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바람을 맨몸으로 가르고 있다. 잘 벼린 도끼날처럼 겨울 대기를 둘로 쪼개는 중이다. 코너는 쉬지 않고 다가온다. 다운시프트, 스티어링, 가속, 업시프트, 가속, 다운시프트, 스티어링….자동차나 운전자나 분주한 반복 동작에도 도통 지치는 기색이 없다. 코너 하나하나가 새로웠다. 곡률과 고저차, 속도와 조향각에 따라 소리도 패기도 스릴도 완전히 달랐다.서늘한 탄소섬유 패들시프트를 손끝으로 당기는 순간의 결연함, 끊어질 듯 팽팽하던 선율이 짐짓 누그러질 때 긴장감, 음조가 탄성적으로 치솟는 찰나의 율동감, 그리고 끝없는 반복…. 굽잇길을 좌로 우로 돌면서 쉬지 않고 메아리를 남겼다. 겨울잠 자던 짐승들도 두려워 떨었을 터다.굶주린 포식자처럼 쉬지 않고 포효했다.오늘 페라리 458 스파이더 키를 넘겨받았다.
조용한 대관식
“이제야 알겠어요.” 남자가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슈퍼카가 왜들 그렇게 주차장에만 세워져 있었는지. 람보르기니 타던 사람이 왜 포르쉐로 되돌아가는지 이해가 돼요.” 슈퍼카를 타다 보면 가장으로서 중년으로서 알 수 없는 비애감이 든다고 했다. 불편한 승차감과 괴팍한 성미 탓에 가족과 함께 탈 수도 없는 차를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갖고 있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고.
“게다가 마음껏 달려보지도 못해요.” 그는 때와 장소를 가려 타야 했다고 말했다. “아는 길로만 달리고 믿을만한 주차공간에만 세웠어요. 결국 익숙한 호텔이나 매일 가는 스포츠센터, 사우나가 전부죠.” 말끝에 깊은 한숨이 어려있었다. “주유소에 들르면 직원이 묻고는 해요. 시속 몇km나 나가나, 얼마까지 밟아봤나…. 9000rpm까지 올라가는 슈퍼카를 3000rpm 아래로만 타고 있으니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주머니를 뒤적이던 남자가 차 키를 건네줬다. 큰돈 주고 산 차를 주차장에만 세워두기 아까워서일지도 모른다. 현대 공학기술의 정점이자, 모터스포츠 열정의 결정체를 마실용 이동수단으로 전락시키기 아쉬웠을 수도 있다. 작은 열쇠 하나 받아 들었을 뿐인데 묵직한 감동이 밀려왔다.왕관이라도 넘겨받은 듯 엄숙한 기분마저 들었다. 458은 슈퍼히어로 같은 차였다. 침대 머리맡에 사진을 붙여두고 상상만하던 자동차 가운데 하나였다. 오너의 무거운 마음을 헤아리느라 잠시 숙연해졌지만 막상 차 앞에 서서는 장난감 선물 받은 아이처럼 들뜨고 말았던 이유다.
페라리의 관능은 시간에 스러지지 않는다. 경매가 기록만 봐도 알 수 있다. 458은 이미 한 세대 전 모델이지만 한 시대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페라리 가운데 하나다. 스파이더라면 더더욱 매료되지 않을 수 없다. 피보다 붉은 드레스 위로 육감적인 보디라인이 비쳤다. 매섭게 치켜뜬 두 눈, 한쪽 볼에서 다른 쪽 볼까지 길게 벌린 입, 드라마틱하게 솟은 앞뒤 펜더에 한참 동안 시선을 빼앗겼다. 주체하기 힘든 매혹과 쉽사리 다가가기 어려운 기품이 나지막한 차체에 가득 담겨있었다. 커다란 리어윙처럼 눈에 띄는 장비가 없어서, 매끈한 차체만으로 날카롭게 공기를 가르기 때문에 더더욱 우아하고 순수한 인상을 남겼다.
그 모습 자체로 달리는 모습이 그려졌다. 악마의 미소를 띤 채 하늘을 껴안는 상상을 했다. 도전적인 눈매 안쪽 작은 통풍구를 들여다봤다. 이곳으로 들어간 공기는 브레이크 열기를 식힌 다음 앞바퀴 주변 와류를 정리하면서 빠져나간다. 그릴을 가로로 가르는 앞쪽 윙은 저속에서는 라디에이터로 공기를 밀어 넣고, 고속에서는 다운포스를 높인다. 길이4.5m 안에 담긴 공기역학 기술만 헤아려도 공학 논문집 한 권은 족히 나올법하다. 더 지체하지 않고 차에 올라탔다.
샤헤일루
깊고 단단한 시트에 몸을 묻었다. 오로지 운전자를 위해, 오직 달리기 위해 만든 실내를 잠시 둘러봤다. 더는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빨간 시동버튼이 매섭게 노려보고 있어서다. 어쩌지 못하고 키를 돌렸다. 계기판에 불이 들어왔다. 시동버튼을 지그시 누르자, 공이가 뇌관을 때리고 4497cc V8이 격발했다. 엔진이 열이 오르기를 기다리면서 지붕을 열었다. 등이 깊게 파인 빨간 드레스를 상상하면서. 하지만 458 스파이더는 잡념을 오래 허락하지 않았다. 불과 14초 만에 575 슈퍼아메리카로부터 영감을 얻은 하드톱 루프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완벽한 쿠페에서 완연한 컨버터블로 그렇게 탈바꿈했다.
루프를 접으면 뒷유리는 난기류를 최소화하는 높이로 내려간다. 헤드레스트 뒤에 우뚝 솟은 롤오버 프로텍션은 후방 시야 70%를 가리지만, 운전자머리를 보호하고 실내로 들이치려는 공기를 차체 뒤로 뽑아내는 데 일조한다. 덕분에 지붕을 열어서 늘어나는 공기저항계수는 0.005에 불과하다. 심호흡하고 오른손으로 패들시프트를 당겼다. 기어가 ‘N’에서 ‘1’로 바뀌었다. 그런데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도 차가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작은 동작 하나까지 운전자에게 맡기겠다는 듯 발사대기 상태를 유지했다.긴장감이 높아졌다. 가속페달에 발을 올렸다.
458 스파이더는 모든 주도권을 운전자에게 준다. 하지만 정작 게임의 주인은 자동차인 듯했다. 태엽을 있는 대로 감은 장난감 자동차처럼 가벼운 페달 조작에도 탄력적으로 반응했다. 작은 몸짓 하나하나 지배하는 데 익숙해질수록, 찰나의 판단조차 차에 조종당하는 기분이었다.458 스파이더와 운전자는 그토록 긴밀했다. 노면 상황, 속도, 엔진 열기,타이어 접지, 앞바퀴 각도를 비롯한 모든 주행 정보를 공유했다.
하이드&하이드
시뮬레이터로는 결코 구현할 수 없다. 작은 물리적 입력이 거의 즉시 엄청난 감각적 자극으로 돌아온다. 스파이더라서, 외부 세계와 운전자가 더 밀접해서, 물리적 피드백이 더 강력했다. 자동차, 표지판, 터널 벽… 온갖 지형지물에 반사된 소리가 각각 다른 파동으로 운전석에 들이쳤다. 바람은 쉬지 않고 이마를 스쳤고 V8의 비명은 귀가 얼얼하도록 선명했다.
페라리는 458 스파이더를 개발할 때 458 이탈리아의 스프링과 안티롤바 세팅을 그대로 옮겨왔다. 댐퍼를 약간 부드럽게 조정했고 청각적 만족을 높이기 위해 V8 사운드를 조금 더 생생하게 매만졌다. 보디 타입 변경과 다양한 기계적 조율 결과 잃은 부분은 거의 없었다. 최고시속은 불과 5km 느리고, 0→시속 100km 가속시간은 겨우 0.1초 늦다. 피오라노 테스트 트랙 랩타임 기록은 0.5초 차이다.
도심을 벗어나 한적한 교외 길을 달렸다. 458 스파이더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순종적이다. 조향은 놀라울 정도로 날카롭고 신속하다. 롤이 거의 없고 스티어링휠 입력값에 즉각 반응한다. 쿠페로부터 물려받은 다부진 하체 덕분이다. 마침 기온이 영상이었고 윈터타이어를 낀 덕에 접지력도 충분했다. 자신 있게 오른발에 힘을 실었다.
칼바람을 맨몸으로 갈랐다. 코너는 쉬지 않고 다가왔다. 다운시프트, 스티어링, 가속, 업시프트, 가속, 다운시프트, 스티어링…. 자동차나 운전자나 분주한 반복 동작에 지친 기색이 없었다. F1 드라이버라도 됐다고 착각해서가 아니었다. 단지 다음 코너가 궁금했고 그 손짓을 따라 이끌려갈 뿐이었다. 코너는 하나하나 새로웠다. 곡률과 고저차에 따라 속도와 조향각에 따라 소리도 패기도 스릴도 완전히 달랐다.
V8의 혈기와 오른발의 끈기, 어느 쪽이 이길지 알 수 없었다. 가속페달을 힘껏 짓밟을수록 차는 더 길길이 날뛰었다. 속도계가 0을 떠나 100에 도착하는 동안 3.4초가 지났다. 가속페달을 그대로 더 밟았다. 10초 남짓 차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풍경이 흘러갔다. 태코미터 바늘에 서린열기는 좀처럼 누그러질 기미가 없었다. 앞유리로 쏟아지는 전경에 깊이 빠져들수록 시공간 개념은 모호해졌다.
추위 때문에 손이 덜덜 떨렸다. 루프를 닫았다. 주행 그 자체에 조금 더 집중할 수 있었을 뿐 주행감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선량한 지킬 박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지붕을 펼치건 접건 사악한 하이드가 운전자를 지배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잔혹한 몸짓이 더없이 순수하게 여겨졌다. 더 빠르게 달릴수록 마음의 찌든 때가 깨끗이 벗겨졌다. 458 스파이더는 주행의 모든 순간 운전자와 함께 생동한다. 지평선을 향해 돌진하는 기분은 생명의 근원으로 파고드는 감각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근사한 풍경 앞에 차를 세워두고 인스타그램에 올릴 인증사진을 남겼다. SNS에 자랑하기에 이보다 완벽한 차는 없다. 문득 오너와 시승자의 마음이 얼마나 다른지 깨달았다. 남자는 갈림길에 서 있었다. 다루기 힘들고 눈이 튀어나오게 비싼 이탈리아 슈퍼카를 계속 타도 괜찮을지 고민했다. 슈퍼카 오너에게 늘 영광스러운 일상만 있지는 않나 보다.
다시 차에 올라타고 키를 꽂았다. 계기판에 불이 들어왔다. “하지만 결국 대체할 차가 없더라고요.” 남자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시동버튼을 지그시 눌렀다. 공이가 뇌관을 때리고 4497cc V8이 격발했다. “달리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 차 아니면 안 되겠구나.’ 단 한순간일지라도, 그런 확신이 생기면 회의감도 다 날아가요.” 비로소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페라리는, 458은 그런 순간을 위해 타는 차였다.
FERRARI 458 SPIDER
엔진 V8 4499cc, RWD, 565마력, 55.0kg·m
연비 5.6km/L, 324g/km
성능 0→100km/h 3.4초,320km/h
무게 1585kg
< 페라리 오너가 알려준 세 가지 놀라운 사실 >
1. 스토퍼 때문에 주차가 힘들다?
458 스파이더는 지상고가 낮다. 뒷면에 예리한 디퓨저도 있다. 일반 승용차처럼 후면 주차를 하면 디퓨저가 스토퍼와 부딪히기 십상. 일정거리를 떼고 주차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앞툭튀! 앞범퍼가 주차라인 밖으로 툭 튀어나와서 혹시나 다른 차에 부딪힐까 조마조마하다.
2. 배터리 컨디셔너가 반년 동안 소비한 전력량이 고작 1.5kWh?
슈퍼카는 배터리 용량이 적고 주행빈도가 낮다.배터리 방전을 예방하고 최상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서 주행하지 않을 때 배터리 컨디셔너를 꽂아주어야 한다. 아파트에 사는 슈퍼카 오너는
공용전기를 사용하면 이웃에게 누가 될까 봐 별도 주차장 가구별 창고에 계량기를 달고 컨디셔너를 사용 중인데 2018년 7월부터 2019년 1월까지 사용량은 불과 1.5kWh.기본요금 910원을 제외한 전력량 요금은 반년간 140원 수준이다.
3. 의외로 시내주행이 쉽고 편하다?
빨간색 페라리를 몰고 다니면 주변 운전자들의 시선을 많이 받기 마련이다. 때로는 커다란 배기음과 강렬한 외모 탓에 다른 운전자들이 긴장하기도 한다. 앞차와 거리를 널찍이 두고 다닐 때 앞으로 끼어들려다가 괜히 마음을 바꿔 진행 차선을 유지하는 차도 적지 않고, 차선변경을 하면 양보도 쉽게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