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드로버에 이름을 남긴 가장 영국적인 브랜드, 로버(Rover)
2016-07-05 10:21:22 글 박영준 (자동차 칼럼니스트, 단국대 법과대학 교수)
1970 레인지로버
영국이 자랑하는 SUV 전문회사 랜드로버(Land Rover)가 있다. 여기서 만드는 레인지로버(Range Rover)는 ‘사막의 롤스로이스’라는 별명을 지닌 고급차다. 그런데 가끔씩 랜드로버와 레인지로버가 어떤 관계인지 묻는 사람들을 만난다. 둘 다 이름 뒤에 ‘로버’가 붙어서일 것이다. 요즘 기준으로 대답한다면 ‘랜드로버는 자동차회사 이름이고 레인지로버는 그 회사에서 만드는 모델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랜드로버와 레인지로버 모두 로버(Rover)에서 만드는 모델명으로 시작됐다. 이번호에 소개할 브랜드는 랜드로버에 이름이 남아 있는 가장 영국적인 자동차 브랜드 로버다.
19세기의 자전거는 앞바퀴가 너무 커서 안전성이 좋지 못했다. 존 스탈리(John Kemp Starley)는 안전한 자전거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고 1877년 영국 코벤트리에서 자전거회사를 설립했다. 연구를 거듭한 끝에 1885년 앞바퀴와 뒷바퀴의 크기가 비슷한,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자전거를 만들고, 로버 안전 자전거(Rover Safety Bicycle)라고 불렀다. 이 자전거는 선풍을 일으켜 폴란드에서는 자전거가 로버로 불릴 정도였다. 당연히 회사는 급속히 성장했다. 1890년대 중반에는 회사명을 로버 자전거회사(the Rover Cycle Company)로 바꿨다.
1948 랜드로버 시리즈Ⅰ
안타깝게도 존 스탈리는 1901년 46세로 사망하고 영국 다임러(DMC)를 설립한 해리 로손(Harry J. Lawson)이 회사를 이어받았다. 그는 다임러 자동차의 엔진 기술을 접목해 1902년 로버 임페리얼(Imperial) 모터사이클을 발표했다. 이 모터사이클은 큰 인기를 끌었으나 1922년 값싼 자동차 오스틴 세븐(Austin Seven)이 출시되자 판매가 급감했다. 2년 뒤 로버는 모터사이클 생산을 중단하고, 자동차에 집중하기로 했다. 로버 모터사이클은 1903~1924년에 1만여대가 판매됐다.
자동차회사로 변신한 로버는 오스틴, 모리스 같은 대중차 메이커들과 경쟁하는 대신 고급차로 방향을 잡았다. 곧 품질이 우수하다는 소문이 퍼졌고 사랑받게 됐다. 1933년~39년 로버의 연간 생산규모는 5,000대에서 1만1,000대로 2배 이상 증가했다.
1958 로버 P5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로버는 자동차 생산을 중단하고 항공기와 탱크용 엔진을 제작했다. 종전 후 1948년에는 네바퀴굴림의 다목적차 랜드로버(Land Rover)를 출시했다. 랜드로버는 도로사정이 엉망이던 영국의 시골에서는 물론이고 지구촌 오지 곳곳에서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1950년대는 로버의 황금기였다. 그 중심에는 1958년 발표된 세단 로버 P5가 있었다. 로버 최초의 모노코크 보디에 6기통 3.0L 엔진을 탑재한 고급차였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해럴드 윌슨 수상 등 유명인사들이 P5를 애용하면서 로버는 고급차로 자리를 잡게 된다.
1998~2003 로버 75
당시 영국 자동차시장은 수많은 회사가 경쟁하는 레드오션이었다. 영국정부는 자동차산업의 경쟁력 강화라는 명목으로 합병을 장려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로버는 1966년 리랜드(Leyland)에 매각됐다. 곧이어 1968년에는 오스틴, 모리스, MG, 재규어 등이 소속된 브리티시자동차회사(British Motor Corporation)와 리랜드가 합쳐져 브리티시-리랜드 자동차회사(BLMC)로 바뀌었다. BLMC 체제에서 로버는 그룹 산하인 재규어와의 경쟁을 피하느라 제대로 된 신모델을 내지 못하고 잊혀졌으며, 1970년에 발표한 레인지로버(Range Rover)에 그 흔적을 남겼다.
정부 주도의 메이커 통폐합 정책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1975년 BLMC는 국영화되었다가 1986년 민영화되면서 로버그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후 고급차 브랜드로서 로버라는 이름이 잠시 되살아나기도 했다. 1994년 로버그룹이 BMW에 매각되고, 2006년 포드에 상표권이 넘어가면서 로버는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로버의 흔적은 현재 인도 타타그룹이 소유한 랜드로버에 남아 있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로버가 고급차 브랜드로 되살아날지는 아무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