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모터쇼에서 관람객과 자동차 마니아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자동차들이 있다. 수퍼카? 아니다. 비싸고 화려한 럭셔리 자동차도 아니다. 바로 모터쇼의 꽃이라 불리는 콘셉트카다. 콘셉트카가 큰 관심을 받는 이유는 현실에서 볼 수 없는 파격과 혁신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멋진 수퍼카도 콘셉트카 앞에선 명함을 내밀지 못한다.
콘셉트카의 목적은 미래의 디자인을 제안하거나 첨단기술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미래란 SF영화 속 같은 세상이 될 수도 있고, 몇달 후 혹은 1년 뒤일 수도 있다. 일부 콘셉트카의 디자인과 기술은 곧바로 양산차에 적용되기도 한다. 드물기는 하지만 콘셉트카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아 화제가 되기도 하고, 콘셉트카와의 연관성을 찾기 어려운 자동차도 있다. 지금부터 그 연관성을 추적해보도록 하자.
Audi Le Mans Quattro Concept(2003) & R8(2006) : 90%
르망 콰트로 콘셉트카는 아우디가 르망 24시간 내구레이스에서 2000년부터 3년 연속 우승한 것을 기념하여 제작한 콘셉트카다. 등장배경은 뒤로 하고 우선은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으로 커다란 관심을 끌었다. 직선이 거의 없는 매끄러운 보디, 흡기구와 한덩어리로 묶인 풀 LED 헤드램프, 풍만한 볼륨감, 간결한 인테리어 등 20~30년 뒤에 나올 법한 자동차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그 예측은 빗나갔다. 3년 뒤인 2006 파리 모터쇼에서 공개된 R8은 르망 콰트로 콘셉트카의 디자인을 거의 그대로 가져왔다. 겉모습만 보면 어느 쪽이 콘셉트카이고, 양산차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2015년 2세대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여전히 1세대를 들먹이며 비교하기 바빴다. 콘셉트카를 빼다박았던 1세대의 파격적인 모습이 그만큼 뇌리에 깊이 박혀 있다는 의미다.
BMW EfficientDynamics Concept(2009) & i8(2013) : 80%
2009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BMW가 스포츠 콘셉트카를 발표했을 때, 같은 모습으로 양산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피션트다이내믹스’라는 이름이 붙은 콘셉트카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F1 경주차 못지않은 공력적 디자인에 화려한 버터플라이 도어를 단 이 콘셉트카는 모터쇼의 최고 스타였다. 3기통 디젤 엔진에 2개의 전기모터를 단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구동계도 독특했다. 0→100km/h 가속 4.8초, 제한 최고속도 250km/h의 고성능을 자랑하면서도 연비 26.5km/L에, 이산화탄소 배출량 99g/km의 믿기 어려운 성능을 제시했다.
이 콘셉트카에 담긴 디자인과 기술은 약 4년 뒤 i8 스포츠카로 현실화됐다. 버터플라이 도어, 공기흐름을 매끄럽게 하는 기하학적인 구조, 낮고 넓은 차체까지 그대로 가져왔다. 엔진만 디젤에서 가솔린으로 바뀌었을 뿐 3기통 1.5L 터보 엔진에 2개의 전기모터를 단 하이브리드 시스템도 같다. 성능은 더 좋아져 0→100km/h 가속이 4.4초로 단축되고 연비 47.6km/L, 이산화탄소 배출량 49g/km라는 믿기 어려운 제원을 실현했다.
2011년 영화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에서 i8 콘셉트카가 인도 뭄바이 도심을 달릴 때 굉장히 이질적으로 느껴졌는데, 5년이 지난 지금도 도로에서 i8을 보면 여전히 콘셉트카 같고 낯설다.
BMW Z9 Gran Turismo Concept(1999) & E65 7 Series(2001) : 60%
크리스 뱅글이 BMW의 디자인을 완전히 바꿨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시작이 Z9 그란투리스모 콘셉트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키드니 그릴과 호프마이스터 킥 C필러 디자인을 빼면 BMW라는 사실을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기존 디자인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실내도 마찬가지다. 센터페시아의 버튼을 모조리 없애는 파격을 감행했다. 대신 대시보드 상단에 8.8인치 와이드 모니터를 배치하고 센터콘솔 중앙에 이상한 콘트롤러를 달았다. 너무나 앞선 모습이어서 콘셉트카에서 그칠 줄 알았다.
하지만 2년 뒤에 나온 4세대 7시리즈(E65)에는 Z9의 디자인이 일부 적용됐다. 보디 패널과 범퍼의 구분을 최소화하고, 새로운 헤드램프를 단 앞모습, 테일램프를 리어 펜더의 일부분처럼 보이도록 한 뒷모습 등이 콘셉트카를 닮았다.
실내는 한마디로 충격적이었다. Z9처럼 커다란 모니터와 컨트롤러가 떡하니 자리잡은 것. i드라이브라는 이름의 새로운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은 BMW 팬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지만, 10여년이 흐른 지금은 거의 모든 프리미엄급 자동차들이 비슷한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 논란이 많았던 4세대 7시리즈는 이처럼 시대를 앞선 자동차였다.
Cadillac Evoq Concept(1999) & CTS(2003) : 40%
20년 전만 하더라도 캐딜락은 나이 든 사람이 타는 차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무겁고 근엄하게 생긴 디자인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1999년 이보크 콘셉트카가 나온 이후 오래된 차라는 이미지가 바뀌기 시작했다.
요즘 캐딜락에 사용하는 수직형 헤드램프와 커다란 프론트 그릴, 각을 살린 보디 라인 등 ‘아트 & 사이언스’ 디자인 테마는 이보크 콘셉트카에서 시작된 것이다. 지금 봐도 파격적인데, 1999년에는 오죽했을까? 사람들이 놀라워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파격적인 디자인의 첫 수혜자는 CTS였다. 램프 2개를 수직으로 겹쳐놓은 헤드램프와 손이 베일듯한 에지 등 이보크의 디자인 특징을 상당부문 받아들였다. 하지만 부품의 간극이 치밀하지 못하고 직선을 과도하게 사용한 탓에 완성도가 높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캐딜락의 아트 & 사이언스 디자인이 진화를 거듭해 이제는 꽤 세련되었다는 점이다.
Citroen C-SportLounge Concept(2005) & DS 5(2011) : 90%
C-스포트라운지 콘셉트카는 럭셔리 그랜드 투어러에 대한 제안으로,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넘쳤다. 이 콘셉트카의 특징은 헤드램프에서 시작된 크롬 라인이 A필러까지 이어진 점. 그리고 벨트라인이 C필러 부근에서 한번 꺾이는 디자인이다. 나머지 부분은 양산을 염두에 두고 디자인한 것처럼 무난하고 평범했다.
그래서인지 정말로 콘셉트카의 모습대로 양산됐는데, 무려 6년이 걸렸다. 앞에 적은 특징이 거의 그대로 적용됐고, 일부분은 콘셉트카보다 더 스포티하고 멋졌다. 그 주인공은 시트로엥이 프리미엄 브랜드로 독립시킨 DS의 기함 DS 5다. 6년 뒤에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걸 보면 콘셉트카의 디자인이 꽤 훌륭했던 것 같다.
Infiniti Essence Concept(2009) & Q50(2014) : 40%
2009년 공개된 에센스 콘셉트카는 롱노즈 숏데크의 전형적인 쿠페 스타일로, 기존의 인피니티가 갖지 못했던 힘과 역동성을 품고 있었다. 프론트 그릴을 모래시계 형태로 만들고 보닛부터 펜더, 도어, 트렁크 리드까지 근육질이 적용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아주 화려하진 않지만 미래의 인피니티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5년여가 흐른 후, 에센스의 디자인을 차용한 양산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인피니티의 간판모델 Q50이 그것이다. 프론트 그릴과 독특하게 꺾인 C필러, 보닛과 도어에 적용된 근육질 라인 등을 에센스 콘셉트카에서 갖고 왔다. 프론트 펜더를 깊이 파고든 헤드램프는 평범한 디자인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Q50의 외관은 힘 있고 강해 보이는 스포츠 세단의 분위기를 잘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인테리어는 전모델인 G시리즈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어 아쉽다.
Lexus LFC Concept(2004) & IS(2005)
렉서스의 디자인 테마는 ‘L-피네스’로, 날카로운 직선으로 역동성과 고급스러움을 표현하는 게 핵심이다. 이 디자인 주제는 2004년 공개된 LFC 콘셉트카에 처음 적용됐다. LFC 콘셉트카는 고급스러움에 집착해 보수적이고 둔해 보이기까지 했던 렉서스에 대한 이미지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날카로운 선으로 역동성을 강조하고, 간결한 면으로 고급스러움을 내세웠다.
새 디자인은 2005년 출시된 2세대 IS에 처음 적용됐다. 치켜올라간 헤드램프와 삼각형의 흡기구 겸 헤드램프, 역사라리꼴 프론트 그릴 등을 콘셉트카에서 가져왔다. 장식을 배제하고 캐릭터 라인 하나로 마무리한 측면도 마찬가지. 전체적으로 기존의 렉서스와 전혀 다른 긴장감 넘치는 모습을 자랑했다.
Renault DeZir Concept(2010) & Talisman(2015) : 40%
2010년 나온 드지르 콘셉트카는 미드십 스포츠카에 르노가 추구하는 여러가지 변화를 담았다. 가장 큰 특징은 프론트 그릴을 부각시킨 것. 중앙에 박은 커다란 르노 엠블럼을 중심으로 그릴과 헤드램프를 길게 연결한 디자인을 선보였다. 이 디자인은 2011년, 캡처와 프렌지 콘셉트카로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2015년 탈리스만과 에스파스가 나왔다. SM6를 통해서 잘 알고 있겠지만, 르노의 새로운 디자인 효과는 엄청났다. 드지르의 디자인을 양산차에 잘 적용한 덕분에 평범한 중형세단이 스포츠 세단처럼 보이는 효과를 낳았다.
탈리스만은 프론트 그릴의 면적을 더 늘이고, 흡기구 자리에 ㄷ자 모양의 LED 주간주행등을 달아 차체가 낮고 넓어 보이는 효과를 살렸다. 이 디자인은 에스파스, 메간, 콜레오스 등 다양한 모델에 적용됐다. 이젠 르노가 디자인을 너무 자주 바꾸지 않기를 바란다.
Mazda Ryuga Concept(2007) & 3(2010) : 20%
10년 전까지만 해도 마쯔다를 보고 디자인이 멋지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신 로터리 엔진이나 경량 로드스터 MX-5가 마쯔다의 이미지를 대변했다. 하지만 2007년 발표한 3대의 콘셉트카로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류가(Ryuga)와 하카제(Hakaze), 타이키(Taiki)가 그것이다.
악마의 미소를 떠올리게 하는 커다란 프론트 그릴과 치켜올라간 헤드램프 디자인은 얼마 후 양산차에 적용됐다. 첫번째 대상은 C세그먼트에 속하는 2세대 마쯔다 3이었다. 1세대도 나름 날카로운 맛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너무 딱딱한 모습이었다.
2세대는 프론트 그릴을 범퍼로 내리고 면적도 크게 넓혔다. 헤드램프도 콘셉트카처럼 날카롭게 찢었다. 하지만 마쯔다는 이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2010년 시나리(Shinari) 콘셉트카를 통해 새로운 디자인을 선보였고, 현재 모든 라인업이 이 디자인을 사용하고 있다.
Volkswagen 1-Litre Concept(2003) & XL1(2013) : 20%
2002년 폭스바겐은 놀라운 자동차를 공개했다. 경유 1L로 100km를 달리는 자동차, 1리터 콘셉트카가 그것이다. 이 차는 실제로 경유 1L로 100km를 달릴 수 있었다. 폭스바겐의 발표에 따르면 실제 연비는 101km/L에 달했다. 공기저항계수(Cd) 0.159, 공차중량 795kg, 1기통 299cc 디젤 엔진 + 전기모터의 조합으로 이런 놀라운 결과를 얻어낸 것이다. 하지만 이 차는 가격이 맞지 않아 양산되지 못했다.
폭스바겐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2011년 드디어 양산차 XL1이 나왔고, 2013년 판매를 시작했다. 10년 전 등장한 1리터 콘셉트카와 많은 부분이 다르지만 공기저항을 최소화한 독특한 차체는 그대로 살렸다. 엔진은 2기통 800cc로 커졌고, 공기저항도 0.189Cd로 늘어났으나 100km/0.9L, 이산화탄소 배출량 21g/km라는 놀라운 연비는 변함이 없다.
Volvo Coupe Concept(2013) & S90(2016) : 90%
볼보의 이미지가 달라졌다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2000년대 중반 등장한 C30 해치백에서 시작되어 2010년 이후에 나온 S60, V40 등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볼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또 한번 변신을 감행해 2013년 쿠페 콘셉트를 발표했다.
콘셉트카의 이름이 쿠페라니, 성의 없어 보이지만 디자인은 전혀 그렇지 않다. 무겁고 나이 들어 보이는 모습을 버리고 활기차고 고급스러운 디자인을 담아냈다. 2010년 이후 유행하고 있는 심플하고 모던한 스칸디나비안 디자인도 적용했다.
쿠페 콘셉트카의 디자인은 2015년 등장한 2세대 XC90에 고스란히 담겼다. 커다란 볼보 엠블럼이 박힌 가로 형태의 그릴, T자 모양의 LED 주간주행등이 적용된 헤드램프 등에서 그 자취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SUV인 탓에 콘셉트카에서 보여준 보디 라인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
이 라인은 2016년 등장한 S90에서 확인할 수 있다. ㄷ자 형태의 테일램프와 시원하게 뻗은 면을 비롯해 C필러에 자리잡은 누운 사다리꼴 형태의 쿼터 글라스도 콘셉트카에서 가져왔다. 볼보의 변신은 현재 진행형이다.
Peugeot HX1 Concept(2011) & 308(2014) : 20%
한때 푸조는 ‘펠린룩’이라고 하여 고양이를 형상화한 디자인을 내세웠다.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눈을 치켜뜬 사나운 고양이의 모습 말이다. 디자인에 대한 호불호가 심하게 엇갈렸고, 푸조는 결국 디자인을 뜯어고치기로 했다.
그 결과 새로운 디자인을 제시하는 일련의 콘셉트카가 등장했는데, 2011년 나온 HX1이 가장 완성도 높은 모델이다. HX1은 프론트 그릴의 크기를 줄이고, 직선을 살린 헤드램프와 테일램프를 사용해 깔끔하고 모던한 이미지를 강조했다. 이전 모델들과 연결성은 약해졌지만 디자인은 훨씬 좋아졌다.
이 디자인은 3년 뒤 308에 고스란히 적용됐다. 헤드램프와 테일램프, 프론트 그릴 등이 HX1과 유사했다. 이전 세대와 비교해 눈에 띌 정도로 차체가 낮고 넓어진 것도 콘셉트카와 유사하다. ‘아이-콕핏 콘셉트’를 적용한 실내는 센터페시아를 운전자 쪽으로 틀고, 스티어링 휠의 지름을 줄이는 등 획기적인 변화를 주었다. 308 이후 푸조의 디자인은 안정감을 찾은 상태다. 앞으로 나올 신차에 대한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