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 뱅글, 자동차 디자인 흐름을 바꾼 혁명가
2016-09-27 08:00:00 글 김준혁 기자
자동차 디자인 역사에서 사람들 머릿속에 선명하게 각인된 이름은 몇명 없다. 그중에는 크리스 뱅글도 포함된다. 그는 2001년 선보인 BMW 4세대 7시리즈(E65)의 성공에 힘입어 자동차업계의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뱅글은 1956년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났다. 미국 ACCD(Art Center College of Design) 졸업 후 독일로 건너가 오펠에서 카디자이너 일을 시작했다. 이때가 1981년이다.
뱅글의 첫 작품은 1983년 발표된 콘셉트카 주니어(Junior)다. 그가 담당한 인테리어는 당시 개념조차 희미한 모듈러 방식을 적용해 화제를 모았다. 1985년 이탈리아 토리노에 있는 피아트로 옮겨 피아트 역사에 남을 역작을 그려냈다. 바로 1993년 데뷔한 피아트 쿠페다.
쿠페는 20년이 지난 지금 봐도 촌스럽지 않을 정도로 디자인이 유려하고 파격적이다. 특히 휠아치를 가로지르는 독특한 캐릭터 라인과 미래지향적인 램프 디자인이 눈길을 끌었다. 1992년 BMW로 옮긴 그는 실력을 인정받아 미국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디자인 총괄 자리에 올랐다.
크리스 뱅글이 BMW에서 처음 디자인한 Z9 그란투리스모 콘셉트카
BMW에서 만든 첫 작품은 1999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 출품한 콘셉트카 Z9 그란투리스모다. 이 차 역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모터쇼의 주인공으로 떠올랐다. 차 안팎에 실험적인 요소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BMW 배지와 키드니 그릴이 없으면 BMW라는 사실을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당시에도 BMW는 충분히 멋지고 잘 달리는 차였다. 하지만 뱅글의 생각은 달랐다. BMW가 지나치게 실용적이고 기계적인 완성도에 집착하며 감성이 부족하다고 여겼다. 이후 BMW 디자인을 크게 뜯어고친 이유다. 2001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나온 4세대 7시리즈는 Z9 그란투리스모만큼이나 큰 화제를 모았다. 새로워진 디자인도 충격적이었지만 기함을 확 뜯어고친 뱅글의 배짱에 사람들은 놀라워했다.
4세대 7시리즈는 크리스 뱅글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뉴 7시리즈는 1, 2년 전에 나온 모델이 몇십년 전의 차로 보일 만큼 확 바뀌었다. 범퍼, 헤드램프, 그린하우스 등 차체 각 부분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개성 넘치고 사용하기 좋은 BMW만의 스타일을 완성했다. 인테리어도 미래적인 디자인에 다양한 첨단장비를 절묘하게 담아냈다.
7시리즈 디자인이 너무 앞선 탓에 뱅글은 BMW 마니아들로부터 원성을 샀다(심지어 협박도 받았다). 하지만 알다시피 결과는 대박이었다. 뱅글의 판단은 옳았다. 그 후 뱅글의 지휘 아래 BMW 모델들은 차례차례 개성 있는 모습으로 거듭났다.
인테리어도 미래 지향 디자인에 다양한 첨단장비를 절묘하게 담아냈다
그의 디자인은 BMW를 넘어 자동차업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2000년대 등장한 차들은 어김없이 옆구리에 캐릭터 라인 한두개는 갖게 됐다. 실내는 BMW의 i드라이브 같은 통합형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으로 채워졌다.
뱅글은 한 강연장에서 “자동차는 곧 사람이며 우리의 생각과 자아를 반영한 아바타”라고 말하며 자신의 디자인 철학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컴퓨터가 자동차를 디자인하고 기계가 찍어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디자인 원형은 흙(클레이)을 갖고 사람이 직접 빚어냅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이 정으로 대리석을 쪼아 조각상을 완성했듯이 말입니다. 자동차에서도 예술성이 중요하며 새로움과 창의성을 더해야 합니다.”
뱅글은 자동차에서도 예술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2009년 뱅글은 BMW를 떠나 토리노에 크리스 뱅글 어소시에이트(Chris Bangle Associastes)를 설립하고 디자인 컨설팅 사업을 시작했다. 2012~2014년에는 삼성전자의 마스터 디자이너로 활동하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가전제품에 크리스 뱅글의 이름을 붙인 스페셜 에디션을 출시하기로 했다가 계획을 바꿔 디자인 전반에 걸쳐 자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뱅글은 전세계 회사들을 상대로 디자인 컨설팅을 한다. 그가 자동차업계에 복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동종 업계 이직 금지기간이 끝났고 뱅글을 원하는 메이커도 많기 때문이다. 그의 개성이 담긴 파격적인 자동차를 다시 한번 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