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아카타마 사막에서 보낸 밤, 별들이 남쪽 하늘을 일주하는 모습
순간이다. 별빛이 우리 망막에 닿기까지, 그 수만 년 세월에 비하면 우리 밤은 찰나다. 그 순간을 따라, 별빛을 좇아 전 세계를 달리는 청춘이 있다. 두 해 전, 미국을 횡단하는 30대 부부를 알았고 오랜만에 안부를 물었다. 그들은 지금 포르투갈 포르투를 달린다. 오리온자리가 어느 하늘엔가 드리운 밤, 윤진영 신선아 부부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들은 2년 반 여행이 청춘이 발하는 작은 별빛이라 말했다.
신선아 윤진영 부부. 캐나다 밴푸국립공원에서
두 사람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났나?
윤진영 별 보다가 만났다. 대학교 천문동아리에서 처음 봤고 5년쯤 알고 지내다가 연애를 시작했다. 함께 천문대를 찾아다니다가 연인관계로 발전했다. 그때 우리는 매일 술 마시고 별 보고 그렇게 살았다. 별 보다 만나 하는 결혼이다 보니 주례도 자주 가던 천문대 관장님이 맡아주셨다. 지금은 별을 보기 위해 2년 넘게 자동차여행 중이다.
직장을 관두고 긴 여행을 떠나기 쉽지 않았을 듯하다
신선아 어렸을 때부터 집에 여행 책이 많았다. 아빠가 사서 모은 책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세계여행을 꿈꾸며 자랐다. 직장생활 10년차에 찾아온 정신적 위기를 여행으로 극복하기로 했다. 당시 나는 흔히 말하는 월요병 말기였다.
윤진영 사춘기 발악이었다. 괜찮은 직장에 다녔고 인정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하고 집에 오는데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내 삶은 ‘적당히 공부해서 시험성적에 맞춰 대학가고 나를 받아준 회사 들어가서 일하는 인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자신에게 물었다. 고민 끝에 세계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때마침 미국에서 개기일식이 일어날 예정이라 그 시기에 맞춰 여행을 준비했다. 2016년 9일 24일, 아내와 캐나다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듬해 8월 21일 옐로스톤 국립공원 근처에서 개기일식 관측에 성공했다.
젊은 부부가 돌연 세계여행을 떠난다고 했을 때 주변 만류도 만만치 않았을 듯하다. 기억에 남는 한 마디가 있다면?
윤진영 “부모님 생각은 안 하니?” 작은아버지가 한 말이었다. 부모님은 우리 이야기를 듣고 말을 잇지 못했다. 작은아버지가 보다 못해 철이 없다고 우리를 나무랐다. 그 이야기를 듣고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많이 들었다. 여행 중 더 조심하고 위험한 일은 되도록 하지 않는 이유다.
신선아 지난해, 사정이 생겨서 잠시 한국에 돌아갔다. 가족들이 모두 모여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2년 전 우리를 나무랐던 작은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요즘 들어 너희들이 참 멋지다고 생각한다. 가만히 되돌아보면 나도 꿈꾸던 일인데 용기가 없었어. 너희가 정말 부럽구나.” 다들 한 번쯤 미지의 세계로 떠나고 싶어 하지만 결국 현실에 안주하고 산다. 어르신 말씀을 듣고 나니 힘이 났다. 여행 중에도 자주 떠올리는 말이다.
아르헨티나 엘찬텐. 멀리보이는 봉우리 이름은 피츠로이다
굳이 자동차로 여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윤진영 자유롭기 때문이다. 여행 방법은 여러 가지다. 배낭을 메고 호스텔을 찾아다니거나 비행기를 타고 이 도시 저 도시 날아다닐 수도 있다. 자동차 여행은 대개 다른 방법보다는 느리다. 바퀴를 한 바퀴 두 바퀴 굴려야 목적지에 도착한다. 오늘은 런던, 내일은 파리 하는 식의 여행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가고 싶을 때 떠나고, 멈추고 싶을 때 머무는 자유로움이 허락된다. 굳이 버스나 비행기 시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길 가다 멋진 풍경을 만나면 하룻밤 묵으면 그만이다. 이런 자유가 길 위의 삶을 이끄는 힘이다.
여행경비는 어떻게 조달하나?
신선아 4년간 맞벌이로 모은 돈을 쓰고 있다. 흔히 세계 여행에 엄청난 비용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두 사람이 지금까지 2년 반 동안 사용한 비용은 8000만원 정도다. 많다면 많지만 우리가 쌓아온 경험에 비하면 크지 않은 금액이다. 자동차 구매비, 항공료(남미에서 유럽으로 이동 시), 자동차 컨테이너 운송비(남미에서 유럽으로 이동 시) 등 목돈이 들 때를 제외하면 월평균 경비는 200만원 수준이다. 한국에서 부부가 숨만 쉬어도 나가는 돈과 비교해도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
볼리비아 우유니에서 칠레 아카타마 사막까지 이어진 호수길을 달리면서 여기가 지구가 맞나 몇 번이나 확인했다
지금까지 여정을 함께한 자동차를 소개해달라
윤진영 토요타 4러너다. 한국에서 판매하지 않아서 익숙한 모델은 아니다. 랜드크루저의 마이너 모델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우리가 붙인 애칭은 '일식이'다. 개기일식 구경이 여행의 큰 목적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북미에서 타는 차답게 4000cc 가솔린 엔진을 달았다. 예상했겠지만 연료효율이 좋지 않다. 대략 1L에 7km 정도. 북미를 여행할 때는 기름값이 부담스럽지 않았는데 유럽에 넘어오니 상황이 달라졌다. 북유럽에서 기름을 가득 채웠더니 20만원 정도 들었다. 차를 고를 때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은 내구성, 유지보수 편의성, 공간이었다. 해발 4000m가 넘는 고산지대도 지나야 하고 도로 사정이 나쁜 중남미도 통과할 터라 모노코크보다는 보디온프레임 모델을, 두바퀴굴림보다는 네바퀴굴림을 원했다. 여정 중 어디서든 차박을 할 수 있어야 해서 넓은 공간도 빼놓을 수 없었다. 랜드로버 디펜더, 닛산 패스파인더, 토요타 랜드크루저와 4러너를 물망에 올리고 찾다가 캐나다 에드먼튼에서 20만km 넘게 달린 4러너를 샀다. 세금 포함 1만1500캐나다달러(1270만원)가 들었다.
자동차 수리가 필요하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는 어떻게 해결했나?
윤진영 구매 후 지금까지 8만5000km를 달렸다. 운이 좋아서인지 잔고장이 많지는 않았다. 올해 여름 유럽 여행 중 순환냉각기 계통 문제로 계속 냉각수를 토하는 증상을 보이기는 했다. 불가리아 토요타 정식 서비스센터에서 실린더헤드 개스킷을 교체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수리비가 400만원이고 부품 수급까지 걸리는 시간은 한 달. 눈앞이 깜깜했다. 돈도 돈이지만 한 달이나 머무를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나마 물가가 싼 터키로 갔다. 100km마다 냉각수를 보충하면서 1000km를 달렸다. 이스탄불 북부 정비소에서 수리 견적을 받았더니 부품값 포함 견적이 80만원 정도 나왔다. 불가리아에서 받은 견적의 20%에 불과했다.
신선아 한 번은 노르웨이 로포텐에서 자동차가 도랑에 빠졌다. 안 그래도 물가가 비싼 노르웨이에서 견인차를 부를 생각하니 정신이 아찔했다. 더군다나 공휴일이라 견인차가 와줄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발을 동동 구르던 중에 털털거리면서 차를 몰고 온 털보 아저씨를 만났다. 우리 사정을 들은 아저씨는 집에 가서 로프를 가지고 와서 차를 도랑에서 꺼내줬다. 돈 한 푼 받지 않았다. 기적처럼 고마운 인연이었다. 많은 사람이 여행 중 자동차가 고장 나면 어떻게 하냐고 묻는다. 그때마다 걱정하지 말라고 답한다. 길가에 보닛만 열고 서 있어도 10분에 한 명씩 와서 무슨 일인지, 도와줄 일 없는지 묻는다. 세상은 아직 살만한 곳이다.
노르웨이 르포텐. 차가 빠져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털보아저씨 로니가 일식이를 구해줬다
한국에 돌아와 정착한 뒤 일식이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윤진영 누적 주행거리가 30만km 가까이 되지만 아직 특별히 문제가 없다. 한국에 들여가서 탈 생각이다. 일식이는 이미 우리 부부에게 친구 같은 존재다. 온갖 궂은 날씨와 거친 길을 헤치고 우리를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실어 날랐다. 밤이면 편안한 잠자리도 제공했다. 기름은 많이 먹지만 정든 친구를 오래오래 곁에 두고 싶다. 이미 이사화물로 들여가기 위해 견적도 받아놨다.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나라와 도시를 지나왔나?
신선아 캐나다에서 출발해서 남아메리카 최남단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까지 여행했고 지금은 포르투갈에 있다. 질문을 받고 나서 세어보니 모두 39개국을 지났다. 도시는 세기조차 어렵다. 자동차로 여행하다 보니 의도치 않게 지나는 곳도 많다. 하루 이상 머무른 도시만 100곳이 넘는다. 비교적 오래 머무른 곳은 캐나다 에드먼튼(1개월)와 오소유스(2개월), 미국 LA(2주), 멕시코 과나후아또(2개월), 멕시코시티(1개월), 플라야 델 까르멘(1개월), 칸쿤(2주), 콜롬비아 살렌토(2주), 칠레 아타카마(2주), 산티아고(2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1개월), 터키 이스탄불(1개월) 정도다.
남미에서 유럽까지 이동은 어떤 방법으로 했나?
윤진영 우루과이에서 컨테이너에 차를 넣어 배로 보내고, 우리 둘은 자동차가 도착할 시일에 맞춰 비행기로 이동했다. 한 달여 운송 기간 동안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집을 빌려서 민박집 흉내도 내봤다. 그때 우리 집에서 묵었던 친구를 며칠 전 스페인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 앞에서 우연히 만났다. 세상이 정말 좁다.
지금까지 지나온 곳 가운데 노부부가 되었을 때 머물고 싶은 곳이 있다면 어디인가?
윤진영 칠레 푸콘이다. 우리 둘이 다른 일에는 이견이 많아도 어디에 정착하고 싶냐는 질문에는 항상 입을 모아 말하는 곳이다. 동네 가득한 장작 냄새, 호수와 화산이 보이는 멋진 풍경, 생애 최고 온천이 지금도 그립다. 세계 최고 맥주 가운데 하나인 쿤츠만을 생산하는 발디비아와 가까워서 더 마음에 든다.
약 3달간 함께 여행다닌 오토바이 여행자 김형욱, 김지아 부부와 페루 와라즈 초입에서
여행 중 황당한 경험도 많이 했을 텐데
신선아 캐나다에서 잠시 농장 일을 할 때 작은 생쥐가 차 안에 들어왔다. 오랫동안 같은 곳에 차를 세워놔서 쥐가 살림을 차린 모양이다. 귀한 식자재를 있는 대로 쏘아대는 통에 골치가 아팠다. 차 내부를 전부 들어내도 봤지만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었다. 좁쌀 같은 쥐똥만 가득했다. 그때 같이 일하던 캐나다 친구가 쥐덫을 줬다. 시골에는 흔한 일이라면서. 친구 도움으로 엄지손가락만 한 생쥐 두 마리를 잡았다.
윤진영 멕시코 과나후아또에서 스페인어를 배우기 위해 가정집 방 하나를 빌려서 오래 머물렀다. 집주인이 마침 우리 또래라 아주 친했는데, 어느 날 같이 사우나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가 이끌고 간 곳은 우리가 생각한 사우나와 거리가 멀었다. 영화에나 나올법한 한쪽 눈 없는 험상궂은 아저씨가 우리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일종의 주술사였다. 이파리가 붙은 나뭇가지로 우리를 찰싹찰싹 때리더니 움막에 밀어 넣었다. 움막 안은 수증기로 가득했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울기도 웃기도 하면서. 그렇게 2시간 정도 지났을 때, 주술사가 우리 부부에게 오늘 사우나에서 느낀 바를 말해보라고 했다. 말로 하기 어려우면 노래로 해도 된다고 했다. 결국 속옷만 걸친 채로 ‘아리랑’을 불렀다. 노래를 마쳤을 때 사람들은 손뼉을 치고 주술사도 감명을 받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경험이었다. 이 사우나가 멕시코 남부 전통 주술의식 떼마스깔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여행 중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무엇인가?
윤진영 길 위에서 보낸 모든 순간이 행복했지만 아무래도 '별쟁이'다 보니 별과 관련한 기억이 떠오른다. 칠레 아타카마 사막에서 2주 동안 쉬면서 별을 봤던 때가 가장 행복했다. 그곳은 전 세계에서 맑은 날이 제일 많고, 고도가 높아서 별을 보기 더없이 좋은 지역이다. 천혜 환경 덕에 유명한 천문대도 여러 곳 자리 잡았다. 낮에는 맥주 마시고 쉬다가 해만 떨어지면 망원경 들고 나가 별을 봤다. 남반구 별자리를 신기해하기도 하고 사진도 찍었다. 그렇게 별 구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2주를 보냈다.
개기일식의 하이라이트. 다이아몬드 링
밤하늘의 매력은 무엇인가?
신선아 ‘고립’이다. 살면서 완벽한 적막 속에 온전히 혼자 있는 시간은 많지 않다. 많은 사람이 도시 소음과 조명 속에 산다. 요즘은 어두운 방 안에서조차 스마트폰 불빛이 공해처럼 가득 찬다. 밤하늘은 호젓한 공간에서 고립돼야만 제대로 볼 수 있다. 그런 상황이 주는 혼자만의 시간이 더없이 좋다.
윤진영 밤하늘을 마주하면 공간 감각이 사라진다. 자기 손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들어서면 세상에 오로지 별과 나만 마주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 순간이 찾아오면 이 넓은 우주에 또 누가 살지 궁금해도 하고 티끌만큼 작은 지구에서 아웅다웅 사는 우리 모습이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윤진영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해로 가는 카페리를 타고 귀국할 예정이다. 아마 4월이나 5월이 될 듯하다. 귀국 후에는 별이 잘 보이는 강원도에 둥지를 틀 생각이다. 사실 여행 떠나기 전에는 마음에 드는 여행지에 정착하려는 생각도 했다. 실제로 멋진 곳도 많았다. 인심 좋고 물가 싸고 날씨 좋은 멕시코, 바다색이 정말 그림 같던 칸쿤. 장작 냄새가 온 동네에 가득한 칠레 푸콘, 모든 면에서 풍요로운 미국 등. 그런데 멋진 곳에 지내는 순간에도 늘 한국에 있는 집이 생각났다. 맛있는 음식, 가족과 친구들, 안정감과 소속감이 그리웠다. 아무리 멋진 곳에 지내더라도 집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미국 모뉴먼트밸리
여행 전과 후 무엇이 가장 달라져 있으리라 생각나?
윤진영 통장 잔고? 농담이다. 여행이 우리 삶을 엄청나게 바꿔놓으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좋건 나쁘건 얻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본다.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쌓았고 서로를 조금 더 잘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 큰 수확은 자신감이다. 여행은 하루하루가 새로운 프로젝트다. 어디로 어떻게 가고 무엇을 먹을지 어떻게 잘지 모두 고민하고 결정해야 한다. 돈도 시간도 부족하다. 말도 속 시원히 통하지 않는다. 모든 난관을 뚫고 하루하루 원하는 바를 이루고 산다. 2년 반 별 탈 없이 건강히 여행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하루하루 성취감이 쌓여간다. 어떤 일이든 해낼 수 있다는 무모한 자신감이 생긴다.
두 사람에게 여행이란 무엇인가?
윤진영 이쯤 오고 나니 일상인지 여행인지 가끔 구분이 안 된다. 처음부터 거창한 목표를 가지고 떠나지도 않았고 여행 이후 삶이 송두리째 바뀌리라는 기대도 없다. 한국에 돌아가면 경제적인 어려움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안다. 하지만 인생은 길다. 80세까지 산다고 생각해도 아직 50년 가까운 여생이 남았다. 몇 년 일 쉰다고 어떻게 되지는 않는다.
신선아 우리 부부에게 여행은 추억 창고다. 나이 들었을 때 군밤 까먹으면서 그때는 그랬지 하면서 웃고 이야기할 거리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더 바라는 점은 없다.
칠레 아키타마 사막에서 촬영한 은하수
글 · 김성래 기자
사진 · 윤진영, 신선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