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자동차 산업의 아버지, 포니 정
2016-09-15 15:00:00 글 박영웅 편집장
정세영 회장의 혜안이 없었다면 현대차 아니 국내 자동차 산업의 기술자립은 불가능했다
1971년 가을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 회장은 자신의 동생이자 현대자동차 사장인 정세영을 동석하고 미국 포드 관계자와 마지막 담판을 벌이고 있었다. 현대차는 포드와 제휴해 국내 실정에 적합한 소형차와 엔진을 생산하길 원했다. 하지만 당시 세계 2위의 탑 메이커였던 포드는 2년째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도장을 찍지 않고 있었다. 포드의 수퍼갑 행태에 분노한 정주영 회장은 협상장을 박차고 나가며 일갈한다. 정세영 회장이 통역한 마지막 멘트는 “We will go it alone!”(우린 우리 방식대로 하겠어)였다.
1967년 설립된 현대자동차는 국산차 생산을 위한 디딤돌로 유럽 포드의 코티나를 녹다운 방식으로 들여와 조립생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해외 수출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우리 기술과 부품을 이용해 독자모델을 만들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믿었던 포드가 돌아선 것이다.
정세영 회장은 이후 1년여의 고민 끝에 고유모델을 개발하기로 마음을 굳힌다. 그의 구상을 전해들은 정주영 회장은 사생결단의 각오로 추진하라고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사실 코티나의 도면조차 카피하지 못하던 당시의 기술수준으로는 돈키호테식 공상일 뿐이었다. 정세영 회장은 ‘미래는 만드는 것’이라는 좌우명을 되새기며 난제를 풀어나가기 시작한다.
(왼쪽 아래) 출시 5개월만인 1976년 7월 중남미 에콰도르에 포니를 처녀 수출했다 (오른쪽 아래) 1971년 도쿄에서 처음 만난 쥬지아로와는 34년 동안 변치 않는 우정을 나눴다
그는 신생 카로체리아 이탈디자인의 쥬지아로를 만나 신차 디자인, 설계 용역 계약을 맺고 영국의 거물 엔지니어 조지 턴불 BLMC 부사장을 영입해 생산설비에 대한 자문을 맡겼다. 또한 정주영 회장이 조선소 건설로 인연을 맺은 일본 미쓰비시를 찾아가 플랫폼과 엔진, 변속기 설계도 및 생산기술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의 눈부신 활동은 미국 유학으로 익힌 글로벌 감각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쥬지아로가 제시한 3가지 스케치 가운데 ‘꽁지 빠진 닭 모양’의 패스트백 스타일을 고른 것도 정세영 회장이었다. 4도어 세단이 전부인 줄 알았던 국내 실정에서 세계적인 유행을 예견한 그의 혜안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설계용역 계약을 체결할 때 현대차 실무진 10여명을 이탈디자인에 파견해 기술연수를 받게 한 것도 현명했다. 미국, 영국, 독일 포드로부터 배운 자동차 조립기술에 이탈리아의 디자인과 설계기술이 융화됐기 때문이다. 일본 미쓰비시로부터는 자동차 제조기술을 배웠다(몇몇 친한파 엔지니어의 도움으로 국내 기술진 스스로 깨쳤다고 한다). 현대차는 이를 바탕으로 짧은 시간에 독자모델을 개발할 수 있었다.
현대차가 포드 혹은 다른 선진 메이커와 합작회사를 세웠다면 기술자립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현대차는 폭스바겐, 알파로메오, 르노 등과도 접촉했으나 기술적 자립이라는 확고한 목표가 있었기에 그들과 손을 잡지 않았다. 현대차가 오늘날 글로벌 탑 5로 올라설 수 있었던 갈림길이 아니었을까?
이탈리아 토리노 모터쇼에서 공개된 콘셉트카 포니 쿠페
1974년 10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린 ‘55회 토리노 국제자동차박람회’에서 마침내 포니가 공개됐다. 6·25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은 한국의 이름 없는 메이커가 발표한 고유모델에 세계 자동차업계는 말 그대로 뒤집어졌다. 수많은 언론매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정세영 회장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한국인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고, 포니 정이라는 애칭을 얻게 됐다.
이후의 진행과정은 더 극적이다. 양산준비가 전혀 안된 상태에서 이탈디자인으로부터 프로토타입을 건네 받아 1년 4개월(1976년 2월)만에 연산 6만대 규모의 공장을 가동한 것이다. 이와 함께 해외 시장 개척에도 나서 그 해 7월 중남미 에콰도르에 포니 5대를 수출했다. 그 중 1대가 20년 동안 150만km를 넘게 뛴 택시였는데, 1996년 정세영 회장의 지시로 국내로 반입됐다. 연말까지 20여 나라에 1,019대의 포니를 내보냈다.
포니는 세단 일색인 국내 시장에 패스트백 모델로 등장했다
이처럼 짧은 기간에 고유모델 개발, 생산과 수출까지 해낸 메이커는 지금껏 현대차가 유일하다. 포니의 성공 이후 현대차가 앞바퀴굴림 소형차(포니 엑셀)와 연산 30만대 규모의 공장을 준비할 때 “우리가 기술을 내주지 않아도 포니 정이 이끄는 현대차는 꼭 해낼 것이기에 내줄 수밖에 없다”며 수락한 미쓰비시 구보 회장의 고백처럼 정세영 회장은 꿈을 위해 열정을 쏟아 부은 기업가였다.
정세영 회장은 1999년 정주영 회장의 지시로 큰조카인 정몽구 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기고 32년간 몸담았던 현대차를 떠났다. 이후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으로 활동하다 2005년 5월 영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