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스턴마틴 최초의 SUV 모델명은 DBX. 애스턴마틴을 007의 늘씬한 GT 스포츠카로 기억하는 필자로서는 아쉬운 생각이 든다. 또 한가지는 모델명에 DB(데이비드 브라운)가 들어간 것이다. 애스턴마틴의 SUV는 분명 4도어 모델일텐데, DB는 어울리지 않는다.

애스턴마틴은 전통적으로 4도어 고급모델에 사용하는 이름이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라곤다(Lagonda)다. 라곤다는 1948년 애스턴마틴에 흡수되기 전 르망24시간 레이스에서 우승까지 한, 정상의 럭셔리카 회사였다. 오웬 벤틀리가 개발한 라곤다의 엔진은 애스턴마틴에 흡수된 후 DB시리즈의 심장으로 사용되어 탁월한 성능을 자랑했다.

라곤다는 특이하게 미국인이 창립한 회사다. 1859년 미국 오하이오주 스프링필드 출신의 윌버 건(Wilbur Adams Gunn, 1859~1920)은 증기기관 관련부품을 생산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이 자동차 기술에 눈떴다. 라곤다는 그의 고향 스프링필드에 흐르는 샛강인 벅(Buck Creek)의 인디언식 이름이다.

1891년 32살의 윌버 건은 아버지가 운영하는 라곤다제작사(Lagonda Manufacturing Co.)의 유럽지사 설립을 위해 영국으로 건너갔다. 밤에는 오페라가수로 낮에는 기계를 고치는 엔지니어로 생활하면서 영국 여성과 결혼해 자리를 잡았고 1906년 라곤다회사(Lagonda Company)를 세워 자동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라곤다는 1910년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 내구레이스에 출전해 우승할 정도로 내구성이 뛰어났고, 실용성도 겸비했다. 잘 나가던 회사는 제1차 세계대전 중 군수품 생산을 위해 자동차 제작을 중단하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윌버 건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그 첫 페이지를 마무리했다. 초기 라곤다의 생산량은 7,000대 정도로 추정된다.

창업자가 사망한 후 라곤다는 주식회사로 바뀌고, 메트칼페(Metcalfe) 장군의 지휘 아래 스포츠카 회사로 변신했다. 1933년 발표한 라피드(Rapide)가 1935년 르망 24시에서 우승하며 스포츠카 회사로서 큰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경제대공황과 메트칼페 장군의 사망으로 파산상태에 이른다. 1936년 롤스로이스에서 쫓겨난 앨런 굿(Alan Good)이 라곤다를 인수했다. 그는 함께 롤스로이스에서 쫓겨난 벤틀리의 창업자 월터 오웬 벤틀리를 불러들여 스포츠카 엔진 개발을 맡겼다.

1938년 벤틀리가 개발한 V12 4,480cc 181마력 엔진을 얹고 최고속도 161km/h를 내는 라곤다 V12가 발표됐다. 롤스로이스 팬텀를 앞지르는 성능으로, 평론가들로부터 최고의 차라는 찬사를 들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1940년 생산이 종료됐다. 2년간 라곤다 V12는 189대가 만들어졌다.

애스턴마틴을 인수한 데이비드 브라운(David Brown)은 벤틀리가 개발한 직렬 6기통 2,580cc DOHC 엔진이 탐나 1948년 라곤다를 인수했다. 후에 이 엔진은 본드카로 유명한 DB시리즈에 사용됐다. 브라운이 엔진을 목적으로 라곤다를 인수했기에 애스턴마틴과의 결합은 라곤다의 회생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개점휴업 상태였던 라곤다는 1961년 라피드(Rapide)라는 이름의 4도어 모델을 발표했으나 4년간 55대를 생산하는데 그쳤다. 1976년에는 초호화 4도어 세단을 라곤다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 이 차 역시 전기계통의 잦은 고장으로 외면을 당해 1989년까지 겨우 645대가 팔렸다. 이후 라곤다의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동안 라곤다는 잊혀진 이름이었다. 그러다가 21세기 들어 애스턴마틴은 4도어 세단에 라피드라는 이름을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4도어 모델 라곤다 타라프를 주문생산 방식으로 판매하고 있다. 라곤다의 활약을 기대해도 좋을 듯싶다.

1906년 윌버 건이 영국에서 라곤다 컴퍼니 창립

1910년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 내구레이스 출전

1933년 라피드 출시

1935년 라피드, 르망24시 우승

1938년 라곤다 V12 출시

1948년 애스턴마틴에 매각됨

1961년 라피드 출시

1976년 라곤다 출시

〈탑기어〉 2016년 3월호 발췌 ·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