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자연스럽게 떠올랐던 ‘이 맛에 할리 투어링을 타는구나!’라는 생각이 우리나라에서도 이어졌다. 빠른 달리기가 목적이라면 이런 분위기를 놓쳤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천천히 여유롭게 달리는 게 매력인 할리 투어링에는 이런 호사가 허락된다. 멋진 풍광을 뒤로 하고 칙칙한 광양산업단지를 거쳐 둘쨋날 목적지인 여수 엑스포광장으로 향했다. 오전의 코스가 환상적이었다면 오후는 정반대다. 여수로 들어가는 도로 중 넓고 깔끔하게 포장된 곳은 전부 자동차 전용도로인 탓에 좁고 구불거리는 옛길을 이용해야만 했다. 도대체 우리나라는 언제쯤 모터사이클이 자동차 전용도로를 달릴 수 있을까? 일부 몰상식한 라이더들을 생각하면 이는 불가능한 일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떳떳하게 세금도 내고 매너 좋게 달리는 라이더 입장에선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다음날 아침 여수항에서 제주도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제주항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2시. 3일차의 소중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투어팀은 곧장 애월항 해변도로로 향했다. 중국과의 외교 마찰 때문인지 제주도를 가득 메웠던 중국 관광객들을 찾아볼 수 없다. 누군가에겐 이 상황이 힘들테지만, 투어팀은 이런 한적함이 반갑기만 했다.요즘 제주도에서 가장 핫하다는 호텔의 인피니티 풀에서 뜨거운(?) 밤을 보낸 탓인지 이튿날 아침 숙취와 전날의 열기가 쉽게 가라앉지를 않았다. 심신을 애써 수습하고 한라산 1100 고지를 올라갔다. 평지를 달릴 땐 몰랐는데, 위로 갈수록 안개와 구름이 뒤섞이며 온 세상이 회색빛으로 바뀌어버렸다. 헬멧에 맺히는 물방울은 비로 인한 것인지 공기 중의 습기 때문인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꿈인지 현실인지도 모르겠고, 어디가 하늘이고 숲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할리 투어링의 놀라운 안정감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400kg에 육박하는 덩치 탓에 신호를 받아 잠깐이라도 정차하면 엄청난 무게에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달리기 시작하면 무게감은 감쪽같이 사라진다. 쭉 뻗은 도로를 달릴 때는 당연하고, 1100 고지를 오르는 굽은 코너에서도 이런 감각은 고스란히 유지됐다. 코너 탈출구로 시선을 유지한 채 몸을 안쪽으로 살짝 넘기면 거짓말처럼 쉽게 돌아나간다. 물론 코너링 속도가 빠르진 않다(빨리 달릴 수도 없다). 핸들 바로 전해지는 스티어링의 무게감은 할리보다 작고 가벼운 모터사이클에 비해 확실히 무겁고 둔하다. 하지만 모터사이클로 코너링을 할 때 핸들 바를 억지로 돌리는 라이더는 없다. 즉 할리 투어링의 무거운 스티어링은 코너링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가랑이 사이에 커다란 엔진을 끼고 뒤쪽엔 짐이 가득 실린 새들백이 달려있음에도 몸놀림이 가볍다. 자동차는 크고 무거우면 코너에서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지만, 할리 투어링은 그렇지가 않다. 여유 있게 쓱쓱 돌아나가다 보면 기존의 모터사이클과는 다른 색다른 코너링 재미를 발견할 수 있다.
1100 고지를 오르면서 미국에서도 경험했던 밀워키에이트 엔진의 놀라운 응답성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함께 달렸던 라이더들의 이야기를 빌리면 이전 세대 투어링은 스로틀을 감아도 두박자 정도 뜸을 들인 후 엔진이 반응했다고 한다. 반면 밀워키에이트는 응답성이 눈에 띄게 빨라져 스로틀을 감는 즉시 토크를 쏟아낸다. 구형 투어링을 떠올리며 스로틀을 감는 바람에 뒷바퀴가 슬립을 일으킬 정도라고 하니 밀워키에이트 엔진이 얼마나 빠르고 강해졌는지 알 수 있다. 이 같은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기존 엔진의 특성과도 같았던 트윈캠을 싱글캠으로 바꾸고, 4개의 흡배기 밸브를 8개로 늘린 덕분이다. 1100 고지를 내려오는 사려니숲길에서는 강력한 브레이크 성능에 감탄했다. 신기술을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는 할리데이비슨의 특성 때문에 브렘보 브레이크가 적용됐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많다. 캘리퍼에 브렘보를 상징하는 b 로고가 없으니 그럴만도 하다. 하지만 할리 투어링에는 브렘보가 쓰이고, 앞뒤 연동식 ABS가 적용됐다. 성산 일출봉으로 향하는 1112번과 1136번 도로를 달릴 땐 이국적인 풍경에 마음을 뺏겼다. 쭉 뻗은 도로 너머로 펼쳐진 제주도 특유의 얕은 구릉과 오름 덕분이다. 풍경은 이국적인데, 도로환경이 익숙해 마음껏 달릴 수 있었다. 이때다 싶어 밀워키에이트 엔진의 진짜 힘을 확인해봤다. 할리 투어링에 대한 경험이 풍부한 선배 라이더들에 의하면 밀워키에이트 엔진 이후부터 성격이 크게 바뀌었다고 한다. 과장이 보태졌겠지만, 저속에서만큼은 스포츠 모터사이클 부럽지 않는 가속력을 뽑아낸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가속력이 화끈하다. 회전수를 2,000~3,000rpm으로 유지하면 언제 어디서든 제주도의 푸른바다만큼 속시원한 가속력을 맛볼 수 있다. 15.3kg·m의 최대토크가 발휘되는 시점은 3,250rpm이지만 그전부터 최대토크에 근접하는 폭발력을 만들어낸다.
남태평양의 어느 해안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푸른 김녕 성세기 해변에서 저마다 ‘인생샷’을 찍은 후 제주항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저녁 7시쯤 출발해 부산항에 도착한 시간은 이튿날 오전 7시. 꼬박 12시간의 항해를 마친 다음 서울 못지않게 복잡한 부산의 러시아워를 뚫고 동해를 따라 올라가는 7번 해안도로로 향했다. 좁고 불편한 침상과 밤새 흔들거린 항해로 온몸이 뻐근했지만 할리 투어링의 승차감만큼은 완벽했다. 부산에서부터 포항까지 복잡한 시가지를 통과할 때는 잦은 정차 때문에 힘들었으나 이후 약 120km에 이르는 7번 국도를 거의 쉬지 않고 달릴 때는 엉덩이와 허리, 어깨 등 불편한 데가 하나도 없었다. 하늘을 두둥실 떠다니는 근두운이 실제한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그 정도로 할리 투어링은 장거리 고속투어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이런 편안함에는 할리가 드러내지 않은 또 다른 기술이 숨어 있다. 일단 밀워키에이트 엔진이 적용되면서 새롭게 바뀐 앞뒤 서스펜션의 영향이 크다. 직경 49mm인 앞서스펜션은 듀얼 벤딩 밸브를 적용하고 스티어링 댐퍼를 갖춰 노면의 크고 작은 요철을 잘 걸러낸다. 승차감의 일등공신은 피스톤 용량을 키우고 에멀전 완충기가 결합된 리어 서스펜션이다. 포트홀 정도의 큰 구덩이가 아닌 이상 자잘한 충격은 말끔히 흡수하고, 라이더가 운전에 집중할 수 있도록 물밑에서 열심히 할 일을 한다. 그렇게 할리 투어링에 몸과 마음을 맡긴 채 울진까지 내달렸다. 코너가 거의 없는 직선도로를 편하게 달리고 있자니 역시나 졸음이 쏟아졌다. 졸음을 쫓기 위해 밀워키에이트 엔진을 다그쳤다. 기어를 5단, 4단으로 내리고 회전수를 4,000rpm까지 올리며 할리 투어링에 어울리지 않는 짓을 했다. 밀워키에이트 엔진의 거대한 피스톤이 만들어내는 기분 좋은 고동감과 실린더 깊은 곳에서 터져나오는 배기음을 들으니 졸음이 어느 정도 가셨다. 그 사이 할리는 120~130km/h를 넘나드는 고속주행을 펼치고 있었다. 그런데 체감속도가 높지 않다. 페어링이 바람을 막아주고, 서스펜션은 노면충격을 흡수하니 속도감을 느낄 만한 요소가 사라진 것이다. 묵직한 차체에서 오는 고속 안정성도 이런 느낌을 더했다. 이따금씩 헬멧에 부딪히는 바람 소리와 배기음이 아니었다면 무모하게 속도를 높였을지 모른다.이런저런 감상에 빠져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투어의 마지막 밤을 보내게 될 울진 덕구온천에 접어들었다. 한적한 시골마을과 어울리지 않는 굵직한 말굽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배기시스템을 억지로 바꾸지 않아도 밀워키에이트 엔진의 신형 투어링은 듣기 좋은 소리를 만들어낸다. 다만 선을 넘기면 민폐를 끼치게 된다.마지막날 아침, 뜨거운 온천에서 5일간의 여독을 깨끗이 씻어낸 뒤 기분 좋게 마지막 투어를 준비했다. 그런데 또다시 비다. 이번 투어가 비로 시작해 비로 끝날 것 같은 예감은 몇시간 뒤 현실이 되고 말았다. 마지막 파이팅을 외치고 370km의 마지막 여정을 시작했다.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긴 했지만, 태백의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기엔 무리가 없었다. 문제는 태백산을 오를 때 시작됐다. 비가 눈으로 바뀌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로 온도가 급격히 낮아졌다. 출발할 때 트립컴퓨터 온도계는 8℃를 가리키고 있었는데, 어느새 2℃로 떨어져 있었다. 다행히 길은 얼지 않았지만 눈길을 주는 곳마다 설산이 펼쳐져 있다. 제주도를 포함해 한반도를 며칠만에 U자 형태로 돌다보니 시간과 공간개념이 희미해지고 있었는데, 3월말에 눈을 보고 있으니 현실을 파악하기가 더욱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