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보티첼리…. 걸작을 남긴 예술가들이자 르네상스라는 한 시대를 꽃피운 위인들이다. <모나리자>, <다비드>, <아테네 학당>, <비너스의 탄생> 등 세기를 넘나드는 작품들이 그들의 손을 거쳐 세상의 빛을 봤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시공을 초월한, 강한 생명력을 지닌 예술품을 만들고 남길 수 있었을까? 단순히 재능과 관록을 갖추고 있어서? 운이 좋아서? 결코 아니다. 이들 뒤에는 메디치 가문이라는 강력한 '후원자'가 있었다. 메디치 가문은 앞서 언급한 예술가들을 후원하며 창작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을 사들이고 수집하며 유럽 예술 역사상 가장 빛나는 황금기를 이루었다.
미스트랄, 캄신, 3200 GT, MC12….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여러 걸작을 남긴 마세라티는 경영난으로 이곳저곳을 떠돌다 2012년 FCA(지금의 스텔란티스) 산하로 흡수됐다. 이후 기블리, 콰트로포르테, 르반떼를 연이어 선보이며 잠시 반짝했으나 후속작 부재로 최근까지 이렇다 할 모델을 내놓지 못했다. 시장은 빛바랜 삼지창을 우려 섞인 눈으로 바라봤고, 경영진은 불투명한 미래를 감추기에 급급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정확히 말하면 2020년 9월, 어둠을 뚫고 한 모델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세라티의 새출발을 알리는 MC20이었다. 그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2022년 중형 SUV 그레칼레와 신형 그란투리스모를 연달아 공개하며 오랜만에 기지개를 켰다. 대중은 마세라티의 달라진 행보를 바라보며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후원자' 스텔란티스가 마침내 마세라티의 가치를 깨달은 걸까? 혼란과 진통 속에서 르네상스를 일으킬 때가 왔다.
부흥에 앞장설 모델은 새로운 캐시카우 그레칼레다. 열정과 혁신, 헌신과 희생 아래 탄생한 이 차는 (성장 동력을 잃어버린 르반떼를 대신해) 어둠을 가를 와일드 카드다. 911과 718 사이 서 있는 카이엔과 같은 존재라고 보면 이해가 쉬울 터. 알파로메오 스텔비오의 조르지오 플랫폼을 쓰는 그레칼레는 이탈리아 라치오 피에디몬디 산 게마노에 있는 알파로메오 카시노 공장에서 생산된다. 검증이 끝난 플랫폼을 사용해 개발비를 줄이고, 생산라인 공유로 생산비를 절감하기 위해서다. 어떤 후원자도 돈을 물 쓰듯 하는 이는 좋아하지 않을 테니…. 효율은 높이고, 리스크는 줄여야 한다.
엔진 라인업은 알파로메오의 2.0L 하이브리드와 마세라티가 직접 만든 3.0L 네튜노 V6 가솔린 엔진으로 꾸렸다. 전기를 동력원으로 쓰는 전동화 파워트레인도 곧 선보일 예정이다. <탑기어> 사무실로 도착한 모델은 2.0L 하이브리드를 넣은 모데나. 3.0L 네튜노 V6 가솔린 엔진을 얹은 트로페오를 기대했건만…. 아쉬움 마음으로 운전석에 올라탔지만, 이같은 감정은 얼마 안 가 즐거움으로 바뀌었다. 가속 페달을 짓이기자 마세라티 특유의 까랑까랑한 엔진음 토하며 격하게 달려간다. 시야가 좁아지며 엄청난 속도감이 몰려온다. 48V 배터리가 4기통 엔진에 힘을 보태며 네바퀴를 사정없이 굴린다. 억지나 겉멋 없이 시원하게 내지른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걸리는 시간은 5.3초. 도로만 뻥 뚫려 있다면 화끈한 달리기 실력을 마음껏 경험할 수 있다.
잘 나가는 만큼 제동도 즉각적이다. 매서운 운동 에너지를 강력한 힘으로 억눌러 그친다. 주행 모드는 컴포트, GT, 스포츠, 오프로드 등 네 가지. 주로 이용한 모드는 스포츠다. 가속 페달을 짓이기자 엔진회전수 바늘이 단번에 5000rpm으로 뛰며 보다 생동감 있는 움직임을 만든다. 기본 장비인 에어서스펜션은 댐퍼를 단단히 조이고, 키를 15mm 낮춰 불필요한 움직임이 발생하지 않도록 무게 중심을 내리누른다. 덕분에 몸놀림이 침착하고 단호하다. 매끄럽게 착착 달라붙는다.
정확한 핸들링으로 휘감아 굽이치는 중미산 마유산로를 대담하게, 예리하게, 매끄럽게 올라탔다. 단단해질 대로 단단해진 서스펜션은 끊임없이 지지력을 보탰다. 세차게 비틀고 다음 코너까지 거세게 질주한다. 두툼한 사이드 볼스터는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몸을 지지하느라 분주하다. 코너 진입 전 커다란 패들을 두 번 당겨 단수를 떨궜다. 쿼드 배기구가 자극적인 소리를 내뿜으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하이브리드 유닛이 들어가 있는데도 음색은 사납다. '역시 마세라티군.' 앞 코를 오른쪽으로 꺾자마자 가속 페달을 힘차게 눌렀다. 엔진이 다시금 빠르게 회전하며 날카로운 소리를 뿜어댄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모데나도 이렇게 재미있는데, 트로페오은 얼마나 더 짜릿할까?
한바탕 소동을 벌이고 나니 허기가 진다. 휴식이 필요하다. 묵직한 문을 열고 나섰다. 모데나 메인 컬러 그리지오 칸지안테가 눈길을 끈다. 세 가지 컬러를 한데 포갠 이 컬러는 빛에 따라, 보는 각도에 따라 서로 다른 컬러를 띈다. 무게 중심은 네 바퀴 사이에 있고, 짧은 오버행, 긴 보닛, 매끄러운 루프라인이 완벽에 가까운 실루엣을 자아낸다. 낮고 넓은 그릴, 사다리꼴 C필러, 주지아로의 3200 GT에서 영감을 받은 부메랑 모양의 테일램프는 역동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마세라티만의 조형적 기교. 기본 휠 크기는 20인치인데, 추가금을 내고 1인치 키우기를 권한다. 그레칼레를 더 돋보이게 하는 방법이다. 20인치 휠은 보는 이로 하여금 차체를 비대하게 만든다. 크기는 전장 4850mm, 축거 2901mm, 전고 1670mm, 전폭 1980mm다. GT는 전폭이 모데나·트로페오 대비 30mm 좁다.
축거가 3m에 육박하다보니 2열 좌석 무릎·머리공간은 넉넉하다. 앉은 자세가 여유롭다. 부드러운 가죽은 몸을 포근히 감싼다. 짐공간은 기본 535L고, 평평한 바닥면, 바닥면 아래에 마련한 별도의 공간, 2열 좌석을 접을 수 있는 버튼 등을 통해 여러 방법으로 활용이 가능하다. 통상 짐공간 아래 배치돼 있는 서브우퍼는 짐공간 좌측 벽면으로 이동해 보다 힘 있는 소리를 만든다. 이같은 변화를 준 사운드 제조사는 이탈리아의 소너스 파베르. 실내 곳곳에 21개 스피커를 집어넣어 몰입감 있는 리스닝 룸을 구현한다. 소너스 파베르가 추천한 다프트 펑크 <GET LUCKY>를 틀어보니 반주와 가수의 목소리 모두 선명하게 들린다. 저·중·고음을 취향에 맞게 제어할 수 있는 기능은 12.3인치 센터 디스플레이에 있다. 소너스 파베르 로고가 새겨진 레이저 컷 메탈 그릴 디테일은 드라이브 모드 셀렉터, 센터 에어벤트, 디지털 스마트워치 등 크롬 도금이 들어간 요소들과 어우러지며 인테리어 완성도를 높인다. 마감재는 가죽이 주를 이루고, 값싼 플라스틱은 찾아볼 수 없다.
대시보드 위쪽 한 가운데에 자리한 디지털 스마트워치는 인테리어의 백미다. 조그마한 화면을 터치하면 시계, 나침판, G포스미터, 크로노미터로 바뀌며 다양한 정보를 보기좋게 띄운다. 흥미롭다. 마세라티는 그레칼레 시장 경쟁력 확보를 위해 디지털 스마트워치 외에도 12.2인치 디지털 클러스터, 12.3인치 디스플레이와 8.8인치 디스플레이를 한 테두리 안에 모은 듀얼 스크린, 헤드업 디스플레이 등을 빠짐없이 넣었다. 이 밖에 어라운드 뷰, 애플 카플레이·구글 안드로이드 오토, 스마트폰 무선충전, 앞좌석 열선·통풍, 스티어링휠 열선도 기본 장비다.
어떻게 해서든 하나라도 더 챙기려는 모양새다. 심혈을 기울인 티가 역력하다. 맹렬하고, 짜릿하고, 섬세하고, 우아한 이탈리아산 '명기'다. 부흥에 앞장설 자격이 충분하다. 잠재력도 크다. 올해 전기 버전인 폴고레가 라인업에 더해지면, 그레칼레는 하이브리드, 내연기관, 전기 모두를 아우르는 풍성한 선택지를 갖추게 된다. 늦은 감은 있지만, 마세라티의 가치를 알아 본 '후원자' 스텔란티스에 경의를 표한다. 꿈꿀 권리를 넓혀준 마세라티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제원]
MASERATI GRECALE MODENA
가격: 1억3300만원
엔진: I4 2.0L 터보+전기모터, 330마력, 45.9kg?m
변속기: 8단 자동, AWD
성능: 0→100km/h 4.5초, 240km/h
연비: 9.8km/L, 178g/km
무게: 1970kg
글 문영재 사진 이영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