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동화 자동차 시대가 열렸다. 폭스바겐은 긴장한 기색이 전혀 없다. 시장을 장악할 준비를 이미 끝내 놓은 까닭이다
창밖에는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1년 중 가장 아쉽게 느껴지는 비다. 벚꽃 엔딩을 의미해서다. 이 비가 내리고 나면, 거리를 분홍빛으로 물들였던 꽃잎은 모두 떨어지고 만다. 벚꽃이 지면 괜히 우울한 감정마저 든다. 꿈의 환상에서 깨어나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어서다. 한바탕의 봄 꿈은 헛헛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벚꽃처럼 찾아온 폭스바겐 ID.4도 이날 봄비와 함께 내 곁을 떠났다. 한동안 허전한 감정이 가시지 않았다. 꽤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다. ID.4는 출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 세계 24개국, 93명의 전문기자가 선정하는 ‘2021올해의 차’에 이름을 올렸다. 우리나라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이어 나가고 있다. ID.4는 지난 1년 동안 국내 시장에 출시한 84개 모델을 제치고 한국자동차전문기자협회 선정 ‘2023 올해의 차’ 자리에 올랐다. 중앙일보가 주관하는 심사에서도 첨단운전자보조 시스템 부문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2023 올해의 차 ADAS 부문’을 수상했다. 과연 무엇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자동차 시장에 불어온 전동화 바람은 디자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제조사들은 하나같이 최첨단 이미지를 불어넣기 위해 애쓴다. 메르세데스-벤츠는 에어로다이내믹에 초점을 맞춘 디자인으로, 아우디는 LED 조명에 화려한 그래픽을 넣어서, BMW는 차체 곳곳에 파격적인 붓 터치를 더해 미래 이미지를 그리고 있다. 현대차는 레트로 디자인에 미래지향적인 요소를 버무려 펑키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모두 멋은 있지만 왠지 모르게 로봇처럼 딱딱한 인상을 풍긴다.
반면 폭스바겐은 전기차를 친근한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람의 눈동자를 형상화한 헤드램프가 대표적인 예다. 실제로 마주하면 애니메이션 속에서 튀어나온 자동차 캐릭터를 보는 기분이다. 폭스바겐은 한발 더 나아가 자사 전기차 모델을 일컬어 ID 패밀리라고 부른다. ID.버즈부터 ID.3까지 함께 찍은 사진을 보고 있으면 가족사진이 따로 없다. 그렇지 않아도 전기차라는 장르 자체가 생소한 소비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폭스바겐의 전략. 덕분에 ID.4는 마음의 준비 시간을 둘 필요도 없이 우리 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ID.4에는 익숙한 요소가 하나 더 있다. 우리에겐 해치백의 교과서로 잘 알려진 정통 폭스바겐 골프처럼 움직인다. 1세대부터 최신 8세대 모델에 이르기까지 골프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중용이다.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법도 없다. 주행 성능도 마찬가지. 가볍고 경쾌하지만 고속도로 위에선 묵직한 안정성이 돋보인다. 예리하고 단단하지만 일상 주행의 편안하고 안락한 분위기를 깨트리지 않는다. ID.4는 이런 골프의 움직임을 꼭 닮았다. 고급스러운 승차감은 부족한 조금 아쉬운 모습까지도.
심지어 성능도 비슷하다. ID.4의 최고출력은 204마력, 최대토크는 31.6kg·m다. 현재 판매하고 있는 골프 2.0L TDI보다 출력은 54마력 높고, 토크는 조금 낮은 수준이다. 대신 차체 바닥에 깔린 배터리 때문에 600kg 정도 더 무겁다. 그 결과 ID.4와 골프의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 가속 시간은 각각 8.5초, 8.4로 어깨를 나란히 한다.
ID.4와 크기와 성능이 비슷한 전기차를 시승할 때면 항상 산뜻한 기분이 부족해 불만이었다. 2t이 넘는 차체 무게 때문이다. 특히 코너를 돌아나갈 때 뒤가 찜찜했다. 뒤뚱거리는 차체 움직임을 가만히 두고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ID.4는 발걸음이 깨끗하고 시원하다. 무거운 배터리의 존재를 쉽게 알아차리기 어렵다. 미래 전기차 시대를 열어가는 폭스바겐의 최고의 유산이자 가늠자는 골프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활기 넘치는 움직임을 무기로 운전자만 즐거운 차는 아니다. ID.4의 차체 길이×너비×높이는 각각 4585×1850×1620mm로 티구안보다 더 길고, 넓다. 휠베이스 또한 85mm 더 여유롭다. 앞뒤 바퀴를 양 끝으로 밀어낼 수 있는 전기차의 장점을 톡톡히 살렸다. 덕분에 성인 남성이 뒷자리에 앉아도 답답한 기분을 들지 않는다. 대한민국 평균 성인 남성 키를 10cm는 거뜬히 웃도는 <탑기어> 포토그래퍼도 촬영을 위해 돌아다니는 내내 불편한 내색 없었다.
광활한 파노라마 선루프 블라인드까지 걷으면, 지붕을 열고 다니는 듯 시원한 개방감을 즐길 수도 있다(블라인드가 워낙 길어서 끝까지 열리는 동안 인내력 테스트하는 줄 알았다). 짐공간 또한 넉넉하다. 기본 적재용량은 543L, 2열 시트를 접으면 1575L까지 늘어난다. 갖은 촬영 장비를 넙죽넙죽 잘도 받아 먹어 치우는 ID.4가 기특하기 짝이 없었다.
촬영을 마치고 동료 기자를 집까지 데려다주기 위해 길을 나섰다. 첨단운전자보조 시스템을 두고 모든 조작을 직접 하는 내 모습을 본 동료가 흥미로운 테스트를 제안했다. ID.4의 어댑티브 크루즈컨트롤 성능 점수를 매겨 보자는 것. 자신은 시승을 할 때면 내부순환로에서 얼마나 자연스럽게 도로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지 엿본다고 설명했다. 차도 많고, 구불구불한 구간이 많은 내부순환로야말로 반자율주행장비 성능을 가늠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는 말도 덧붙였다.
곧장 어댑티브 크루즈컨트롤을 활성화하고 실력 확인에 나섰다. 스티어링휠에서 손은 떼지 않았다. 두 손을 모두 놓으면 ID.4는 전면 유리 아래 숨은 LED 바를 빨갛게 물들이고, 브레이크를 활용해 짧고 강한 충격으로 운전자에게 주의를 준다. 조금 뻔하지만 ID.4의 첨단운전자보조 시스템은 나무랄 데 없었다. 옆 차선을 달리던 차가 끼어들어도 놀라지 않고 부드럽게 반응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이 정도면 합격이냐는 질문에 동료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2022년, 폭스바겐 글로벌 판매량은 456만대를 기록했다. 순수 전기차 판매량은 33만대였다. 2021년보다 24% 성장한 수치다. 그 배경에 ID.4의 활약이 있다. 33만대 가운데 17만대를 차지하며 폭스바겐의 전기차 판매 성장을 견인했다. 우리나라에선 초도 물량이 모두 동나면서 출시 2주 만에 수입 전기차 1위 자리에 올랐다. 의심할 필요 없는 주행 성능과 빠짐없이 챙긴 편의?안전장비, 합리적인 가격을 한데 버무려 전기차 시장의 성공 사례로 자리매김했다.
보다 더 경쟁력 있는 가격표를 달고 뛰어난 상품성을 자랑하는 국산 전기차도 ID.4의 질주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시승기를 쓸 때 웬만하면 ‘타보면 안다’는 말을 피하는 편이다. 무책임하게 선택을 떠넘기는 기분이 드는 까닭이다. 하지만 폭스바겐 모델에는 이 말을 아끼지 않는다. 타보면 좋다는 사실을 바로 느낄 수 있다. ID.4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