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막을 두른 람보르기니 아벤타도르 SVJ는 지난 7월 26일 노르트슐라이페를 6분 44초 97만에 주파해 랩타임 신기록을 달성했다. 이전 기록은 포르쉐 911 GT2 RS가 보유했다. 그 전 타이틀도 흥미롭다. 아벤타도르의 아우인 우라칸 퍼포만테가 기록을 세웠다. 람보르기니는 포르쉐에 빼앗긴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아벤타도르 SVJ는 오래전 타이틀 보유자였던 아벤타도르 SV보다 5초 더 줄였다. 자신과 싸움은 물론 경쟁자를 가뿐히 따돌리고 양산차 부문 세계 최고 랩타임 기록을 새로 수립했다. 람보르기니는 예로부터 가장 빠른 상위 모델에 슈퍼벨로체(Super Veloce, 영어로는 Super Fast)의 약자인 SV를 붙였다. 여기에 조타(Jota)에서 따온 J를 더한 차가 아벤타도르 SVJ다.
국제자동차연맹(FIA) 규정집에 나오는 별첨 J는 일반차를 경주차로 바꾸는 규칙이다. 아벤타도르 SV를 경주차 수준으로 업그레이드한 차가 SVJ라는 뜻이다.
F1이 열리기도 한 포르투갈의 유서 깊은 에스토릴 서킷에서 지난 9월 아벤타도르 SVJ 글로벌 시승행사가 열렸다. 길이가 4.182km인 에스토릴 서킷은 1984년부터 1996년까지 F1 포르투갈 그랑프리가 열린 곳이다. 1972년에 문을 열었고 F1 역사상 가장 뛰어난 드라이버 중 한 명인 아일톤 세나가 첫 F1 트로피를 거머쥔 곳이다. 코스에는 모두 13개 코너와 1km에 이르는 직선 주로가 있다. 고속주행보다는 코너링을 겨루는 테크니컬 코스 성격이 강하다. 그동안 경험에 비춰 아벤타도르보다 우라칸이 더 어울리는 코스로 여기며 달리기 시작했는데 편견이고 착각이었다. 예전 경험에서 나온 아벤타도르 S와 우라칸 퍼포만테 비교공식은 머릿속에서 날려버렸다. 마치 우라칸에 V12 엔진을 얹은 듯 트랙을 질주하는 SVJ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테스트 드라이브는 온종일 3세션에 각각 네 바퀴씩 도는 구성이다. 각기 다른 여섯 가지 색상 SVJ 중에 내게 배정된 차는 붉은색이었다. SVJ의 첫인상은 일반 아벤타도르보다 훨씬 화려하고 전투적이다. 정면에서 마주 본 얼굴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뒤태는 기묘한 우주선이나 SF 영화에 나오는 멋진 로봇을 보는 듯해 탄성이 절로 나온다. 특히 거대하고 독특한 리어윙과 엔진 열을 방출하는 뒤쪽 보닛의 구멍 숭숭 뚫린 디자인이 압도적이다.
최고출력은 SV보다 20마력 높은 770마력(8500rpm)이고 최대토크는 73.4kg?m(6750rpm). 트랙에서 실력 발휘할 때 중요한 마력당 무게비는 2가 되지 않는다. 정확히 1.98인데 숫자만 봐도 예사롭지 않은 몸놀림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0→시속 100km 가속은 2.8초, 0→시속 200km는 8.6초에 마친다. 최고시속은 350km를 넘기고 시속 100km에서 완전히 정지하는데 30m밖에 필요하지 않다. 숫자만 보면 경주차와 다를 바 없다.
예전에 우라칸 퍼포만테를 타면서 공기역학을 최대한 활용한 ALA(Aerodinamica Lamborghini Attiva) 1.0을 체험했다. 다른 우라칸과 비교해 퍼포먼스가 어느 정도 앞서는지 확인했기에 2.0으로 업그레이드한 ALA가 아벤타도르에서 어떤 효과를 보여줄지 궁금했다. ALA 2.0은 앞쪽 스포일러에 더한 플랩으로 공기의 흐름을 개선했고, 커다란 리어윙에는 횡방향 공기흐름을 제어하는 직각 날개를 추가했다. 차를 종합적으로 제어하는 LDVA(Lamborghini Dinamica Veicolo Attiva)도 2.0이다. 이 시스템 덕분에 ALA 2.0의 플랩 반응은 500ms에 불과한 빠른 속도를 자랑한다. 순식간에 열리고 닫히는 플랩의 번개 같은 동작 덕분에 SVJ는 코너에서 물 흐르듯 매끄럽게 들어가고 나간다.
직진주로에서는 가속 시 공기저항을 줄이고 코너 앞 제동 시점에는 공기저항을 일으켜 감속을 돕는다. 람보르기니 발표에 따르면 SV보다 앞뒤 차축에 걸리는 다운포스는 각각 40%씩 증가했고 공기저항계수는 1% 낮아졌다. 차체 윗부분 기준으로는 SV보다 다운포스 70%를 더했다. 차체 바닥 면은 30%에 이르는 공기역학 개선이 이뤄졌다. 측면 공기흡입구를 더 크고 섬세하게 디자인하고 전면에 가로핀을 덧붙여 공기흐름을 원활하게 했다. 커다란 리어윙에는 퍼포만테의 1.0에는 없는 윙 양쪽 끝 직각 핀을 달아 고속 코너링 중에도 높은 다운포스를 유지한다.
ALA의 특별한 자랑거리는 리어윙 내부 플랩 제어 기능이다. 1.0과 마찬가지로 엔진 커버의 공기흡입구로 들어온 공기의 흐름을 양쪽 플랩으로 제어해 전체 다운포스를 키우거나 좌우 다운포스를 각각 다르게 한다. 플랩을 모두 닫으면 리어윙은 일반적인 기능에 충실해 다운포스를 늘린다. 모두 열면 직선주로에서 가속 시 저항이 줄어 최고속도가 높아진다. 고속 코너링 시에는 좌우 열림과 닫힘을 달리해 안쪽 바퀴 접지력을 키운다. 안쪽 바퀴에 실리는 다운포스는 30%가량 증가한다. 2.0은 리어스포일러 하단부에서 나오는 공기흐름을 원활하게 다듬어 1.0보다 효율을 높였다. 뉘르부르크링 베스트 랩타임 갱신의 숨은 일등공신이 바로 ALA 2.0이다.
눈으로만 사치를 즐기지는 않았다. 슈퍼카의 매력 중 빼놓을 수 없는 배기음은 일반 아베타도르와 달랐다. V12에서 뿜어나오는 람보르기니의 굵직하고도 날카로운 배기음은 악기 연주처럼 들리는데 SVJ가 질주할 때 들리는 행진곡은 아벤타도르 S의 우아한 아리아와 다르다. 직선주로에서 고속으로 달리면 F1 머신의 배기음을 듣는 듯 짜릿하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매우 높은 음색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퍼포만테와 마찬가지로 차의 하단부가 아닌 뒤쪽 중앙에 높게 배치한 배기구는 고성능 바이크 시트 아래 바짝 올려붙인 모양새와 비슷하다.
더 짧고 가벼운 배기 시스템 덕분에 소리가 많이 바뀌었는데 경주차 영역에 들어섰다고 할 만하다. 전자식 능동형 서스펜션도 손봤다. 안티롤바의 강성은 50% 키웠고 댐퍼는 SV와 비교해 15% 강해졌다. 트랙용 세팅으로 차체를 제어하기 위해 순간적인 반응속도도 개선했다. LRS(Lamgorghini Rear wheel Steering)는 코너링 한계 속도를 높이는 데 중점을 두고 다듬었다. SVJ가 트랙 머신으로 탈바꿈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시스템이 LRS와 LDS(Lamborghini Dynamic Steering)다.
아벤타도르 S와 SVJ의 코너링 성능은 마치 일반 승용차와 경주차처럼 차이가 확연하다. 타이어 역시 전용으로 개발했는데 피렐리에서 SVJ만을 위해 공급한 P 제로 코르사다. 이 타이어는 일반도로 주행을 일부 고려한 반면 P 제로 트로페오 R은 아예 트랙용으로 개발해 옵션으로 제공한다.
실내는 여전히 화려한 디자인과 더욱 다양해진 색상이 돋보인다. 주행 성격을 바꾸는 스트라다?스포츠?코르사 모드와 개별 맞춤 세팅을 위한 EGO 옵션은 바뀌지 않았다. 내비게이션과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은 시대 흐름에 맞게 애플 카플레이를 더했다. 트랙 주행 때 기록계 기능을 하는 람보르기니 텔레메트리 시스템도 옵션으로 마련했다. 실내 색상과 옵션은 수천 가지에 달하는 조합이 가능해서 자신만의 람보르기니로 꾸밀 수 있다.
행사장에는 갖가지 차를 전시했다. 실제 뉘르부르크링 베스트 랩타임을 달성한 위장막 차림 SVJ와 옆에 나란히 전시한 SVJ 63 스페셜 모델이 첫눈에 들어온다. 람보르기니 창립연도 1963년을 기리는 의미에서 단 63대만 제작했다. SVJ도 900대만 만든다. 각종 브리핑과 전시물 관람을 마치고 드디어 시승에 나섰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빨간색 SVJ에 올라 시트와 사이드미러와 스티어링휠을 조정했다. 주행모드는 서킷용 코르사에 맞췄다. 인스트럭터는 주행안정장치를 끄지 말라고 했다. 테크니컬 코스 성격을 지닌 에스토릴 서킷은 의외로 고속 코너링이 가능하고 1km에 가까운 직선주로까지 있어서 시승하는데 아쉬움이 없었다. 몸 사리지 않고 시원스레 달린 인스트럭터를 만난 덕분에 다른 조를 추월하는 호사도 누렸다. 인스트럭터는 조금이라도 뒤에 붙으면 계속 따라와 보라는 식으로 속도를 더 높였다. 마치 실제 레이싱 하듯 분위기를 한껏 띄워주었다. 아무런 장애 없이 달리는 상황과 다를 바 없었다.
아벤타도르는 모노코크 보디 구조상 개발 당시 최고 선택이었던 싱글클러치 ISR 변속기를 고집할 수밖에 없다. 듀얼클러치 자동변속기는 다음 세대에 선보일 예정이다. 지난번 스즈카 서킷에서 아벤타도르를 시승했을 때 변속 충격이 의외로 커서 약간 당혹스러웠다. 이번에도 별 차이는 없지만 충격보다는 혹시나 랩타임에 손실을 주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생겼다. 고속으로 달려 보니 3단부터 5단까지 가속페달을 바닥에 붙인 상태에서 약간 울컥거림만 전해질 뿐이다. 인스트럭터에게 물어보니 랩타임 손실은 걱정하지 말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아벤타도르에 얹혀 흘러온 10년 세월 동안 잘 다듬어진 결과다.
4랩을 달린 첫 번째 주행을 마치고 인스트럭터에게 랩타임 향상에 도움이 될 방법이 있는지 물었다. 오른발 힘을 빼지 말고 무조건 페달을 끝까지 밟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기계가 모두 알아서 하므로 다른 방법이 없다고 한다. 각 코너를 앞두고 패들을 당겨 기어를 낮출 때마다 엔진회전수를 보정하는 기능은 보편화했다. 이 부분에서 아벤타도르 S와 크게 달라진 점이 머신건 쏘듯 바바방거리는 애프터파이어 소리다. 배기 시스템이 바뀌고 배기음 톤만 올라가지 않았다. 매우 야성적이고 폭력적인 배기음을 토해낸다. 대기 시간 동안 피트에 들려오는 SVJ의 배기음은 직선주로에서 F1 머신이 스쳐 지나가는 소리 같았다. 듣기만 해도 신날 정도니, 코너를 거듭할수록 재미는 커졌다.
오버나 언더스티어를 논할 때는 전반적인 특성에 따라 어느 쪽에 포함 시킬지 따져봐야 하는데 SVJ는 뉴트럴이다. 차에 얹은 모든 제어 유닛은 코너링 때 운전자가 의도하는 정확한 라인을 유지하는 데 힘을 쏟는다. 운전자가 원하는 대로 이 차보다 더 정확히 라인을 밟아 나가는 차는 지금까지 겪어 본 적이 없다. 반경이 작은 코너에서는 뒷바퀴조향 시스템이 큰 역할을 한다. 살짝 오른쪽으로 꺾인 직선에 가까운 5번 코너에서 스티어링휠을 감아쥐고 전력 질주하니 ALA 시스템 개입이 느껴진다. 마지막 코너는 완만하고 크게 돌아나가는 13번이다. 무전기에서 들리는 인스트럭터의 설명에 따라 새로 포장한 코너에서 너무 안쪽으로 붙지 않고 스로틀 균형을 유지하다가 살짝 가속한 상태로 돌아 나왔다. 여기서 차의 쏠림이 덜하다고 느낀 게 ALA 덕분이 아닌가 싶다.
안타깝지만 사람의 인지능력과 감각으로는 ALA 시스템의 실제 작동 여부나 정도를 확연히 알아채기 힘들다. 다만 비교시승을 하면 전체 성능 차이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예전 아벤타도르 S와 비교해 고속 코너에서 차를 안쪽으로 당겨주는 듯한 느낌이 그렇다. 1번 코너 직전 시속 270~280km 정도에서 제동 시 노즈 다이브 현상이 현저히 줄어 코너 진입이 쉬워진 부분도 체감했다. 시속 300km에 육박하는 속도에서 풀 브레이킹을 시도하며 이렇게 긴장하지 않고 수월하게 1번 코너에 들어선 경우는 처음이다. 허무할 정도로 빠르다.
이런 점은 기술의 위대함과 아쉬움이 동시에 느껴진다. 예전 슈퍼카는 오너에게 아무나 가질 수 없다는 현실과 일정 수준 이상의 기술이 없으면 제대로 몰 수 없다는 점에서 자부심도 심어줬다. 이제는 장벽이 무너져 어느 정도 운전 경험만 있다면 큰 어려움 없이 차의 성능을 마음껏 끌어낼 수 있다. 스포츠카로 인정받고 슈퍼카로 대접받는 많은 업체의 각종 모델이 그렇게 바뀌었다. 어쩔 수 없는 시대 흐름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빠른 슈퍼카도 아무나 쉽게 몰 수 있다. 놀라운 세상이다. 이렇게 멋진 SVJ를 거리에서 뽐낼 수 있는 지구상 오너 900명은 선택받은 사람들이다. SVJ 63은 아마 거리에서도 보기 힘들다. 유튜브에 등장하는 차 빼고는 부호의 집 차고나 특별 공간에 곱게 모셔두었을 확률이 높다.
시승을 마치고 저녁 만찬 자리에서 본사 관계자들과 대화 도중 판매 현황에 관해서 물었다. 아직 900대의 국가별 배분은 확정되지 않았다고 한다. 63 스페셜 모델은 이미 예약이 끝났다. 각국 기자들의 사적인 대화 자리에서도 국가별 배분 대수가 화젯거리였다. 국내에 몇 대 들어올지 모르지만 서킷에서 만나는 자리가 꼭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