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오프로드를 가리지 않고 질주한 전설적 레이서, 발터 뢰를
2016-08-11 00:35:33 글 박영웅 편집장
전설적인 랠리스트 발터 뢰를(Walter Rohrl)은 독일인들에게 F1의 황제 슈마허만큼이나 추앙받는 존재다. 1947년생인 그는 16세 때 독일 바이에른주 레겐스부르크의 가톨릭 주교 운전기사로 들어가면서 자동차와 인연을 맺었다. 발터 뢰를은 “당시 연간 12만km를 달렸는데, 좋아하는 차를 매일 운전할 수 있어 즐거웠고 이때 익힌 운전감각이 뒷날 큰 도움이 됐다”고 회고한 바 있다.
뢰를은 21세 때 소형차 피아트 850을 몰고 지역 자동차 랠리에 출전함으로써 모터스포츠계에 첫발을 내딛었다. 4년이 지난 1972년 포드 랠리팀에 들어갔고, 이듬해 오펠로 이적, 마침내 월드랠리챔피언십(WRC)에 입문했다. 1975년 아크로폴리스(그리스) 랠리에서 우승을 하기도 했던 뢰를은 피아트로 옮긴 후 좋은 성적을 올리기 시작한다.
131 아바스 랠리카를 몰고 출전한 1978년 두차례 우승을 했고, 1980년에는 몬테카를로(모나코), 포르투갈, 아르헨티나, 산레모(이탈리아) 랠리에서 가장 빠른 기록을 세워 월드 챔피언에 올랐다. 그해 뢰를이 쌓아올린 드라이버즈 포인트는 118점으로, 2위의 하누 미콜라(64점)의 두배에 가까운 압도적인 스코어였다. 당시 WRC의 톱5 드라이버 가운데 뢰를을 빼고 모두 스칸디나비아 출신이었던 만큼 뢰를은 자연스레 독일인들 사이에 우상 같은 존재로 떠올랐다.
1980년 아우디는 네바퀴굴림 구동계를 쓴 콰트로 모델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WRC에 출전하기로 했다. 최고의 실력자인 뢰를에게 운전대를 맡기고자 했으나 메르세데스-벤츠가 먼저 데려가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한다. 참고로 메르세데스-벤츠는 이듬해 랠리에서 철수하며 뢰를에게 양산차 개발을 맡기려 했으나 그는 모터스포츠를 선택했다(1990년대 중반 메르세데스-벤츠는 뢰를을 개발고문으로 다시 영입하려다 실패했다).
독일을 대표하는 랠리스트를 데려오지 못한 아우디는 대신 프랑스의 여성 드라이버 미셸 무통을 영입했다. 이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여성 드라이버가 희귀한 랠리계에서 무통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1982년 WRC에서 4차례나 우승을 거머쥐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성으로서 시즌 종합2위라는 전무후무한 기록까지 세웠다.
뢰를이 아우디의 워크스팀에 합류한 것은 1984년이다. 첫출전한 몬테카를로 랠리에서 콰트로 A2 머신을 몰고 우승하는 등 녹슬지 않은 기량을 보여주었으나 경주차의 잦은 트러블로 여러차례 중도탈락, 상위권에 들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뢰를을 ‘랠리의 전설’로 칭하는 이유는 막 태동한 WRC 그룹 B 랠리카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신기에 가까운 운전술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비포장도로에서 0→100km/h 가속을 3초에 끝냈던 당시 그룹 B 랠리카는 인간이 컨트롤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차로 평가받았는데, 아우디 스포츠 콰트로 S1 E2의 경우 최고출력 600마력을 품은 괴력의 소유자였다.
이 차를 몰고 우승한 산레모 랠리(1985년)에서 뢰를은 힐&토, 클러치 킥, 왼발 브레이킹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이 괴물을 갖고놀아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았다. 연이은 사고와 인명피해로 1987년 시즌에 그룹 B가 폐지된 뒤 뢰를은 미국 파이크스 힐 클라임(1987년)에 출전, 최초로 11분 기록(10분 47.85초)을 깨기도 했다. 뢰를이 추앙받는 또다른 이유는 랠리뿐 아니라 서킷 경기도 제패했기 때문이다. 그는 1981년 포르쉐 944 경주차로 르망 24시간에 출전해 그룹D 부문 우승(종합7위)를 차지했고 1993년 세브링 내구레이스도 석권했다.
현역에서 물러난 뒤 아우디에서 홍보 및 테스트 업무를 맡게 된 뢰를은 페르디난트 피에히(VW그룹 전 감독이사회 의장)의 배려로 1995년부터 포르쉐 최고 선임 테스트 드라이버로 일하며 신차 개발에 관여해왔다. 918 스파이더 이전까지 고성능 포르쉐의 뉘르부르크링 공식 레코드는 뢰를의 기록에 의존할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70세가 다된 뢰를은 지금도 포르쉐와 아우디의 주요 모터스포츠 행사를 누비면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탑기어〉 2016년 4월호 발췌 ·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