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돌고 돈다고 했던가. 얼마전에는 1980~90년대 시대상을 반영한 TV 드라마가 히트하면서 그 영향으로 과거에 유행하던 음악과 패션이 다시 주목받기도 했다.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특히 일본차들이 활발하게 과거로의 회귀를 꾀하고 있다.
한때 재미없는 차의 대명사였던 토요타가 열정을 지닌 브랜드로 바뀌고 있다. 사실 토요타는 1960년대에 2000GT라는 일본 최초의 슈퍼카를 만든 이력이 있다. 1988년 셀리카를 내세워 WRC에 진출, 8년 동안 뛰면서 일본 메이커로는 처음으로 매뉴팩처러 부문 종합우승을 차지했고, 2002~2009년에는 F1에서 활동했다. F1 출전과 맞물려 슈퍼카 렉서스 LF-A를 출시하기도 했다.
초창기부터 모터스포츠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혼다도 마찬가지다. 혼다는 일본 No.1 메이커 토요타보다 38년 빠른 1964년 F1에 출전했으며, 1990년 데뷔해 세계 최초로 100% 알루미늄 차체를 쓴 양산차로 기록된 NSX는 페라리와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일본차로 인정받았다. 혼다는 21세기 들어 수익성이 높은 RV쪽으로 방향을 돌렸다가 다시금 꿈을 강조하고 있다. 자사의 브랜드 철학을 계승한 경스포츠카 S660와 신형 NSX의 부활이 대표적인 예다.
▲ NSX는 V8 페라리를 넘어선다는 평가를 받았다
일본 브랜드뿐만이 아니다. 한동안 침체됐던 고성능차, 슈퍼카 시장의 열기는 최근 다시 뜨거워지고 있다. 셰일가스 발굴로 예상치 못했던 저유가 시대가 열린데다 글로벌 경기가 서서히 회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BMW, 메르세데스-벤츠 등 프리미엄 브랜드들이 너도나도 신형 스포츠카 개발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슈퍼카 시장에서는 후발주자인 맥라렌이 잇따라 신차를 쏟아냈고 기존 전통의 강호 페라리와 람보르기니는 역대 판매기록을 경신하며 몸집을 불리는 중이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현대차는 새로운 고성능 브랜드 N의 첫모델을 담금질하고 있다. 현대모터스포츠팀이 WRC에서 거둔 최근의 뛰어난 성적과 새차 홍보 영상을 보면 기대가 크다. 기아차는 멋진 디자인의 고성능 스포츠 세단 스팅어를 내놨다. 실력이 예사롭지 않다는 전문가들의 평가만큼 시장의 반응도 뜨거워 차를 인도받으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이처럼 고성능차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그토록 따라잡길 염원하는 이웃나라 일본의 자동차, 그것도 스포츠카의 황금기다.
일본은 1960년대에 자동차 수출을 시작했다. 물론 처음에는 고전했으나 두차례 석유파동의 여파로 북미에서 기름을 많이 소모하는 대형차의 인기가 시들해지고 일본차의 전성기가 찾아왔다. 싸고, 고장 없고, 연비가 좋은 일본차는 불티나게 팔렸다. 여기에 엔화 약세까지 더해져 1980년대에는 경이로운 수출실적을 기록했다.
위기감을 느낀 미국은 1985년 플라자협정을 통해 엔화 절상을 요구했다. 그 결과 가격 경쟁력이 떨어져 수출 주도 정책을 쓰기 어렵게 된 일본정부는 내수를 촉진하고자 금리 인하를 단행했다. 그러자 주가 및 부동산 가격이 폭등했다. 기업들과 자산가들뿐 아니라 저금리로 인해 저축을 통해 재미를 볼 수 없게 된 서민들도 부동산 투자에 가세했다.
거품이 올라오듯 과열된 경기라는 의미의 버블경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 때문에 입사하기 위해 면접만 봐도 거마비 4만엔(약 40만원)을 줬다거나, 신입사원의 보너스 봉투가 세로로 섰다(1만엔짜리 100장, 요즘 환율로 최소 1,000만원이 담겼다는 뜻)는 등 많은 이야깃거리가 생겨났다.
이렇게 돈이 남아돌자 갖가지 기발한 상품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자동차 시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떤 차를 만들든 사주는 고객이 있다는 믿음 아래, 메이커들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품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걸윙 도어를 단 소형차, ‘타도 페라리’를 목표로 한 미드십 스포츠카, 터보 엔진과 액티브 서스펜션, 네바퀴조향 시스템, 가변식 스포일러 등 지금 봐도 최첨단 신기술이 대거 적용된 GT카 등이 출시됐다.
이런 차는 한대 팔 때마다 몇백만원씩 손해를 본다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그건 돈이 아니라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각 메이커는 기술력을 과시하기 위해 엄청난 차들을 연이어 출시했다. 고성능차로 인한 손해는 다른 곳에서 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버블경기의 정점인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수익성을 따지지 않고 만든 주옥 같은 차들이 쏟아져나온 배경이다.
1990년대 후반 경기의 버블이 일순간에 꺼져버렸다. 흥청망청 돈을 써대던 자동차회사들은 휘청거렸다. 주력모델까지 판매가 줄어들자 수익을 낼 수 없는 스포츠카는 설 자리를 잃고, 하나둘씩 사라졌다.
여기서 일본 자동차회사들은 뼈저린 교훈을 얻었다. 브랜드의 기술력을 과시하기 위한 스포츠카라도 반드시 수익을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최근 출시되는 스포츠카를 보면 성능뿐만 아니라 수익성까지도 철저하게 따지고 있다.
토요타는 스바루와 손잡고 86를 내놓았고, 최근에는 BMW의 차세대 Z4를 기초로 수프라를 개발하고 있다. 마쯔다는 피아트와 함께 4세대 MX-5를 만들었다. 원가절감을 위해 경쟁사와 플랫폼, 파워트레인, 부품 등을 공유하는 것이다.
물론 협업방식으로 만들어진 차는 디자인이나 기술적인 제약 때문에 버블경기 때의 스포츠카와 비교하면 지루하고, 심금을 울리는 한방이 부족할 수 있다. 하지만 마니아 입장에서는 다양한 스포츠카를 만나볼 수 있기에 두손 들어 반길 일이다.
1990년대 ‘일본 스포츠카 황금기’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더 특별하고 애잔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일본 자동차 황금기를 풍미했던 대표적인 모델을 추려봤다.
마쯔다 RX-7 (Mazda RX-7, 1992-2002)
마쯔다는 본사가 히로시마에 있는 비교적 규모가 작은 회사다. 판매대수는 토요타, 닛산, 혼다 같은 일본 빅3는 물론 다이하쓰, 스즈키 같은 경차 브랜드에도 밀린다. 이런 작은 회사가 자동차 역사에 남을 명작을 잇따라 발표했다.
대표적인 모델이 1978년 등장한 RX-7이다. 이 차가 유명해진 것은 특유의 로터리 엔진 때문이다. 로터리 엔진은 처음 양산한 독일 NSU조차 사용을 포기할 만큼 메커니즘이 까다로운데, 마쯔다는 기술 라이센스를 사들여 각고의 노력 끝에 양산에 성공했다. 그렇게 세계 최초이자 유일의 로터리 엔진 스포츠카 RX-7이 나왔다.
1991년에는 700마력을 내는 4로터 로터리 엔진을 얹은 마쯔다 787B가 일본차 최초로 르망 24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1992년 데뷔한 3세대 RX-7은 이 기술이 고스란히 스며든 직결형 트윈터보를 달아 1.3L 배기량에 280마력을 냈다. 1,300kg이 안되는 가벼운 차체와 콤팩트한 엔진이 어울려 환상적인 핸들링을 뽐냈다. 터보차저와 로터리 엔진이 조합된 마지막 모델로 10년 동안 6만8,500대 남짓 생산됐다. 2003년 RX-8가 바통을 이어받아 2012년까지 생산된 후 로터리 엔진의 명맥은 끊어졌다.
마쯔다 MX-6 (Mazda MX-6, 1991-1997)
1987년 등장한 MX-6는 앞바퀴굴림 2도어 스포츠 쿠페다. 3단계로 감쇠력을 조절할 수 있는 전자식 서스펜션, ABS, 네바퀴조향 등이 옵션으로 준비됐다. 1991년 데뷔한 2세대는 기존의 2.0L 엔진 외에 V6 2.0L, V6 2.5L가 추가됐다. 판매 지역에 따라 A-스펙, E-스펙, J-스펙 버전이 있었다. 포드는 MX-6의 플랫폼을 가져다 2도어 스포츠 쿠페 프로브를 만들기도 했다.
혼다 NSX (Honda NSX, 1990-2005)
최근 하이브리드 구동계를 얹은 신모델이 발표됐지만, 원조 NSX의 역사는 1984년 피닌파리나와 손잡고 만든 HP-X 콘셉트카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9년 공개된 양산형은 당시로서는 첨단기술인 경량 알루미늄 섀시에 V6 3.0L 엔진을 미드십에 얹어 일본 메이커의 위상을 한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시 혼다는 세계 최고의 엔진 메이커로 인정을 받았다. 윌리엄즈, 로터스, 맥라렌 등 쟁쟁한 F1팀에 엔진을 공급하며 승승장구하던 혼다는 내친김에 페라리를 넘어설 수 있는 슈퍼카를 만들기로 결정한다. NSX라는 이름도 ‘새롭고 실험적인 스포츠카’(New, Sports car, eXperimental)를 뜻한다. 지금도 보기 드문 세미 모노코크 알루미늄 보디를 써서 세계 최초의 100% 알루미늄 차체를 가진 양산차로 기록돼 있다.
당시 혼다 엔진을 사용하던 맥라렌팀의 드라이버 아일톤 세나가 NSX의 개발에 참여했다. 1990년 출시 당시 자동차 평론가들과 마니아들의 반응은 말 그대로 폭발적이었다. 깔끔한 핸들링과 환상적인 밸런스로 V8 페라리를 넘어선다는 평가를 받았다.
혼다 CR-X 델솔 (Honda CR-X Del Sol, 1992-1997)
3도어 패스트백 스타일의 CR-X는 1983년에 데뷔했으며, 스포티한 주행성능을 자랑하는 경제적인 소형차로 인기가 높았다. 1992년에 나온 3세대 CR-X 델솔은 시빅의 가지치기 모델로, 스페인어로 태양을 뜻하는 이름처럼 지붕을 열 수 있는 타르가톱을 얹고 크루즈 컨트롤, 안티롤바 등 고급장비를 갖췄다.
혼다 인테그라 (Honda Integra, 1994-2001)
CR-X와 프렐류드 중간급 쿠페가 인테그라다. 혼다 시빅 세단을 베이스로 개발해 1985년 데뷔했다. 북미에서는 어큐라 RSX로 팔렸다. 1994년 등장한 3세대는 일본 내수용 고성능 버전 타입 R로 높은 인지도를 자랑했다. 용접점을 늘려 보강한 차체에, 방음재를 제거하고 경량 윈도와 휠을 끼워 무게를 줄였다. 레드존이 8,500rpm에 달하는 고회전 엔진도 특징이다. 인테그라는 가장 스포티한 앞바퀴굴림 자동차로 평가받으며 혼다의 타입 R 버전으로는 처음으로 북미와 유럽에서 판매됐다. 뒷날 네바퀴굴림 구동계가 옵션으로 추가됐다.
토요타 수프라 (Toyota Supra, 1993-2002)
토요타 스포츠카의 최고봉은 수프라다. 셀리카의 패스트백 모델로 출시됐다가 1986년 개별모델로 독립했다. 1993년에 나온 마지막 버전은 영화 <분노의 질주> 시리즈를 통해서 널리 알려졌다. V6 3.0L 트윈터보 엔진을 얹고 0→100km/h를 4.6초에 돌파했다. 이는 지금 기준으로도 엄청나게 빠른 기록이다.
GT 성향의 스포츠카여서 가볍지는 않다. 1,500kg을 넘는 무게로 경쾌한 맛은 없었지만, 강력한 엔진과 묵직한 핸들링을 바탕으로 뛰어난 성능을 발휘했다. 스키드패드에서 횡가속도 0.98G를 기록하기도 했다. 1960년대 2000GT와 더불어 토요타의 기술력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스포츠카로 기억되고 있다. BMW와 손잡고 개발 중인 후속모델이 내년에 출시된다.
토요타 MR2 (Toyota MR2, 1989-1999)
엔진을 차체 중앙에 놓는 미드십 구동계(MR)는 이상적인 스포츠카를 만들기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토요타 MR2는 모델명이 상징하듯 미드십 구동계의 경량 스포츠카다. 1984년 데뷔했고 페라리 F355를 연상시키는 디자인의 2세대는 1989년에 나왔다. 4기통 2.0L 엔진을 얹은 탓에 차체는 훨씬 작다.
이 차는 가벼운 차체와 특유의 핸들링을 지닌 미드십 구성에 힘입어 경쾌한 달리기를 자랑했다. 토요타의 앞바퀴굴림 구동계를 뒤집어 뒤쪽에 얹었기 때문에 가격도 미드십 스포츠카로서는 가장 저렴한 편이었다. MR2는 성능과 가격을 모두 잡은 토요타의 대표적인 스포츠카였다.
토요타 세라 (Toyota Sera, 1990-1995)
버블경기 당시 토요타는 파격적인 모델을 많이 내놨다. 지금 봐도 충격적인 차는 세라다. 1990년 데뷔해 1995년까지 일본에서만 팔린 세라는 1.5L 엔진을 얹고 앞바퀴를 굴리는 평범한 구성이었다.
이 차를 특이한 존재로 만든 건 바로 디자인. 평범한 소형 해치백에 슈퍼카 같은 버터플라이 도어를 달았다. 따라서 하늘을 향해 열리는 도어만 보면 당대의 슈퍼카 맥라렌 F1을 떠올린다. 그외 부분은 너무나도 평범한 소형 해치백이다.
토요타 소아라 (Toyota Soarer, 1991-2000)
소아라는 편안하고 고급스러운 GT카를 지향한다. 1991년 데뷔한 3세대는 디지털 방식 디스플레이와 터치스크린, GPS 방식 내비게이션 시스템을 갖췄다. 토요타의 플래그십 크라운을 뛰어넘는 편의장비를 자랑하며 렉서스 SC의 원조모델이기도 하다.
미쓰비시 이클립스 (Mitsubishi Eclipse, 1994-1999)
미쓰비시와 크라이슬러의 협력관계로 인해 GTO가 북미에서 닷지 스텔스로도 팔린 것처럼 이클립스는 이글 탈론, 플리머스 레이저로도 판매됐다. 1990년 등장한 1세대 이클립스는 쿠페 한가지였지만 1994년 데뷔한 2세대는 컨버터블이 추가됐다. 앞바퀴굴림과 네바퀴굴림 구동계를 선택할 수 있었다. 미쓰비시의 스포츠카 가운데 유일하게 21세기까지 살아남아 4세대까지 나온 후 2011년 단종됐다.
미쓰비시 GTO (Mitsubishi GTO, 1990-2000)
미쓰비시의 첨단기술이 모두 들어간 GTO는 전형적인 버블시대의 스포츠카다. 이 차에 담긴 대표적인 기술은 트윈터보, 네바퀴굴림, 네바퀴조향, 액티브 서스펜션, 액티브 리어 스포일러, 액티브 에어댐, 가변배기 시스템 등을 꼽을 수 있다. 말 그대로 첨단장비로 꽉 채워진 스포츠카였다. 이런저런 기능이 대거 담긴 탓에 무게는 1,700kg에 육박했다. 그럼에도 320마력을 발휘하는 엔진으로 0→100km/h 가속을 4.9초에 끊었다. 크라이슬러 산하 닷지 스텔스로도 팔렸다.
닛산 페어레이디 Z (Nissan Fairlady Z, 1990-2000)
토요타에 수프라, 미쓰비시에 GTO가 있었다면 닛산엔 페어레이디 Z가 있었다. Z카로 불리는 페어레이디 Z는 1969년 데뷔했다. 합리적인 가격의 스포츠카로 북미에 닷선 240Z로 수출됐다. 3세대부터는 GT 콘셉트의 정통 스포츠카로 거듭났다.
1989년 등장한 4세대는 V6 3.0L 트윈터보 300마력 엔진을 얹기도 했다. 네바퀴조향장치 ‘슈퍼하이카스’(Super HICAS) 시스템, 가변밸브 타이밍기구도 달렸다. 르망 24시와 세브링 12시 클래스 우승을 비롯해 데이토나 24시 등 내구 레이스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뒀다.
닛산 실비아 (Nissan Silvia, 1993-1998)
스카이라인 GT-R, 페어레이디 Z와 더불어 닛산을 대표하는 뒷바퀴굴림 스포츠카 실비아는 1964년 처음 나왔다. 1993년 데뷔한 6세대는 30만대 이상 팔린 5세대보다 차체가 커졌다. 구동계도 앞바퀴굴림으로의 교체를 검토했지만 백지화됐다. 프론트가 무겁고 휠베이스가 길어 드리프트에 최적화된 차로 명맥을 이어오다 2002년 단종됐다.
닛산 스카이라인 GT-R (Nissan Skyline GT-R, 1989-2002)
스카이라인 GT-R은 일본산 슈퍼카의 대명사이자 ‘기술의 닛산’의 자존심이다. ‘하코스카’라는 애칭으로 유명했던 1970년대의 스카이라인 GT-R은 당시 일본 모터스포츠에서 포르쉐 등과 경쟁하는 내셔널 레이스카로 인기가 높았다. 버블시대에 나온 3세대 스카이라인 GT-R, R32 모델은 ‘아테사 E-TS’(ATTESA E-TS) 네바퀴구동계를 얹고 1,000마력도 버틴다는 RB26DETT 계열의 V6 2.6L 트윈터보 엔진을 얹었다. 빠른 모델 체인지를 거쳐 1995년 출시된 R33는 냉각장치를 개선하고, 네바퀴굴림 구동계도 아테사 E-TS 프로 시스템으로 업그레이드됐다.
1999년 출시된 스카이라인 GT-R의 마지막 세대인 R34는 가장 완성도 높은 모델로 평가받는다. 동일한 RB26DETT 계열 엔진을 얹고, 순정 출력은 무의미했다. 내구성이 입증된 엔진이라 출력을 얼마든지 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테사 E-TS 프로 구동계와 액티브 LSD, 카본 보디 키트로 무장한 V-스펙 버전이 스카이라인 GT-R의 최고봉이었다. 스카이라인 GT-R은 JTCC, 슈퍼다이큐 등 일본의 주요 레이스를 휩쓸다시피 했다.
‘헤이세이 ABC’, 버블 시대의 경스포츠카 3인방
‘헤이세이 ABC’란 버블경기의 극단을 보여주는 경스포츠카 3인방을 뜻한다. 헤이세이(平成)는 현 일왕의 연호로 1989년 1월부터 사용하고 있다. 딱 버블 경기의 정점과 맞물리는 시점이다. 이 무렵 등장한 경스포츠카 트리오의 앞글자를 따서 ‘헤이세이 ABC’라고 불렀다. A는 1992년 등장한 마쯔다 AZ-1, B는 1991년 출시된 혼다 비트(Beat), C는 역시 1991년에 출시된 스즈키 카푸치노(Cappuccino)다.
이들 3인방은 660cc 경차임에도 각각 걸윙도어, 미드십 레이아웃, 50:50 무게배분 등 스포츠카로서의 특징을 갖고 있었다. 배기량 제한으로 출력을 무한정 올릴 수 없어 무게를 줄이기 위해 볼트 하나까지도 전용 부품을 쓰는 등 극한의 경량화를 추구했다고 하니 버블경기가 아니었으면 절대 나올 수 없는 차다.
아니나 다를까 이 차들은 하나같이 단명했다. 가장 파격적이었던 AZ-1은 1995년 단종되고, 비트는 1996년, 카푸치노는 1997년 단종되는 운명을 맞았다. 두번 다시 나올 수 없는 차여서 그런지 아직도 많은 팬을 두고 있으며, 상태 좋은 중고차는 나오는 족족 판매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