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자동차공장이 어디인지 아는가? 의견이 분분하지만, 현대식 자동차 공장이라는 기준으로 볼 때 한국지엠의 인천 부평공장이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공장이다.
부평공장은 1962년 조립공장으로 설립됐고, 71년에는 엔진공장이 들어섰다. 물론 당시 부평공장은 한국지엠의 것도, 전신인 대우자동차의 것도 아니었다. 새나라자동차와 신진자동차공업 등을 거쳐, 1983년 대우자동차가 주인이 됐고, 현재는 한국지엠이 부평공장을 운영 중이다.
부평공장에서는 현재 어떤 차가 생산되고 있을까? 포괄적으로 말하면 GM의 여러 자동차가 생산 중이다. 쉐보레 말리부, 캡티바, 트랙스, 아베오를 포함해 오펠 안타라와 모카, 모카의 뷰익 버전인 앙코르도 부평공장에서 만든다.
시점을 과거로 돌리면 1970~80년대를 대표하는 대우 로얄 시리즈부터, 프린스, 브로엄, 에스페로 등을 거쳐 레간자와 매그너스, 토스카, 8세대 말리부 등 굵직한 중형세단이 모두 부평공장의 작품이다(참고로 르망은 1986년 세워진 부평 1공장에서 만들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평 2공장에서 이들 자동차가 만들어졌다. 지금은 9세대 말리부와 캡티바가 부평 2공장에서 생산되고 있는데, 말리부가 실질적인 주인공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현재 한국지엠의 쉐보레 브랜드로 판매 되는 자동차 중 말리부 만큼 높은 인기를 누리는 차가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하반기까지 부평 2공장은 일주일에 2~3일밖에 가동되지 않는 등 가동률이 절반에 불과했다.
하지만 2016년 4월 신형 말리부가 출시된 직후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현재는 주야 2교대로 가동이 되고 있는데, 1년 전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라고 할 정도로 상황이 크게 바뀌었다.
한국지엠은 이렇게 자랑할 거리가 많은 부평 2공장을 널리 알리고 싶었던 게 분명하다. 우리나라 자동차산업 역사의 한축을 차지하는 곳에서 가장 핫한 중형세단이 만들어지고 있어 그럴만도 하다. 말리부가 만들어지는 부평공장을 찾은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넓고 넓은 공장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1995년부터 운영 중인 충돌시험장이다. 이곳은 부평공장에서 생산되는 쉐보레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나 러시아로 수출되는 GM 일부 차종의 안전도를 시험하는 곳이다. 시험장의 길이는 180m이고, 여러 종류의 자동차를 원하는 속도만큼 시원하게 가속시킬 수 있는 750마력짜리 모터가 구비되어 있다. 시험상황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분석하기 위해 초당 1만프레임을 찍을 수 있는 초고속 카메라도 있다.
개발 단계에 있는 자동차의 안전도를 시험하기에 앞서 안전기준을 충족할 수 있는 자동차를 연구, 개발하는 연구실도 부평공장에 자리하고 있다. 모의충돌실험인 슬레드 테스트, 충격의 정도를 기록하는 사람 모양의 인형인 더미를 보관하는 더미 웨어하우스, 에어백 작동 테스트, 차체 강성 및 충격 테스트, 보행자 안전 테스트 실험실 등 안전한 자동차를 만들겠다는 한국지엠의 의지가 반영된 실험실이 준비되어 있다.
말리부는 우리나라에서 개발된 차는 아니지만 국내 판매에 앞서 이곳 충돌시험장에서 테스트를 거쳤다. 또한, 이미 미국 고속도로안전보험협회(IIHS)의 5가지 충돌테스트 항목과 전방추돌 방지 부문에서 최고 등급을 받은 바 있다. IIHS는 세계에서 가장 까다로운 안전 테스트로 유명한 곳이다. 다시 말해 말리부의 안전성은 널리 증명이 된 셈이다.
말리부의 안전성과 더불어 부평공장내 충돌시험장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인지 한국지엠은 말리부의 충돌 테스트를 직접 눈앞에서 보여줬다. 이미 사용된 시승차나 전시차가 아닌, 부평공장에서 갓 생산된 따끈따끈한 말리부(그것도 LTZ 최상급 트림이다)가 준비됐다.
구체적인 테스트 항목은 40% 오프셋 부분 정면충돌 실험이다. 65km/h의 속도로 달리는 차의 앞측면을 부딪치는 실험으로, 한국신차안전도평가(KNCAP)에도 포함되어 있는 항목이다.
모터가 65km/h의 속도로 말리부를 끌고 왔고, 순식간에 운전석쪽 앞부분이 충돌했다. 엄청난 힘으로 구조물을 들이받은 말리부는 굉음과 함께 튕겨져 나왔다. 차체에 엄청난 충돌에너지가 전해진 것은 당연한 일. 넓은 시험장 전체에까지 에너지 일부가 전해지는 듯했다.
차체 앞쪽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구겨졌다. 반면 엔진룸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거의 부서지지 않았다. 엔진룸에 있는 크래시존이 충격을 흡수한 덕분이다. 충격이 A필러와 루프까지 고르게 분산되어 앞유리가 깨지고 A필러와 루프가 일부 찌그러지긴 했다. 하지만 나머지 부분은 정말 멀쩡했다.
에어백이 작동한 실내에 앉아 있는 더미는 무사해보였고, 각종 전자장비도 작동하고 있었다. 탑승객의 안전도를 높이기 위해선 실내의 계기판과 스티어링 휠, 대시보드, 시트 등이 1차충격을 잘 흡수해야 한다는 게 관계자의 설명.
충돌사고를 당한 차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말리부의 실내는 말짱했다. 구겨진 차체 앞부분과 달리 도어는 정상적으로 열렸다. 누군가의 말대로 말리부를 몰다 충돌사고가 났을 경우, 뒷목을 잡은 채 문을 열고 걸어 나올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고 안전해 보였다.
반파된 말리부를 살펴보면서 한국지엠 부평 2공장 이재우 부장의 설명을 들었다.
“신차 한대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평균 400~500번 테스트를 한다. 여러 나라의 안전법규를 만족시키기 위해 이 정도 테스트를 필수적으로 거친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좀더 들어봤다.
“정면충돌/부분정면충돌/측면충돌/기둥측면충돌/좌석안정성 등 충돌안전성 분야와 보행자 안전성, 제동안정성/주행전복안전성을 포함한 주행안전성 등 부문별로 3~4회 테스트를 실시하는데, 요즘은 실전 테스트에 앞서 1,000회 이상의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실시해 시간과 비용을 절약한다. 충돌 이후 자동차가 너무 많이, 그리고 2차사고를 유발하는 각도로 튕겨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설계단계에서 무게배분 등을 세심하게 고려한다.”
말리부의 안전성을 두눈으로 직접 본 뒤에는 말리부와 캡티바가 생산되고 있는 현장인 부평 2공장 내부를 살펴봤다. 시간이 많지 않은 관계로 말리부 생산라인을 우선적으로 둘러봤다.
이곳 부평 2공장 직원의 근속년수는 평균 20년이라고 한다. 레간자, 매그너스, 토스카 등 중형세단을 만들어온 기술과 경험이 인적, 물적자원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는 셈. 여기에 GM의 최신 생산 시스템이 더해져 현재 말리부의 직행률(생산공정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고 다음단계로 넘어가는 확률)은 95%에 달한다. 이는 글로벌 자동차 공장의 평균치인 90%를 넘어서는 수치다.
현재 말리부가 생산되고 있는 곳은 미국, 중국을 제외하면 부평공장이 유일하다. 그래서인지 한국지엠과 직원들의 부평공장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한동안 부침을 겪다가 말리부의 등장으로 활기를 되찾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처음, 기자를 부평공장으로 초대해 멀쩡한 말리부를 부순다고 했을 때 ‘아니, 굳이 왜?’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같은 자리에 수십년 동안 존재해왔던 역사와 유산 그리고 새로운 자동차에 대한 자부심을 널리 소개하고 싶었던 것이다. 충분히 드러내놓고 자랑할 만하다.
개인적으로 한국지엠이 좀더 많은 것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그들의 역사가 담겨 있는 현장도 좋지만, 말리부와 같은 신차가 그 대상이었으면 한다. 2017년에는 많은 사람이 기대하고 있는 새 쉐보레 모델이 출시되는 만큼, 곧 좋은 소식이 들려오리라 믿는다.
본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부평 2공장에서는 수십년 동안 다양한 자동차가 생산됐다. 대부분은 대한민국 중형세단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굵직한 모델들이다. 로얄 시리즈부터 한국지엠의 출범에 맞춰 등장한 8세대 말리부까지 그 면면을 살펴보자.
로얄 시리즈 : 1978~1991
독일 오펠 레코드를 바탕으로 대우자동차가 만든 뒷바퀴굴림 세단이다. 오랜 기간 동안 다양한 로얄 시리즈(로얄 디젤, 로얄 프린스, 로얄 XQ 등)가 등장했는데, 1978년 나온 레코드 로얄을 로얄 시리즈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1986년 전자제어 연료분사장치가 추가된 로얄 살롱 슈퍼가 등장하기도 했다. 로얄 프린스와 로얄 듀크는 로얄 시리즈의 파생모델로 볼 수 있다.
프린스 : 로얄 프린스 1983~1993 / 프린스 1991~1996 / 뉴프린스 1996~1999
로얄 시리즈에서 파생된 로얄 프린스를 시작으로, 프린스, 뉴 프린스로 이어진 대우자동차를 대표하는 뒷바퀴굴림 중형세단으로 넓은 측면 윈도와 매끈한 보닛이 눈에 띄었다. 1991년 나온 프린스는 직선 위주의 디자인을 유선형으로 바꾼 것이 가장 큰 특징. 크기는 로얄 프린스와 비슷하지만 유선형 디자인 때문에 더 커보이는 효과를 낳았다.
뉴 프린스는 프린스의 특징을 유지하면서 좀더 세련된 디자인 터치를 더했다. 큰 차이라면 테일램프 사이에 있던 번호판이 뉴 프린스에서는 범퍼 아래로 내려왔다는 점이다.
슈퍼 살롱/브로엄 : 슈퍼 살롱 1987~1994 / 슈퍼 살롱 브로엄 1991~1994 / 브로엄 1994~1996 / 뉴 브로엄 1996~1999
로얄 살롱 슈퍼의 후속으로 등장한 차가 슈퍼 살롱이다. 코너링 램프와 뒷좌석 전용 송풍구 등 고급세단이 갖춰야 할 기능을 갖추고, 중후한 디자인을 적용해 로얄 시리즈와는 또 다른 고급스러움을 내세웠다. 크롬으로 마무리한 프론트 그릴과, 한덩어리로크게 묶은 테일램프가 슈퍼 살롱/브로엄 시리즈의 가장 큰 특징이다.
브로엄은 슈퍼 살롱의 마이너 체인지 모델이다. 직선 위주였던 디자인을 유선형으로 바꾼 게 핵심이다. 동시에 최고급 트림에 붙였던 브로엄을 차 이름으로 사용하면서 하위 모델인 슈퍼 살롱은 단종됐다. 1996년 뉴 브로엄이 등장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존재감이 약해졌고, 1999년 단종됐다.
에스페로 : 1990~1997
1980년대말 현대자동차에 중형세단 시장을 빼앗긴 대우차가 시장 탈환을 위해 독자 개발한 앞바퀴굴림 세단이다. 로얄 시리즈보다 작은 준중형급 차체에 프론트 그릴을 없애고 필러를 얇게 만들어그린하우스 전체가 하나로 연결된 듯한 파격적인 디자인을 선보였다. 이는 대우자동차 디자인팀과 이탈리아 카로체리아 베르토네의 합작품이었다. 인테리어에서도 대시보드 끝에 있어야 할 송풍구가 도어 트림에 위치하는 랩어라운드 디자인을 적용하는 파격을 시도했다.
레간자 : 1997~2002
정숙성을 마케팅 포인트로 내세우며 등장한 중형세단이다. 엘레강트(elegante)와 포르자(forza)라는 이탈리아어를 합성해 소리 없이 조용하고 우아한 힘을 가진 자동차라는 뜻의 이름이다. 레간자는 피닌파리나가 디자인을 담당해 많은 관심을 받기도 했다.
공식적으로는 프린스의 후속 모델이며, 대우자동차 최초의 앞바퀴굴림 중형 세단으로 기록되고 있다. 우수한 파워트레인과 유려한 디자인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지만, 때마침 대우그룹의 부도 문제가 터지는 바람에 많은 지원을 받지 못하고 시장에서의 입지가 줄어들었다.
매그너스 : 1999~2006
레간자의 후속 모델로 개발됐지만, 한동안 함께 판매되며 시장 간섭이 일어났다. 결국 레간자는 저가 모델로 선회했고, 매그너스는 브로엄을 대체하는 고급 중형차 역할을 맡게 됐다. 레간자의 디자인을 피닌파리나가 담당했던 것과 달리 매그너스의 디자인은 이탈디자인이 담당했다. 그래서인지 대우 엠블럼을 제외하면 두 모델 간의 연관성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됐다.
매그너스는 예나 지금이나 보기 드문 직렬 6기통 2.0L 엔진을 사용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기본형을 클래식 트림과 좀 더 스포티한 디자인을 적용한 이글 트림으로 모델을 세분화는 정책을 펴기도 했다.
토스카 : 2006~2010
매그너스의 외관만 바꾼 마이너 체인지 모델이다. 그래서인지 전체적인 디자인 비율이 비슷하다. 양옆으로 치켜 올린 헤드램프나 그린하우스의 형상을 보면 두 모델의 연관성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매그너스에서 겉모습만 바뀌었기 때문에 직렬 6기통 엔진을 그대로 사용했다. 차이라면 4단 자동변속기 대신 6단 자동변속기가 적용됐다는 점. 대한민국 최초의 파워트레인 조합이었기 때문에 주목받을 만했지만, 시장에서의 반응은 그렇지 못했다. 별다른 인기를 끌지 못했던 토스카는 2010년을 다 채우고 단종됐지만, 중국 시장에서는 쉐보레 에피카라는 이름으로 2015년까지 판매됐다.
8세대 말리부: 2011~2015
토스카 이후로 한동안 명맥이 끊겼던 한국지엠의 중형세단 라인업에 북미에서 판매 중이던 8세대 말리부가 추가됐다. 말리부의 국내 데뷔 시점은 2011년 10월이다. 2010년 12월 토스카가 단종된 이후 거의 10개월만에 후속모델이 등장한 셈.
그 사이 국산 중형세단의 중심은 현대기아차로 완전히 넘어갔다. 하지만 북미 시장에서 상품성이 검증된 말리부는 국내에 반향을 일으켰고, 한국지엠의 시장 점유율을 조금이나마 높여줬다. 이후 잘나가는 것처럼 보였던 말리부는 보령 공장에서 생산된 6단 자동변속기의 품질 문제가 불거지면서 부침을 겪기도 했다. 나중에 추가된 디젤 엔진이 유로6 규정을 충족하지 못해 일찍이 단종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