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계신 분만 용기를 불어넣어 주시진 않는다.
땅에서는 GMC 시에라가 용기를 북돋아 줄 지어다
개구리 왕눈이, 수리부엉이, 안경원숭이…. 학창 시절, 아니 지금까지도 눈 좀 크다는 동물 닮았다는 소리를 지겹도록 듣고 있다. 심지어 태몽은 황소였다. 엄마가 대문을 열자 집채만 한 황소가 두 눈 끔뻑거리며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고. 하지만 이렇게 눈이 큰데도 아쉬웠던 적이 있다. 아이슬란드의 대자연 앞에서, 프랑스 파리 에펠탑 아래에서, 스웨덴 얼음 호수 위에서 한 폭의 그림을 한눈에 담지 못해 한스러웠다. 이럴 때면 드는 또 다른 감정이 있다. 대상을 우러러보게 된다. 그 앞에 선 인간은 한없이 작게만 느껴져서다.
GMC 시에라를 마주한 순간도 그랬다. 육중한 덩치를 한눈에 담으려면 적어도 열 걸음쯤 멀찍이 뒤로 물러나야 한다. 가까이 다가가면 거대한 콘크리트 벽 앞에 선 느낌이다. 그 웅장한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이내 곧 뒷걸음질 치고 만다. 6m에 육박하는 길이, 2m를 넘나드는 너비와 높이의 자동차가 주는 위압감은 정말이지 대단하다. 그런데 이런 감정이 드는 순간은 어디까지나 제3자 입장에서 시에라를 바라봤을 때뿐이다. 만약 시에라 주인 입장에선, 램프의 요정 지니를 손에 넣은 듯 든든하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용기가 펄펄 끓어오른다.
듬직한 기분이 절로 드는 이유는 비단 거대하고 우람한 차체 크기 때문만은 아니다. 시에라는 레저의 요정(?) 지니나 다름없다. 어떤 소원을 말해도 아무 문제 없다는 듯 거뜬히 해결해준다(당연히 딱 세 가지로 제한을 두지도 않는다). 산악 바이크를 취미로 즐기고자 하는 이에겐 광활한 베드를 떡하고 내놓는다. 트렁크 문을 6가지 형태로 활용할 수 있는 6펑션 멀티프로 테일게이트로 대형 크루저 바이크도 너끈하게 받아낸다. 만능 테일게이트는 적재함 위로 쉽고 편안하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계단으로 변신하는 재주도 있다.
카라반 캠핑 또는 보트와 같은 해상 레저를 원하는 이에겐 트레일 히치를 툭 꺼내놓는다. 후방 카메라를 이용해 트레일러 결합을 돕는 히치 가이드뷰도 친절하기 그지없다. 견인력은 최대 3945kg. 무거운 트레일러를 연결했을 때 파워트레인에 무리가 없도록 전용 엔진 에어필터와 오일 쿨러도 빠뜨리지 않았다. 스태빌트랙(StabiliTrak®) 차체자세제어 시스템도 인상적이다. GMC에 따르면 주행 중 트레일러가 흔들리는 스웨이 현상을 막는 데 탁월하다고. 또 트레일러의 하중에 따라 브레이크 압력을 달리해 안정적인 차체 움직임을 돕는다.
오토 캠핑은 시에라에게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 적재공간 활용도를 확인하기 위해 창고에 있는 캠핑 장비를 몽땅 꺼냈다. 이른 봄부터 땀 좀 뺐다. 그런데 모두 싣고 나니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분명 엘리베이터에 한가득 실어 내려올 때만 하더라도 이 정도면 적재공간을 꽤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어림없었다. 전체 면적의 절반도 채우지 못했다. 1781L에 달하는 시에라의 트렁크 용량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로라하는 대형 SUV 2?3열 시트를 모두 접었을 때 짐공간보다 널찍해 여유가 넘친다.차체는 우악스럽게 크고, 적재공간 먹성은 포악스럽기까지 하다. 시에라를 모르는 사람에게 이렇게만 설명해주고 디자인을 그려보라고 한다면, 분명 예쁜 그림은 나오지 않을 테다. 논밭에서 험상궂은 표정을 짓고 있는 화물차를 떠올렸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시에라는 잘생겼다. 촌스러운 티는커녕 모던한 분위기까지 물씬 풍긴다. 크롬 장식이 자동차를 이토록 멋지게 꾸미는 재료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시에라 보고 깨달았다. 다른 차였다면 사자마자 당장 까만 페인트로 칠하고 싶었을 텐데, 시에라는 과한 패션도 군더더기 없이 소화한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는 말은 시에라를 두고 한 말이었다.
문을 열고 실내에 들어서면 입이 쩍하고 벌어진다. 얼마 전 랜드로버 레인지로버를 탔을 때 내뱉었던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어쩌면 그보다 더 크게 놀랐는지도 모른다. 픽업트럭에 기대할 수 없었던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반전이었기 때문이다. 나뭇결을 그대로 살린 대시보드,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가죽 시트, 반짝이는 메탈 소재로 빚은 스피커 커버는 럭셔리 SUV 실내를 방불케 했다. 아날로그 감성도 찾아볼 수 없다. 계기판과 대시보드 중앙에 각각 자리 잡은 12.3인치, 13.4인치 디스플레이가 두 눈을 사로잡는다. 룸미러는 차체 뒤편 카메라가 비추는 화면을 띄운다. 짐을 높이 실었을 경우 후방 시야를 가리는 트럭의 약점을 기술로 극복했다.
달리기를 시작해도 고급스러운 분위기는 쉽게 깨지지 않는다. 시에라는 고요하고 포근하다. 차체가 요동치는 도로를 만나도 잔잔한 물살을 가르듯 평온하다. 리얼타임 댐핑 어댑티브 서스펜션 덕이 크다. 1000분의 2초 간격으로 노면 상태를 감지해 서스펜션 감쇠력을 조율하는 덕에 안락하고 부드러운 승차감을 얻을 수 있다. 커다란 요철을 만날 때 이따금 큰 진동과 소음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평화로운 분위기를 유지한다. 10단 자동변속기 또한 있는 듯 없는 듯 제 몫을 해낸다. 가속 페달을 콱 밟아도 동요하지 않는다. 기어를 촘촘하게 나눈 변속기는 시종일관 순하고 부드러웠다.
다만 서슬 퍼런 V8 심장만이 ‘가르릉’ 울부짖을 뿐이다. 최고출력 426마력, 63.6kg·m에 달하는 최대토크를 쏟아 내며 앞차 꽁무니를 바짝 따라붙는다. 촬영용 차를 몰고 앞서 달리던 동료 기자는 순간 화들짝 놀랐는지 속도를 높여 거리를 벌렸다. 그는 “멧돼지가 달려와 덮치는 줄 알았다”면서, “순식간에 룸미러가 새까맣게 변하는 경험은 두렵다”고 말했다. 시원한 가속 성능은 중독적이지만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 앞차 운전자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도톰한 지갑 사정을 위해서도 절제가 필요하다. 살뜰한 주행으로 1L당 10km까지 높였던 연비는 가속 몇 번만으로 7.2km/L까지 뚝뚝 떨어졌다.
압도적인 엔진 성능은 오프로드에서도 빛을 발한다. 가파른 언덕을 오를 때도 2.5t에 이르는 차체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가뿐 숨을 내뱉는 일도 없다. 굳이 엔진회전수를 높이지 않아도 시에라는 앞에 놓인 장애물을 꿀떡꿀떡 집어삼켰다. 다만 순정 타이어의 오프로드 성능이 못내 아쉬웠다. 겨우내 꽁꽁 얼어있던 땅은 따뜻한 날씨에 진창으로 변했다. 승차감에 초점을 맞춘 타이어는 헛바퀴를 돌기 일쑤. 골이 깊은 곳에서는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미끄러지기도 했다. 다행히 든든한 네바퀴굴림의 도움을 받아 무리 없이 빠져나올 수는 있었다. 시에라는 주행 상황에 따라 스스로 디퍼렌셜을 잠가 험로 탈출을 도왔다.
차체 크기가 육중하지만 여기저기 생채기를 유발하는 장애물로 가득한 좁은 오프로드 운전도 어렵지 않았다. 시에라는 360도 올어라운드뷰 카메라를 이용해 차체 주변 곳곳을 비춰준다. 총 10개에 달하는 화면을 보여주는데, 경사가 급한 언덕을 오를 땐 라디에이터 그릴 앞이 훤히 보이는 프런트 뷰 또는 보닛 위에서 직각으로 내려다보는 듯한 프런트 탑다운 뷰를 활용하니 수월했다. 좌우 바퀴를 비추는 화면을 켜면 나무와 바위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야 하는 상황도 두렵지 않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서라운드뷰도 왜곡이 심하지 않아 유용했다.
“시에라와 함께하는 시간 동안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세기말 학원물에서나 등장할 법한 대사다. 오글거리지만 시에라를 한마디로 정리하기에 이보다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했다. 시에라는 듬직한 어깨를 내어주며 편안한 안식처를 자처한다. 어떤 레저 활동이든 즐겨도 좋다고 응원한다. 솔선수범 기꺼이 나서 여가 활동 중 겪을 법한 어려움을 덜어준다. 꿈꿔온 삶을 실현할 수 있도록 도우며, 함께 한계에 맞선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하늘에 계신 분만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게 아니다. 땅에서는 시에라가 용기를 북돋아 줄지어다.
6.25 전쟁 참전 용사 제무시를 모르시나요? 성이 뭐냐고요? 아, 사람이 아니에요…
GMC와 우리나라의 인연은 195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6.25 전쟁 발발 직후 미군과 함께 GMC의 군용 트럭 CCKW가 한반도에 상륙했다. CCKW는 우리에겐 ‘두돈반’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K-511의 전신이나 다름없는 트럭이다. 6×6 구동을 무기로 험준한 지형을 넘나들며 전쟁물자를 실어 날랐다. 미국에서 건너 온 트럭 이름이 익숙지 않던 어르신들은 발음하기 편한 대로 ‘제무시’라고 부르며 친밀감을 높였다.
제무시는 이내 국내에서 트럭을 나타내는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강원도 산골에 가면, 벌목 현장 등에서 아직 활약 중인 CCKW 아니, 제무시를 만나볼 수 있다. GMC는 1902년, 제너럴 모터스(GM) 산하 상용차 전문 브랜드로 설립되어 우리 곁을 지켰다. 대형 트럭부터 픽업, 버스를 만들어 보다 윤택한 삶을 뒷받침했다.
오늘날 GMC는 과거와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고성능, 프리미엄, 럭셔리 자동차를 지향한다. 때는 2006년, GMC는 폰티악과 합병을 계기로 상용차 이미지를 벗겨내기 시작했다. GM은 합병을 통해 폰티악의 고성능, 프리미엄 이미지를 GMC에 수혈하고자 했다. 화물차, 강력한 오프로더 뼈대의 상징이던 보디 온 프레임 대신 유니보디를 접목한 모델도 출시하기에 이른다. 대중에게 더욱 친절한 브랜드로 거듭나기 위한 변화였다. 유니보디는 보디 온 프레임 방식보다 강성은 낮지만, 높은 연료효율과 편안한 승차감을 원하는 일반 소비자 입맛에는 더 잘 맞았다.
2009년, GMC는 마침내 상용 트럭 100년 역사에 종지부를 찍는다. 실버라도 4500 HD와 같이 일상생활보다는 산업현장에서 활용도가 높은 미디엄-듀티 이상의 트럭 생산은 쉐보레가 도맡았다. 같은 해 GMC는 쉐보레 이쿼녹스와 플랫폼을 공유하는 중형 SUV 터레인을 내놓으면서 승용 시장에서 브랜드 스펙트럼을 크게 넓혔다. 현재는 중형부터 준대형, 대형에 이르기까지 SUV와 픽업트럭을 아우르는 승용 모델 6종을 판매하고 있다. 지난 2020년, 무덤에서 부활한 허머 EV까지 더하면 판매 모델은 7종까지 늘어난다.
GMC가 판매하는 모델은 대부분 쉐보레와 차체와 파워트레인을 나눠 쓴다. 이란성 쌍둥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둘의 성장 환경 차이는 극명하다. 쉐보레가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자식이라면, GMC는 부잣집 도련님이다. 성능은 비슷할지 몰라도 안팎 디자인과 소재, 안전 및 편의 장비에 차별을 두고 있다. 쉐보레보다 한층 호화로운 SUV와 픽업트럭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그중에서도 으뜸인 GMC를 원한다면, 드날리를 구매하면 된다. 북아메리카 최고봉에서 따온 드날리는 GMC 내 최상위 트림에 붙는다. 더 화려하게 치장하고, 고급 옵션을 모두 넣은 등급. 현대차를 예로 들면, ‘캘리그라피’급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에게 GMC는 가깝고도 먼 브랜드다. 나이 지긋한 어른들도 GMC라고 말하면 고개를 갸우뚱하다가도, 제무시라고 이야기하면 그제서야 “아, 이게 제무시야?”라고 물으며 반긴다. 70년이라는 긴 공백 기간이 있지만, GMC의 활약상은 머릿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정식으로 판매한적 없는 생소한 브랜드이지만, 오랜 시간 함께 동고동락한 한국GM의 가족이라고 생각하면 또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제 GMC가 우리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건넨다. 앞으로 한국에서 어떤 활약을 펼칠지 기대를 모은다. 제무시가 아닌 GMC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