연 이곳도 처음부터 화려했던 것은 아니다. 1962년 지어졌다가 버려진 쇼핑센터 건물을 써왔고, 내부도 촌스러웠다. 하지만 2014년 10월 임시로 문을 닫고 9,000만달러(1,026억원)를 들여 재단장해 2015년 12월 문을 열었다. 깨끗하고 현대적인 것이 당연하겠지만, 직접 보면 예상치 못했던 모습에 입이 벌어진다.
겉보기만 좋은게 아니라 접근성이 좋고, 주차장 등 부대시설도 잘 갖춰져 있다. 그리고 안에 들어서면 공기부터 쾌적하다. 방문객들은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여유롭게 전시차를 둘러볼 수 있다.
관람 시간은 10시~18시. 입장료는 성인 기준 15달러(1만7,100원)이며 볼트 투어는 20달러(2만2,800원)를 따로 내야 한다
LA의 자동차 역사를 통해 자동차가 미국의 생활과 문화에 끼친 영향을 탐구하고 대변한다는 것이 이 박물관의 모토다. 관람객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간 뒤 아래층으로 내려오면서 차들을 둘러보게 된다. 25개의 공간에 150대가량의 차가 전시되어 있으며, 3층은 자동차 발달사, 2층은 자동차 구조와 원리, 1층은 자동차 예술을 테마로 꾸며져 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지하에도 진귀한 모델들이 보관되어 있는데, 추가 입장료를 지불하면 도슨트의 안내를 받으며 관람할 수 있다. 볼트(Vault)라 불리는 이 공간은 촬영불가, 어린이 입장 불가 등 몇가지 조건이 붙는다.
8,800㎡에 달하는 전시면적은 LA 인근 자동차 박물관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이 박물관을 설립한 사람은 미국의 유명 자동차 전문지들을 발행하는 출판사의 창업주 로버트 E. 피터슨(2007년 작고)이다.
WHY WE LOVE THE AUTOMOBILE
3층은 주로 역사적인 자동차들이 전시되어 있다. 벤츠 페이턴트 모터카(1886년), 포드 모델 T(1915년)처럼 으레 떠올릴 차들은 물론이고,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거나 유행을 이끌었던 선구적 차들을 감상할 수 있다.
스미스 러너바웃
스미스 러너바웃(1900년)은 LA 출신의 스미스 형제가 만든 실험작이다. 자체설계한 2기통 공랭 엔진을 탑재하고 고장나거나 진흙에 빠졌을 경우를 대비해 말을 매는 자리도 만들어놨다.
인터내셔널 스카우트 80
인터내셔널 스카우트 80(1961년)은 농업용 트럭과 픽업을 만들던 인터내셔널 하베스터가 지프 CJ 경쟁모델로 내놓은 차다. 픽업 형태지만 지붕을 열고 유리창을 접어 오픈카로 바꿀 수 있는 등 다양한 용도로 쓸 수 있어 인기가 높았다. 현대적 SUV의 효시라 할 만하다.
치시탈리아 202 쿠페
치시탈리아 202 쿠페(1947년)는 스타일의 선구자로 소개된다. 피아트 기계부품을 덮은 피닌파리나의 디자인은 자동차에 대한 미적 기준을 끌어올렸다.
GM EV1
GM EV1(1996년)은 대형 메이커가 만든 첫번째 양산 전기자동차다. 1,117대가 제작되어 리스로 공급됐다.
데이비스 디반
데이비스 디반(1948년)은 항공기에서 영향을 받은 외관과 감춰진 헤드라이트, 알루미늄 구조 등 혁신을 추구했던 세바퀴 컨버터블이다. LA의 공항 격납고에서 16대가 만들어졌고, 지프 버전도 있었다.
AUTOMOBILES IN THE MOVIES
다양한 영화, 드라마 속 자동차를 만날 수 있다. <007 어나더데이>에서 릭윤이 탔던 녹색 재규어 XKR은 촬영용으로 제작된 8대 중 한대로, 프론트 그릴의 미사일과 운전석 뒤 개틀링 건이 당장이라도 발사될 기세다.
가장 최근작에 등장한 차는 <분노의 질주: 더 세븐>의 닷지 차저 R/T. C-130 수송기에서 투하되는 그 차다. 스턴트를 소화하기 위해 오프로드 트럭 섀시에 1970년식 차저의 차체를 결합했다. 팀버튼 작 <배트맨>의 배트모빌, <백 투 더 퓨쳐>의 타임머신 드로리언처럼 유명한 차도 있고 <매그넘 P.I>의 페라리 308, <브레이킹 배드>의 폰티액 아즈텍, <미스 리틀 선샤인>의 노란색 폭스바겐 트랜스포터처럼 아는 사람만 알 법한 차들도 있다.
듀센버그Ⅱ
2013년작 <위대한 개츠비>에서 디카프리오가 운전했던 노란색 차는 1930년대의 듀센버그 SJ를 되살린 복제차 듀센버그Ⅱ다. 최신 포드 V8 엔진과 변속기를 탑재해 촬영이 수월했다고 한다.
포드 GT
HIGH PERFORMANCE ROAD CARS
GT40 MkⅡ는 1966년 르망 24시간에서 포드에 첫우승을 안겨줬고, 승리는 67, 68년에도 이어졌다. 신형 GT와 함께 전시된 차는 도로용으로 출시된 1967년형 GT40 MkⅢ이다. 2005년 GT40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포드 GT가 출시된데 이어, 2017년형으로 새로운 GT가 출시된다. 이 차를 바탕으로 만든 경주차가 올해 르망 24시간에서 클래스 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MADE IN ITALY - Design to Line
현대적인 자동차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콘셉트부터 완성차까지 단계별로 보여준다. 마세라티와 협력해 콰트로포르테 S Q4를 모델로 사용했다. 원재료, 차체, 구동계, 내장, 마감, 최종제품 순으로 이어지는 전시물은 전통적인 수작업과 첨단기술의 만남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이고, 약간의 비장함마저 풍긴다. 관람객들은 ‘이탈리아 명차가 이래서 다르구나’ 새삼 감탄할 것이고, 자연스럽게 이 차를 드림카 목록에 올릴 것이다.
ART CENTER COLLEGE OF DESIGN
미국의 유명한 디자인 전문학교 아트센터(ACCD)의 오픈 스튜디오가 박물관 요지에 자리잡고 있다. 자동차 디자이너들의 작업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고, 더불어 방해할 수도 있다. 그들은 들락날락하는 각양각색 관람객들로부터 영감을 얻는 것 같다.
CARS MECHANICAL INSTITUTE
미래의 카디자이너 혹은 엔지니어들을 위한 곳이다. 디즈니/픽사와 협력해 어린이들이 만화 <카>의 캐릭터를 통해 자동차의 작동원리를 배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게임을 하거나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볼 수도 있다. 정작 어린이들은 근처에 있는 포르자 모터스포츠 게임 체험관의 요란스러움에 더 관심을 보일 듯하지만.
교실 앞에는 주인공인 라이트닝 맥퀸이 실물크기(?)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고 그 뒤에 1세대 닷지 바이퍼가 놓여 있다. 실물 스포츠카가 애니메이션 속 가상 자동차의 디자인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서로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전시된 1992년형 바이퍼는 시판차가 아니라 파일럿 생산된 93대 중 1대다. 다른 차들은 대부분 막바지 테스트 과정에서 사라졌고, 이 차는 크라이슬러가 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1세대 바이퍼는 1989년 콘셉트카로 처음 등장, 열띤 반응에 힘입어 양산 과정을 밟은 차다.
특별전시로 다양한 은색 차들을 모아놨다. 풀 HD 세상에 있다가 흑백TV 세상으로 넘어온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단색으로 빛나는 명차들의 조형미를 만끽할 수 있다.
스타우트 스캐럽
강관 프레임에 알루미늄 차체를 얹은 1936년형 스타우트 스캐럽(풍뎅이)은 이름처럼 우스꽝스러운 형태지만 당대 최고의 공력 디자인으로 꼽힌다. 더불어서 엔진을 운전석 뒤에 배치하고, 각 바퀴를 네 귀퉁이로 몰아 평편한 바닥과 넓은 실내공간을 확보하는 등 요즘의 미니밴과 견줄 만한 혁신적인 구성을 갖추었다. 1953년형 피아트 8V 수퍼소닉은 V8 2.0L 협각 알루미늄 엔진을 탑재한 피아트 8V에 코치빌더 기아의 차체를 얹은 소량생산 모델로, 이름처럼 제트기를 연상시키는 모습을 하고 있다.
메르세데스-벤츠 W196은 강관 스페이스 프레임에 연료분사식 직렬 8기통 엔진과 5단 변속기를 얹고 풍동에서 다듬은 유선형 보디를 씌웠다. 1954년과 55년, 후안 마누엘 판지오, 스털링 모스가 몰고 12차례 자동차경기에 출전해 9회 우승을 차지한 전설의 명차다. 그밖에 2세대 콜벳의 바탕이 된 스팅레이 콘셉트(1959년), 포르쉐 904 카레라 GTS(1964년), 맥라렌 F1(1995년) 등 다양한 차를 은색으로 만날 수 있다.
경주용차는 다른 전시공간에도 있지만 이 전시실에 집중돼 있다. 레이싱 드라이버이자 엔지니어인 찰스 니어버그가 수집한 차들로, 1920년대 밀러 아마코스트 스페셜부터 1996년의 브리튼 V1000까지 각종 경주차를 통해 모터스포츠 역사와 기술혁신을 보여준다. 하울린은 니어버그가 이끄는 경주팀의 이름이고, 전시차들은 팀원들과 함께 지금도 트랙을 달린다.
밀러 주니어 에이트
1925년의 밀러 주니어 ‘에이트’는 이름처럼 직렬 8기통 2.0L 엔진을 얹고 그해 인디애나폴리스 500에 출전한 대회 최초의 앞바퀴굴림차다.
란치아 D24R은 1953년 판지오가 카레라 파나메리카나에 출전해 우승을 차지한 모델이다. 시대를 앞선 강관 스페이스 프레임에 독립 서스펜션과 트랜스액슬, 인보드 4휠 드럼 브레이크를 적용했다.
셰브론 B36은 1978년 르망 24시간에서 종합 11위와 클래스 우승을 차지했다. 원래 엔진은 2.0L지만 전시차는 1983년에 M-12 BMW 포뮬러2 엔진으로 바꿔 얹었다.
TWO-WHEELED TRANSPORTATION
모터사이클, 스쿠터 등 두바퀴 탈것들도 비중 있게 다뤄진다. 2층에 전용공간이 있지만 층마다 테마에 맞는 이륜차들이 약방의 감초처럼 섞여 있다. 가령 1층 매표소 앞에는 닷지 토마호크(2003년)가 있다. 닷지 바이퍼의 V10 500마력 엔진을 탑재한 ‘엔진 달린 미사일’이다. 모터쇼를 위한 콘셉트 모델이지만 반응이 좋아 9대가 제작됐고, 55만5,000달러(약 6억5,000만원)에 판매되었다.
1912년의 X8A 등 오래된 할리 데이비슨들도 눈길을 끈다. 3층에선 세계 최초의 4기통 모터사이클인 1904/05 FN을 만날 수 있다. 2층엔 2, 4, 6, 8기통 모터사이클을 한자리에 모아두기도 했다. 자동차처럼 보이는 사이드카를 부착한 노턴 모델 77(1957년)을 할리 모델 J 사이드카(1917년)나 야마하 배트사이클(1966년 <배트맨> TV시리즈에 등장한 모델)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1층 매표소 옆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 입장 후에는 제대로 관람할 수 있는 - 이 공간은 엄숙한 분위기를 풍긴다. 움직이는 조각품이라 부를 만한 명차들을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감상할 수 있어 좋지만 전시차들의 가격을 알면 주눅들지 모른다. 어떤 이들은 이곳만 보고도 본전 뽑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부가티 타입 57SC 아틀란틱 쿠페
1936년형 부가티 타입 57SC 아틀란틱 쿠페의 경우 현존하는 3대 중 1대. 4,000만달러(456억원)의 가치가 있다고 한다. 엄마야;;
들라이예 타입 165
들라이예 타입 165는 1939년 프랑스를 대표해 뉴욕 월드페어에 출품됐던 차다. 4개의 바퀴를 덮은 물방울 형태의 차체가 얼마나 미래적으로 보였을지 눈에 선하다.
탈보 라고 타입 26-GS(1948년)는 포뮬러원 경주차의 섀시와 엔진을 쓰고, 그에 걸맞는 차체를 얹었다.
브와쟁 타입 C25 에어로다인
브와쟁 타입 C25 에어로다인은 1934년 파리 오토살롱에서 데뷔한 ‘미래의 차’다.
롤스로이스 팬텀Ⅰ 윈드블로운 쿠페
뉴욕의 코치빌더 브루스터가 제작한 ⓔ 롤스로이스 팬텀Ⅰ 윈드블로운 쿠페(1930년)의 차체는 이름처럼 차 윗부분이 바람에 밀려난 듯한 독특한 형태를 지녔다.
THE ART OF THE AUTOMOBILE
자동차를 캔버스로 사용한 아트카들도 만날 수 있다. 아트카라고 하면 역시 BMW 아트카 시리즈가 제일 유명한데, 그중 몇대가 여기에 전시되어 있다. 1995년 데이비드 호크니가 그린 850 CSi, 1990년 가야마 마타조가 작업한 535i, 2009년 로빈 로드의 타이어 페인팅에 사용된 Z4 등이다. 예전에는 제프 쿤스의 M3 GT2도 있었다고 한다. 외부에는 미국 그래피티 아티스트 키스 해링이 작업한 1971년형 랜드로버 시리즈Ⅲ도 전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