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WRC(World Rally Championship)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WRC는 국제자동차연맹(FIA)이 주관하는 랠리 레이스 중 최상위 클래스 경기다. 일반도로를 무대로 열리는 F1이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WRC는 한해 동안 유럽, 오세아니아, 북·중미, 남미를 돌며 13회 경기를 치른다. 멕시코의 찌는 듯한 더위부터 스웨덴의 영하 25℃ 추위까지 기후조건이 변화무쌍하기에 세계에서 가장 혹독한 모터스포츠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따라서 경주차는 어떤 험난한 환경에서도 능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현대자동차의 현대모터스포츠(Hyundai Motorsport)팀은 2014년부터 이 대회에 출전하고 있다. 경주차는 i20 WRC. 지난 시즌 종합2위를 했고, 출전 4년차인 올해는 프랑스와 아르헨티나, 폴란드 랠리에서 3차례 포디움 정상을 따내 제조사 부문 1위를 달리고 있다.
2017년 WRC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승승장구하던 폭스바겐이 철수하고 셀리카(Celica)로 1990년대를 주름잡았던 토요타가 돌아왔다. 2008년부터 2012년까지 5연속 종합우승을 차지한 시트로엥도 완전히 복귀했다. 제한출력이 380마력으로 높아지는 등 경주차 규정도 바뀌어, 그 어느 때보다 흥미진진하다.
WRC에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차들이 출전한다. 연간 2만5,000대 이상 생산되는 차에 출전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가혹한 환경과 험난한 코스를 견딜 수 있도록 각 메이커들은 기술력을 총동원해 일반차를 ‘랠리 머신’으로 탈바꿈시킨다. 랠리카의 성적이 좋으면 당연히 같은 브랜드의 차를 모는 운전자들도 자부심을 느끼게 된다. WRC가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많은 경주차들이 WRC 무대를 거쳐갔다. 그중 일부는 자동차 역사의 전설로 남아 있다. WRC에서 맹활약을 펼쳤던 전설적인 랠리카 10대를 뽑아봤다.
10 Alpine-Renault A110 (1973)
우승 6회, 매뉴팩처러 종합우승 1회
최근 르노의 프리미엄 스포츠카 브랜드로 화려하게 부활한 알핀은 1950년대부터 르노 엔진을 사용해 경주차를 만들던 회사다. A110은 1961년 생산을 시작했다(조만간 같은 이름을 쓰는 미드십 경량 스포츠카가 나올 예정이다).
700kg 남짓의 가벼운 차체를 지녀 작은 엔진으로도 좋은 성능을 냈다. 포르쉐 911처럼 엔진을 뒤에 얹고 뒷바퀴를 굴렸다. 특유의 볼륨감 넘치는 디자인으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알핀은 WRC가 생기기 전부터 몬테카를로 랠리 등 여러 경기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뒀다. 1960년대의 차지만 가벼운 차체에 140마력을 내는 1.6L 엔진을 얹고 1970년대 초반까지 랠리 무대에서 활약했다. 1973년 데뷔전에서 6차례 우승하고, 매뉴팩처러 타이틀도 차지했다.
09 Peugeot 205 Turbo16 (1984~1986)
우승 16회, 매뉴팩처러 종합우승 2회, 드라이버 종합우승 2회
푸조 205 T16은 랠리의 황금기로 불렸던 그룹B 시절에 활약한 경주차다. 1982년 생긴 그룹B는 지금처럼 양산차 베이스가 아나라 레이스 전용 머신들이 출전했다. 연간 200대를 만들면 출전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에, 규정을 만족시키기 위한 한정판 모델들이 종종 출시됐다. 1984년 중반부터 그룹B에 출전한 푸조 205 T16도 이런 케이스다.
평범한 해치백 차체에 엔진을 뒤에 얹고 네바퀴굴림 구동계를 갖춘 이 차는 1985년과 1986년 그룹B를 지배하며 16회 우승, 2년 연속 매뉴팩처러 및 드라이버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08 Ford Escort RS (1973~1998)
우승 36회, 매뉴팩처러 종합우승 1회, 드라이버 종합우승 2회
포드는 초창기부터 빠짐없이 WRC에 출전하고 있는 터줏대감이다. 올해도 M-스포츠팀의 포드 피에스타 RS가 선두를 달리고 있다.
포드의 WRC 역사는 에스코트에서 시작된다. 1968년 데뷔한 초대 에스코트도 각종 자동차경기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뒀다. 1세대 에스코트의 특징을 물려받은 2세대는 1974년 데뷔했다. 개선된 차체에 코스워스(Cosworth)가 손본 1.8L 엔진을 얹은 에스코트 RS1800는 1970년대 후반 들어 두각을 나타냈고 1977년부터 꾸준히 좋은 성적을 올렸다.
에스코트 RS로 포드는 1979년 매뉴팩처러와 드라이버 종합우승을 싹쓸이하고, 1981년에도 드라이버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에스코트는 98년을 끝으로 은퇴하고 포커스와 피에스타가 차례로 뒤를 이었다.
07 Fiat 131 Abarth (1975~1981)
우승 20회, 매뉴팩처러 종합우승 3회, 드라이버 종합우승 2회
피아트 131은 1974년부터 1984년까지 150만대가 넘게 팔린, 이탈리아의 대중차다. 131의 공장이 있던 지역의 이름을 따 ‘미라피오리’(Mirafiori)라는 애칭으로 불릴 정도로 이탈리아 국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WRC 우승을 위해 작심하고 만든 131 아바스는 1톤이 안되는 가벼운 차체에 240마력 이상을 내는 2.0L 엔진을 얹었다. 또한 우승을 위해 마쿠 알렌, 발터 뢰를, 미셸 무통 같은 유명한 드라이버들을 데려왔다. 그 결과 5년 동안 우승 20회, 매뉴팩처러 종합우승 3회, 드라이버 종합우승 2회의 화려한 전적을 쌓았다.
06 Mitsubishi Lancer Evolution (1993~2003)
우승 27회, 매뉴팩처러 종합우승 1회, 드라이버 종합우승 4회
WRC 초창기부터 랠리의 황금기로 불린 그룹B 시절까지 유럽 브랜드의 독무대였다면, 1990년대는 일본 브랜드가 지배했다. 일본의 전설적인 랠리카 중 가장 먼저 소개할 차는 ‘란에보’란 애칭으로 매우 유명한 미쓰비시 랜서 에볼루션이다.
‘에볼루션’이란 이름은 WRC 그룹A의 흔적이다. WRC는 양산차만 출전할 수 있지만 특별 버전은 연간 500대만 만들면 출전자격이 주어졌다. 이 규정은 메이커들이 전략적인 스포츠카를 출시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500대를 맞추기 위해 출시된 차엔 에볼루션(Evolution)이란 단어가 많이 붙는다. BMW M3 스포츠 에볼루션, 미쓰비시 랜서 에볼루션 등이 그것이다.
랠리를 위해 네바퀴굴림 기술을 갈고 닦은 미쓰비시는 ‘란에보’와 토미 마키넨(Tommy Makinen)이란 걸출한 드라이버의 조합으로 1996년부터 1999년까지 4연속 드라이버 종합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05 Toyota Celica (1988~1996)
우승 30회, 매뉴팩처러 종합우승 2회, 드라이버 종합우승 4회
토요타, 미쓰비시, 스바루로 대표되는 일본 브랜드는 1991년을 빼고 1990년부터 1999년까지 9년 동안 종합우승을 나눠가졌다. 포문을 연 주인공이 토요타의 셀리카다. 자동차 마니아들에겐 심심한 차를 만드는 회사로 각인돼 있지만, 토요타만큼 다양한 모터스포츠에 도전해온 메이커도 드물다. 1988년 WRC에 데뷔한 셀리카는 이듬해 우승을 차지하며 성공의 서막을 열었다.
카를로스 사인츠(Carlos Sainz), 유하 칸쿠넨(Juha Kankkunen) 등 당대의 유명 랠리스트들이 셀리카와 함께 4차례나 드라이버 종합우승을 가져갔다. 란치아 델타와 접전을 벌였던 셀리카는 1993년 란치아가 WRC에서 철수한 이후 일본 메이커로는 처음으로 매뉴팩처러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04 Subaru Impreza (1993~2008)
우승 46회, 매뉴팩처러 종합우승 3회, 드라이버 종합우승 3회
WRC를 통해 마케팅 효과를 가장 톡톡히 본 브랜드는 스바루다. 자동차 마니아라면 누구나 새파란 차체에 노란색 별이 새겨진 스바루 랠리카를 기억할 것이다. 회사 설립 당시부터 수평대향 엔진과 대칭형 네바퀴굴림 시스템에 집중해온 만큼, 랠리는 기술력을 증명할 수 있는 좋은 무대가 되었다.
스바루는 월드랠리팀을 창단해 1992년 레거시(Legacy)로 WRC에 도전장을 냈다. 1993년 신형 임프레자는 데뷔전에서 우승을 차지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미쓰비시에 토미 마키넨이 있다면 스바루에는 콜린 맥레이(Colin McRae)가 있었다.
임프레자는 맥레이와 함께 1995년 드라이버 종합우승과 매뉴팩처러 종합우승을 가져갔고, 이후 1997년까지 3연속 매뉴팩처러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미쓰비시와 토요타가 철수한 후에도 WRC 무대를 지킨 스바루는 2001년과 2003년 드라이버 종합 우승기록을 추가하는 등 일본 메이커 중 가장 뛰어난 성과를 올렸다.
03 Audi Quattro (1981~1987)
우승 23회, 매뉴팩처러 종합우승 2회, 드라이버 종합우승 2회
오늘날 아우디를 네바퀴굴림차의 명가로 자리잡게 해준 주인공이 바로 콰트로다. 지금은 콰트로가 아우디의 네바퀴굴림 명칭이지만 1980년 발표 당시엔 모델명이었다. 최초의 콰트로라는 의미에서 ‘우어-콰트로’(Ur-Quattro)로 불리기도 한다.
앞에서 소개한 차들보다 우승횟수가 적은 콰트로를 3위에 올린 이유는 짧은 기간 동안 강렬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콰트로가 활동했던 그룹B는 사실상 무제한 클래스로, 500마력이 넘는 괴물들이 출전했다.
험한 도로를 초고성능 경주차가 질주하는 진풍경으로 많은 팬을 끌어모았지만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사고가 속출해 1987년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6년 남짓한 기간이었기에 우승횟수는 부족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1톤 정도 되는 차체에 600마력 엔진을 얹고, 0→100km/h 가속을 3초에 끊는 주행실력은 WRC의 전설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02 Lancia Stratos HF (1973~1981)
우승 18회, 매뉴팩처러 종합우승 3회, 드라이버 종합우승 1회
대망의 1, 2위는 이탈리아 란치아에서 만든 모델이다. 란치아는 1993년 WRC에서 철수할 때까지 스트라토스 HF와 랠리 037, 델타 시리즈 등으로 총 10회의 매뉴팩처러 종합우승을 거머쥐었다. 2000년대 들어 시트로엥이 WRC를 지배했지만, 지금껏 이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란치아의 전설을 처음 써내려간 주인공은 스트라토스다. 스트라토스는 랠리카의 상식을 모두 뒤엎는다. WRC 석권을 위해 개발한 섀시는 놀랍게도 네바퀴굴림이 아닌 뒷바퀴굴림 방식이었다. 엔진은 페라리 디노에서 가져온 V6였다.
베르토네가 디자인한 쐐기형 차체는 지금 봐도 신선하다. 우승을 목표로 만든 차인 만큼 성과도 확실했다. 정규 출전한 첫해부터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그후 1977년까지 종합우승을 놓치지 않았다. 워낙 성능이 뛰어나 개인팀에게도 인기가 높았다.
모델 체인지 없이 10년 가까이 WRC에서 활동한 스트라토스는 차에 얽힌 스토리나 성능, 독특한 디자인 등에서 WRC의 전설이 될 만하다.
01 Lancia Delta HF (1987~1993)
우승 46회, 매뉴팩처러 종합우승 6회, 드라이버 종합우승 4회
대망의 1위는 란치아 델타 HF다. 란치아에 WRC 매뉴팩처러 종합우승 최다기록을 안겨준 주인공이다. 마티니 라이버리가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델타는 7년 동안 46회의 우승을 차지해 ‘랠리의 여왕’(Queen of the Rally)으로 불리기도 했다. 아직 깨지지 않는 ‘6연속 매뉴팩처러 종합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았고, 드라이버 종합우승 4회 기록도 갖고 있다.
델타 HF는 네바퀴굴림 구동계를 얹고 2.0L 터보 엔진을 달았다. 규정에 맞춰 출력을 300마력 수준으로 제한했지만, 실제로는 400마력 가까이 냈다는 얘기도 있다. 서스펜션은 앞뒤 맥퍼슨 스트럿, 변속기는 5단 또는 6단 수동을 물렸다. 네바퀴 굴림 구동계의 경우, 앞쪽엔 오픈 디퍼렌셜, 뒤는 토센 방식을 썼다. 참고로 양산형 델타 HF는 1.6L 엔진에 앞바퀴굴림 구동계를 얹고 1983년 데뷔했다.
란치아는 1992년 공식적으로 WRC에서 철수했다. 마지막 출전한 델타 HF 인테그랄레 에볼루치오네(Evoluzione)는 이탈리아 국립 자동차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1993년부터는 개인팀들이 델타로 출전하긴 했지만 눈에 띄는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화려한 랠리의 전설을 써온 란치아가 최근 본고장에서 퇴출설이 나돌 정도로 고전하고 있다고 하니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