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이름의 숨겨진 비밀
2017-06-13 17:02:53 글 제이슨 홍
최근의 자동차 이름을 보면 일부러 어렵게 만들기로 작정한 듯하다. 지금까지 써온 쉬운 이름을 버리고 아리송한 알파벳과 숫자조합으로 바꾸는 경우가 많다. 현대차의 제네시스 EQ900와 G80가 대표적이다. 2015년말 현대차는 프리미엄 서브 브랜드 제네시스를 출범시키고, 기존의 플래그십 에쿠스와 준대형차 제네시스의 이름을 각각 EQ900(해외는 G90)와 G80로 바꿨다.
알파벳과 숫자로 이뤄진 자동차 이름은 사실 흔하다. 특히 아우디, BMW, 메르세데스-벤츠, 렉서스 같은 프리미엄 브랜드에서 두드러진다. 그들에게는 개별 모델보다 브랜드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엔트리 모델부터 플래그십까지 공통적인 패밀리룩을 적용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실제로 프리미엄 브랜드의 자동차는 개별 모델보다는 브랜드를 보고 사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4인 가족이 탈 수 있는 중형세단이 필요하고, 스포티하게 달리고 싶다면 BMW 5시리즈를 선택하는 식이다. 고급스럽고 편안한 차를 찾는다면 메르세데스-벤츠, 정숙성과 내구성이 최우선이라면 렉서스, 안전성을 중시한다면 볼보라는 인식이 소비자의 머릿속에 심어져 있다. 브랜드를 먼저 고르고 나서 크기나 용도를 정하는 식이다.
브랜드를 최우선으로 내세우게 되면서, 모델명은 그 안에서 서열을 알리는 역할을 맡게 됐다. 프리미엄 브랜드가 알파벳 혹은 숫자 조합의 이름을 선호하는 이유다. <탑기어> 독자라면 BMW의 3, 5, 7 시리즈, 메르세데스-벤츠의 C, E, S-클래스가 어떤 포지션인지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여기에 배기량, 연료 등을 나타내는 숫자와 알파벳을 조합하면 차이름이 완성된다.
반면 대중 브랜드는 다르다. 차의 성능이나 값 대비 가치가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소비자들이 쉽게 기억할 수 있는 이름을 붙인다. 국산 중형차의 대명사가 된 현대차 쏘나타나 독일을 대표하는 소형차 폭스바겐 골프처럼 말이다.
성능을 최우선으로 하는 슈퍼카로 가면 상황은 또 달라진다. 자동차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페라리나 람보르기니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슈퍼카회사들은 브랜드의 명성을 유지하면서, 모델의 성능을 강조하는 이름을 주로 붙인다.
먼저 출력을 꼽을 수 있다. 출력은 자동차의 성능을 가장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지표로, 출력이 높을수록 성능도 높은 것은 자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모델명에 출력을 암시하는 숫자를 넣어 서열을 정하고, 동시에 성능을 강조한다. 한발 더 나아가 출력 외에 기통수나 밸브수를 표기하는 브랜드도 있다.
이쯤 되면 마니아가 아니고서는 이름에 담긴 의미를 온전히 파악하기 어렵다. 하지만 기통이 많다는 것은 대배기량에 출력이 높다는 얘기고, 밸브의 개수를 통해 고성능 엔진임을 가늠할 수 있다. 암호 해독에 있어서 고급반인 셈이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전기차는 배터리 사이즈로 모델명을 구분하는데, 배터리가 전기차의 성능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그러면 고성능차의 암호 같은 모델명을 어떻게 해석하면 되는지 난수표를 공개한다. 그 규칙을 알면 이름만 보고도 성능을 가늠할 수 있다. 초급반부터 고급반까지 차근차근 살펴보도록 하자.
초급반
Renault Sport
프랑스의 대표적인 대중차 브랜드 르노는 클리오(Clio), 메간(Megane) 같은 베스트셀러 모델을 갖고 있다. 르노에서 스포티한 모델을 전담하는 브랜드는 이름도 직관적인 르노스포트(RenaultSport), 약자로 R.S.다. 참고로 르노스포트는 포뮬러원(F1)에서 잔뼈가 굵은 엔진 공급사로, 독자적인 팀을 운영하고 있다.
르노의 고성능 모델은 뒤에 르노스포트의 약자인 R.S.가 붙는다. 그 다음에 출력을 나타내는 숫자를 붙인다. 마지막으로 그레이드를 나타내는 컵(CUP), 트로피(Trophy) 같은 이름이 따라온다. 컵이나 트로피는 동일한 파워트레인을 쓰지만 휠, 시트, 서스펜션 같은 옵션이 다르다. 클리오 R.S. 220 트로피는 220마력을 내는 클리오 스포츠 중 최상위 버전이라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메간 R.S. 265 컵은 메간 스포츠의 265마력 기본형이다. 이제 이름을 보면 어떤 성격의 차인지 감이 올 것이다.
McLaren
맥라렌의 역사는 오래됐지만 슈퍼카 제작으로는 신생 브랜드다. F1의 명문팀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빠르게 성장하는 중이며, 2022년까지 15종의 신차를 내놓는다는 ‘트랙22’(Track 22) 전략을 실천하는 중이다. 원래 맥라렌의 작명법은 들쭉날쭉 아리송했다. 때로는 절대 까먹지 않을 만큼 직관적이기도 했고, 때로는 그들의 역사를 알아야 이해가 되는 이름도 있었다.
최고의 명차로 꼽히는 맥라렌 F1은 직관적인 작명법의 대표적인 사례다. F1팀에서 나온 슈퍼카 이름이 F1인데 누가 잊겠는가. 난해한 이름의 대표는 오늘날 맥라렌 오토모티브의 성장을 이끈 MP4-12C다. 2011년 출시된 이 차는 F1 혈통을 강조하기 위해 경주용차 섀시 코드 MP4에서 이름을 가져왔다. MP4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선 맥라렌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맥라렌팀은 뉴질랜드 출신의 레이서 브루스 맥라렌이 1963년 설립했다. 1970년 맥라렌이 경주차 시험 중 사망하면서 창단멤버인 테디 메이어가 이어받았고, 1980년 프로젝트4 레이싱팀의 운영자 론 데니스가 인수했다. 이후 ‘맥라렌 프로젝트4’(McLaren Project 4)를 줄인 MP4 섀시 코드를 사용, MP4-1을 시작으로 2016년 MP4-31이 등장했다. 이런 작명법은 맥라렌의 첫 양산 슈퍼카 MP4-12C에 그대로 적용됐다. MP4는 F1 혈통에서, 12는 맥라렌 자체의 성능 척도에서, C는 카본 모노코크 섀시를 강조하기 위해 붙였다. MP4-12C가 시장에 안착하자 맥라렌은 2012년 차이름에서 MP4를 떼고 12C로 줄였다. 그 후에 나온 650S부터는 내부적인 성능 척도를 출력으로 바꾸었다.
뒤에 붙는 알파벳은 모델의 특징을 나타낸다. 앞에서 설명한 C, 스포츠카에 널리 쓰이는 S 외에 공력특성을 가다듬어 길이를 늘인 LT(Long Tail)가 있다. 르망이나 GT경기에 출전하는 경주차 스펙에는 LM, GT 등이 붙는다. 즉 720S는 720마력을 내는 슈퍼카를, 675LT는 675마력을 내는 롱테일 버전을 의미한다.
중급반
Lamborghini
람보르기니는 페라리와 쌍벽을 이루는 이탈리아의 슈퍼카 브랜드다. 창업자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기계공 출신으로, 트랙터회사를 운영했다. 제2차세계대전 후 활발한 복구사업으로 트랙터가 불티나게 팔리면서 부자가 된 페루치오는 여러대의 스포츠카를 사들였는데, 페라리도 그중 하나였다.
엔지니어의 관점에서 페라리의 단점을 지적하자 엔초 페라리가 “트랙터나 만드는 사람이 스포츠카에 대해 뭘 아느냐”고 모욕을 준 것이 스포츠카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는 일화는 영화에도 나올 만큼 유명하다. 설욕을 위해 ‘무조건 페라리와 다르게, 무조건 페라리보다 좋게’를 고집했다는 창업주처럼 람보르기니의 작명법 또한 열정적이다. 날렵한 명마를 문장으로 삼은 페라리와 대비되게 우직한 황소를 심벌로 쓰며, 대부분의 모델에 전설적인 투우소의 이름을 쓴다.
무르시엘라고(Murcielago), 가야르도(Gallardo), 우라칸(Huracan), 아벤타도르(Aventador) 등은 투우장에서 이름을 떨친 황소의 이름이다. 각 모델의 특성을 강조하면서 황소의 이미지를 통해 강렬한 이미지를 뒷받침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다. 모델명 뒤에 정체불명의 알파벳과 숫자가 줄줄이 붙는다. ‘무르시엘라고 LP670-4’ 같은 식이다. 숫자 670은 맥라렌과 같이 최고출력이다. LP는 ‘세로방향 뒤쪽’(Longitudinal Posterior)을 뜻한다. 마지막에 붙는 2 또는 4는 뒷바퀴굴림이나 네바퀴굴림 같은 구동방식을 의미한다. 따라서 무르시엘라고 LP670-4는 ‘670마력 엔진을 운전자 뒤쪽에 세로배치하고, 네바퀴를 굴리는 무르시엘라고’라는 뜻이다.
이름의 의미를 알면 차의 기본정보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우라칸 LP580-2도 ‘580마력 엔진을 운전자 뒤쪽에 세로배치하고 뒷바퀴를 굴리는 우라칸’이다. 람보르기니에서 SUV가 나온다면 ‘590마력 엔진을 운전자 앞쪽(Anterior)에 세로배치하고 네바퀴를 굴리는 우루스(Urus)’란 뜻에서 ‘우루스 LA590-4’가 되지 않을까?
Tesla
전기차 브랜드 테슬라는 세단인 모델S, SUV인 모델X를 갖고 있다. 세단의 S, 네바퀴굴림이나 크로스컨트리 (험로)의 의미로 SUV에 흔히 쓰이는 X를 붙인 것이다. 별로 어렵지 않은 테슬라를 중급반에 올려놓은 이유는 뒤에 붙은 숫자와 알파벳이 생소하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약간의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내연기관 자동차의 성능이 출력에 달렸다면, 전기차의 성능은 배터리가 결정한다. 테슬라는 모델별 성능을 암시하는 척도로 배터리 사이즈를 채택했다. 배터리 용량을 의미하는 숫자 앞뒤에 P와 D를 붙였다.
우선 쉬운 것부터. P는 고성능을 의미하는 퍼포먼스(performance)의 약자다. 따라서 앞에 P가 있으면 고성능 모델이다. 일반형과 달리 고성능 모터와 ‘루디크러스’(Ludicrous, 터무니없는) 같은 초고성능 운전 모드가 달린다. P가 붙은 고성능 모델S의 0→100km/h 가속성능은 웬만한 슈퍼카를 뛰어넘는 2.7초다.
뒤에 붙는 D는 모터가 두개(dual)라는 의미다. 뒤차축에 하나, 앞차축에 하나가 달려 네바퀴를 굴린다. 참고로 기계적인 연결이 쉽지 않아 엔진을 두개 단 차는 거의 없지만 전기모터는 개수를 쉽게 늘릴 수 있어 바퀴마다 모터를 단 전기차도 있다. 모델S P100D에 담긴 의미는 ‘100kWh 배터리와 2개의 모터로 네바퀴를 굴리는 고성능 세단’이다. 모델S 60는 60kWh 용량의 배터리에 한개의 모터로 뒷바퀴를 굴린다.
고급반
Ferrari
페라리는 이름만으로도 자동차 마니아의 심금을 울리는 브랜드지만 작명법은 진짜 형편없다. 역사도 출력이나 배기량도 일관성이 없다. 암호가 따로 없다. 페라리의 작명법이 고급반에 속한 이유다. 몇가지 의미를 조합해 입에 착 달라붙는 이름을 쓰기 때문에 그냥 외우면 된다. 자꾸 헛갈린다면 각각의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보자.
최근 나온 페라리 중 가장 인기모델이었던 458 이탈리아는 4.5L 8기통 엔진이 얹혔다는 의미다. 458 이탈리아의 이전 세대인 F430는 페라리를 의미하는 F 뒤에 배기량을 의미하는 430을 붙였다. F430의 전신인 360도 마찬가지로 3.6L였다. 그러면 주로 배기량을 쓰느냐, 그건 아니다. 458의 후속인 488는 4.8L 8기통이 아니라 3.9L 터보 엔진이고, 숫자는 기통당 배기량 488cc를 나타낸다. 페라리는 그때그때 마음 내키는 대로 이름을 짓는 것 같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F360의 이전 모델인 전설의 F355는 배기량이 3.5L다. 왜 350가 아니고 355냐고? 3.5L 엔진에 기통당 밸브가 5개여서 그렇다. F12는 12기통 모델이어서 F12다. 뒤쪽에 이탈리아어로 쿠페를 의미하는 ‘베를리네타’(Berlinetta)를 붙이기도 한다. 페라리에서 자주 쓰는 GTB는 ‘쿠페형 고성능 장거리 여행용 자동차’(Gran Turismo Berlinetta)를 뜻한다.
F12의 후속인 812 슈퍼패스트(Superfast)는 최고출력 800마력에 12기통이어서 812다. 역사상 가장 높은 출력을 강조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이쯤 되면 페라리에는 고유의 작명법이 없다고 봐야 한다. 이름에 담긴 의미와 그들이 강조하는 내용을 알아보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