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CEO, 애스턴마틴 앤디 팔머
2016-05-18 13:21:31 글 박영웅 편집장
‘진짜 CEO’가 되고 싶어 브리티시 럭셔리 스포츠카 메이커 애스턴마틴으로 옮긴 앤디 팔머 사장이 인터뷰 도중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애스턴마틴의 특징이 뭐냐구요? 이리 따라와보세요.” 갑자기 소파에서 일어난 앤디 팔머 애스턴마틴 CEO가 기자를 데리고 전시장 한켠에 세워진 밴티지 앞으로 가더니 열정적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사이드 도어와 루프의 높이, 캐빈과 보닛의 길이 등 차체 곳곳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황금비율(1:1.618)로 디자인됐어요. 우리가 고집하는 디자인 철학이죠. 애스턴마틴의 모든 차들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측면에서 볼 때 A필러를 타고 내려오는 선이 프론트 휠 센터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도 애스턴마틴의 특징이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발끈한 줄 알고 기자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애스턴마틴은 경쟁사에 비해 ‘뭔가 확 와닿는 카리스마 같은 것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한 끝에 취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애스턴마틴은 ‘엔진이 앞에 있다’는 장점도 잘 안다고 농담(2007년경 애스턴마틴 아태지역 책임자가 포르쉐에 빗대어 기자에게 했던 유머다)을 던졌기에 더 그랬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캐치프레이즈인 파워(Power), 뷰티(Beauty), 소울(Soul)보다 머리에 쏙 들어오는 원포인트 레슨을 최고경영자로부터 직접 받는 영광을 누렸다.
2014년 9월까지 앤디 팔머 사장은 닛산 수석부사장으로 재임하며 최고기획책임자 겸 인피니티 브랜드 총괄을 맡았다. 영국인으로 23년간 닛산에서 일한 그는 르노 체제 아래서도 뛰어난 성과를 일궈내 카를로스 곤 회장의 뒤를 이을 예비후보 중 한명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이런 실력파가 갑자기 닛산을 나와 애스턴마틴의 CEO가 됐다. 왜 그랬을까?
앤디 팔머 CEO는 장기 플랜과 그에 따른 자금 조달까지 모두 끝마쳤다
“닛산에서는 절대로 CEO가 될 수 없었기에 이직을 결심했어요. 무늬만 CEO가 아닌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진짜 CEO를 원했습니다. 애스턴마틴이 제가 생각한 조건에 딱 맞았어요. 게다가 애스턴마틴은 영국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는 자동차 브랜드예요. 그동안 많은 부침을 겪었지만 잠재력이 무한합니다. 제가 36년 동안 자동차업계에서 일하면서 쌓은 경험과 지식을 적용하면 영국 자동차의 자존심으로 우뚝 설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자동차 판매 세계 4위의 거대 메이커인 르노닛산의 최고위급 임원을 지낸 팔머 사장의 이력을 볼 때 애스턴마틴은 결코 성에 차지 않을 작은 회사다(직원 1,500여명, 연간 판매량은 4,000여대). 지난호 본지 ‘카 브랜드’ 코너에 소개되었듯이 죽을 듯하면서도 끝까지 살아남는 제임스 본드처럼 금방 망할 듯하면서도 102년 동안 명맥을 이어온 유서 깊은 브랜드다. 그는 애스턴마틴에서 진흙 속의 진주를 보았을까?
“오늘날 럭셔리 자동차 브랜드 가운데 모기업이 없는 회사는 애스턴마틴이 유일합니다. 제가 합류한 뒤 내부실정을 살펴보니 재정적인 제약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체계적인 계획도 부족했구요. 그래서 처음 2~3개월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그리고는 4개월 동안 그 계획을 실현시킬 자금을 조달하려고 뛰어다녔습니다. 2015년 4월로 모든 것이 완비되었고요. 지금은 본격적인 실행 단계에 있습니다.”
그의 취임 이후 애스턴마틴의 신차 계획이 차근차근 베일을 벗고 있다. DB9의 후속 DB11이 나왔고, 새로운 변속기를 얹은 라피드도 출시된다. 팔머 사장은 시원시원하게 주요 일정을 공개했다. “DB11은 다임러의 전기장치 아키텍처를 활용해 개발기간을 크게 단축했어요. V8의 경우 엔진을 다임러로부터 가져옵니다. 그리고 애스턴마틴 최초의 SUV DBX도 양산이 확정되어 개발이 본격화됐습니다.”
양산이 확정된 애스터마틴 최초의 SUV DBX
DBX의 생산공장은 아직 결정하지 않았는데, 과거 마그나슈타이어에 생산을 맡겼던 라피드처럼 외주를 줄 수도 있다는 뜻으로 여겨진다. 참고로 애스턴마틴은 소규모 회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2013년 다임러와 손을 잡았다. 그 대가로 주식 5%를 내주었고, DB11에 메르세데스-벤츠의 통합형 컨트롤러와 AMG GT의 V8 엔진 등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성능 자동차 메이커로서 이겨내야 할 가장 큰 숙제인 환경규제에 대한 해법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경쟁사들은 다운사이징 엔진, 하이브리드 구동계 등으로 강화되는 배기규제에 대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고객의 니즈를 생각할 때 V12 엔진을 포기할 수 없어요. 대신 에미션 제로카인 전기차로 돌파할 생각입니다. 라피드E가 그런 예입니다.”
이는 애스턴마틴이 미래에 벌컨 같은 수퍼카를 다시 내놓아도 V12 엔진을 고집하거나 100% 전기차 콘셉트를 담겠다는 이야기다. 4기통, 6기통 엔진에 전기모터를 더하는 시시한 편법(?)은 쓰지 않겠다는 것. 게다가 닛산 출신인 그가 전기차에 일가견을 갖고 있음이 틀림없다.
‘애스턴 고개의 마틴’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애스턴마틴은 창업 이후 한결같이 모터스포츠에 열정을 쏟아온 메이커다. 전임자인 울리히 베츠는 직접 레이싱 드라이버로 출전했을 정도다. 하지만 숫자를 중시하는, 산수(?)에 강한 경영자 입장에서 모터스포츠는 돈만 잡아먹는 쓸데없는 이벤트로 생각할 수도 있다. 팔머 사장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애스턴마틴의 마케팅 3대 전략은 제임스 본드, 레이싱, 럭셔리입니다. 그만큼 모터스포츠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또 모터스포츠는 영국의 자랑스러운 자동차 문화의 하나입니다. 저변이 넓은 만큼 주요 F1팀 기술자들 상당수가 영국인이고, 자연스레 F1 관련기술이 고성능차에 이식될 수 있는 환경을 갖고 있지요. 우리 회사 엔지니어들도 F1 출신이 많습니다. 구성원 모두가 모터스포츠에 대한 열정이 대단해요. 새차를 테스트할 때도 서킷이 메인이고, 일반도로는 서브입니다. 경쟁사가 서킷도 달릴 수 있는 자동차를 만든다면, 애스턴마틴은 일반도로도 달릴 수 있는 서킷용 자동차를 지향합니다. 애스턴마틴의 DNA예요.”
거짓말이 아닌 것 같다. 기자는 지금껏 3명의 애스턴마틴 UK 출신의 자동차업계 관계자를 만나보았다. 모두들 납작하게 깔린 차로 트랙을 휘젖고 다니는게 삶의 낙인 사람들이었다. 애스턴마틴은 영국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여담이지만 지난 2011년 영국 왕실의 윌리엄 왕세손 결혼식 때 쓰인 웨딩카가 1969년형 애스턴마틴 DB6이었다. 아버지 찰스 왕세자가 21살 때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선물받은 차다. 이런저런 이유로 뒷자리에 앉아야 하는 매우 노블한 사람들도 본인이 스티어링 휠을 잡을 기회가 있다면 주저 없이 올라타는 차가 애스턴마틴인 것이다.
인터뷰 시간이 다됐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 막 들어온 애스턴마틴에 대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크리켓 경기 아시죠? 대부분 알 겁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모를 거예요. 지금 한국에서 애스턴마틴의 위치가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앞으로 우리의 참모습을 한국의 고객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 애스턴마틴을 소유하고 배워나가는 것은 과거 102년 역사는 물론이고, 앞으로의 100년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꼭 경험해보세요.”
그 어떤 미사어구보다 흡입력이 강한 한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