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자동차의 저력
2017-02-08 11:17:58 글 리차드 정(ADIENT 신상품/디자인 총괄 부사장)
마굿간을 현대적인 전시장으로 리모델링한 독일 뒤셀도르프의 클래식 레미제
독일은 1880년대 후반 처음으로 내연기관 자동차를 만든 나라답게 세계 자동차 시장을 리드하고 있다. 기술과 성능 그리고 디자인까지 다른 나라 회사들이 넘보기 힘든 실력을 자랑한다. 독일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자동차 문화도 앞서 있다. 그 덕분에 속도제한 없는 아우토반을 별탈 없이 운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4개월 전부터 필자는 독일 뒤셀도르프에 거주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곳의 문화를 좀더 깊숙이 살펴볼 수 있게 됐다. 포드에 근무하던 1996년부터 수시로 드나들었지만 그때와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맥주만 해도 그렇다. 뒤셀도르프에서 30km 떨어진 곳에 포드 본사가 자리한 른이 있다. 이곳은 라거 맥주에 가까운 시(Klsch)의 원산지다. 반면 뒤셀도르프는 흑맥주 계열인 알트(Alt)로 유명하다.
두 도시는 맥주에 대한 자부심도 남다르다. 른에 가서 알트를 주문하면 바텐더의 표정이 바뀌고 심하면 “나가라”고 한다. 뒤셀도르프에서 시를 달라고 하면 종업원은 물론이고 주위사람들의 차가운 눈빛이 느껴진다. 일부 고급호텔을 빼면 상대방의 맥주를 취급하는 곳이 거의 없다. 젊었을 때 독일 포드 직원들과 마셨던 시가 생각나서 주문했다가 알게 된 사실이다.
운전자들의 자부심도 대단하다. 독일에서는 차를 몰다가 방향이 헷갈려서 주춤하면 여지없이 뒤에서 경적이 울린다. 어리버리한 사람은 운전하지 말라는 얘기다. 독일에서 차를 몬다는 자체가 책임과 의무를 다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운전면허는 따기도 힘들다. 필기시험을 통과하고 도로에서 세번(주간, 야간, 고속도로) 실기시험을 치러야 한다. 조금만 실수해도 실격이다. 따라서 5~6번 떨어지는 것은 보통이고, 10번 이상 실패하는 이들도 있다.
실기시험을 통과하면 보닛을 열고 각 부품의 기능을 설명해야 한다. 또 스페어 타이어도 교체할 줄 알아야 한다. 차에 대한 지식이 달리고, 능숙하게 다룰 수 없으면 운전하지 말라는 뜻이다.
자동차업계 종사자들은 모두 카마니아다. 임원진부터 일반직원들까지 차에 대한 지식이 상당하다. 메르세데스-벤츠나 BMW에서 회의를 하면 바로 느낄 수 있다. 차에 열정이 없는 사람은 독일 자동차업계에서는 일할 수 없다. 차를 조립하는 생산직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어떨까? 미안하지만 독일 회사의 구성원들처럼 열정을 갖고 일하는 직원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설계자부터 디자이너까지 차가 좋아서 입사했기보다는 좋은 회사여서 들어온 것 같은 이들이 상당수다.
요즘 필자는 뒤셀도르프의 클래식 레미제(Classic Remise)를 자주 간다. 클래식 자동차들이 모여있는 전시장으로 페라리, 포르쉐, 메르세데스-벤츠, BMW, 아우디, 알파로메오, 모건 등 전설적인 클래식 명차가 그득하다. 이 차들은 주로 투자회사나 개인들이 판매나 보관목적으로 맡겨 놓은 것들이다. 차 주인들이 짬날 때 차를 꺼내서 한바탕 몰고 돌아오면 전문가들이 세차와 정비를 해서 잘 보관해준다고 한다. 물론 구입희망자와 연결해주기도 한다. 클래식 레미제를 종종 방문하는 이유는 회의가 이곳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자동차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장소에서 참신한 아이디어를 짜내라고 회사에서 이곳 회의실을 임대해줬다. 멋지지 않은가?
책임자로서 불편한 점도 있다. 구성원들이 후다닥 회의를 마치고 차를 구경하고 싶어 안달을 하기 때문에 회의를 오래하기 어렵다(웃자고 하는 이야기다). 모두가 싱글벙글하면서 자동차 얘기를 풀어놓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이런 분위기에서 좋은 차가 탄생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2016년 우리나라는 2005년부터 유지해온 자동차 생산 5위 자리를 인도에 내주었다(정확한 결산 수치는 나오지 않았으나 거의 확실하다).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은 후발주자에게 맹렬히 쫓기면서, 선발주자는 따라잡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이 때문에 여기저기서 비상벨이 울리는 상황. 국내 메이커 구성원들이 좀더 분발해 좋은 차를 만들 수 있도록 열정에 불을 지필 방법은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