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GEAR’S PERSONA - 페르디난트 피에히
2016-04-21 16:55:24 글 박영웅 편집장
디젤 게이트로 풍전등화 상태에 빠진 폭스바겐 그룹. 이 거대한 자동차 왕국의 초석을 다진 이는 페르디난트 피에히다
지난해 미국 환경보호청(EPA)이 폭스바겐에 법령 위반을 공식 통보하며 시작된 ‘디젤 게이트’는 엄청난 후폭풍을 일으켰다. 폭스바겐 그룹 CEO 마틴 빈터콘은
마틴 빈터콘의 사직으로 인해 자연스레 연상되는 폭스바겐 그룹 관계자가 있다. 마틴 빈터콘에 밀려 올해 4월 그룹 감독이사회 의장에서 물러난 페르디난트 피에히다. 피에히는 히틀러의 지시로 독일 국민차를 만들고 볼프스부르크에 생산공장을 준비한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의 외손자다. 잘 알다시피 포르쉐 박사의 국민차(비틀)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영국군의 주도로 볼프스부르크에서 생산되기 시작했고 세계적인 대히트를 기록하며 오늘날 폭스바겐의 기원이 됐다.
1963년 스위스 취리히의 연방공과대학을 졸업한 피에히는 외할아버지가 세운 포르쉐에 합류한다. 당시 포르쉐는 외삼촌 페리 포르쉐가 진두지휘하고 있었지만 여장부로서 알짜배기 자회사인 포르쉐 오스트리아 법인을 물려받은 어머니 루이제의 입김도 상당했다. 따라서 피에히는 포르쉐 박사의 친손자들(알렉산더, 게르하르트, 한스-페터, 볼프강)과 대등한 지위에서 일할 수 있었다. 유능한 변호사였던 아버지처럼 가문에서 유일하게 대학 졸업장을 가진 점도 피에히의 무기였다.
르망 출전을 위해 생산한 25대의 917과 피에히(맨 왼쪽)
하지만 기술자적인 고집과 두려움을 모르는 패기가 문제였다. 포르쉐 개발담당에 오르자 피에히는 프로젝트 시작 1년만인 1969년 르망 24시간 레이스에 투입할 경주차 917을 개발한다. 공랭식 수평대향 12 기통 엔진을 얹은 917는 0→100km/h 가속 2.3초, 최고속도 390km/h를 내는 괴물로 레이서들이 운전하기를 기피할 정도였다.
917은 르망 24시간 투입 두번째 해인 1970 년부터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며 포르쉐의 영원한 걸작이 됐다. 피에히는 917을 통해 개발자적인 역량을 입증해냈지만 회사 내의 입지는 최악이었다. 917 프로젝트에 막대한 예산을 가져다 썼기에 포르쉐의 곳간이 텅 비어버린 것.
외삼촌 페리를 비롯한 주주들의 반발은 상당했다. 게다가 비틀의 공랭식 엔진 홍보마케팅 차원에서 917 프로젝트 비용 2/3 를 지원하던 폭스바겐이 후속모델(골프)에 수랭식 엔진을 쓰기로 하면서 손을 털자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당시의 사태가 피에히가 물러나는 것만으로 수습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어머니 루이제는 다른 가족 구성원들도 모두 포르쉐 운영에서 손을 떼라고 강력히 주장해 끝내 관철시켰기 때문이다.
포르쉐를 나온 피에히는 프리랜서로 다임러 그룹의 5기통 엔진 개발 프로젝트 리더로 일했다.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뒤 당시 요아킴 찬 회장으로부터 정식 입사 제의를 받았지만 개발비와 관련한 이견으로 결렬됐다. 이후 머리를 식히고 디자인도 배울 겸 이탈디자인에 갔다가 쥬지아로와 인연을 맺게 됐고 지금껏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경영난에 빠진 이탈디자인은 2010년 폭스바겐 그룹 산하 람보르기니가 인수했다).
1972년 피에히는 어머니의 연줄 하인리히 노르드호프 폭스바겐 회장의 도움으로 아우디 개발 총괄 루드비히 클라우스 밑으로 들어갔다. 이듬해 ‘기술을 통한 진보’를 추구하던 루드비히 클라우스가 모기업 폭스바겐과의 마찰로 물러나자 그의 자리를 이어받는다. 이후 100% 양면 아연도금 강판 차체, 직렬 5기통 TDI 엔진, 승용 네바퀴굴림 콰트로 구동계, 알루미늄 스페이스 프레임 등 오늘날 아우디를 상징하는 상당수 기술을 일궈냈다.
아우디 회장을 거쳐 1993년 폭스바겐 그룹 회장에 취임한 그는 주 4일 근무제, 플랫폼 공유전략 등의 업적을 남겼다. 피에히가 회장으로 일한 2001년까지 폭스바겐 그룹은 판매가 72%, 매출이 126% 늘었다.
또 벤틀리, 부가티, 람보르기니 등을 인수해 오늘날 폭스바겐 그룹이 12개의 승용차, 상용차, 오토바이 브랜드를 거느린 자동차 왕국으로 성장하는 초석을 다졌다. 2000 년에는 본거지 볼프스부르크에 자동차 테마파크인 아우토슈타트를 오픈하기도 했다.
그룹 회장에서 물러난 피에히는 감독이사회 의장으로 지난해 봄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2005년부터 볼프강 포르쉐와 벤델렌 비데킹이 주도한 포르쉐의 폭스바겐 인수작전의 판세를 극적으로 뒤집어 2009년 마침내 백기를 받아낸 것도 그다. 하지만 그 역시 후계자 빈터콘에 의해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