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 XC60이 보여주는 미래, 볼보자동차 이정현 디자이너
2017-03-10 15:35:13 글 김준혁 기자
지난해 11월 한국을 처음 방문한 볼보자동차 CEO 하칸 사무엘손에 이어 이정현 디자이너를 인터뷰하게 됐다. 볼보차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들을 연달아 인터뷰한 것은 기분 좋은 우연이다.
볼보자동차 유일의 한국인 디자이너이기도 한 이정현 디자이너는 2세대 XC60(올해 하반기 데뷔)의 익스테리어 디자인을 담당했다. XC60가 어떤 차인가. 볼보의 최고 인기 모델이다. 볼보자동차는 2015년 처음으로 판매대수 50만대를 돌파했는데, 그중 30%가 넘는 15만9,000여대가 XC60 몫이었다. 이런 베스트셀러의 후속 모델, 그중에서도 익스테리어 디자인을 책임진 사람이 이정현 디자이너다.
그는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았다. 기계공학을 공부하던 중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 2006년 스웨덴 우메오 디자인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그는 입학이 까다롭기로 소문난 디자인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스웨덴의 셈콘(Semcon)에서 1년여 동안 경험을 쌓다가 볼보자동차에 입사했다.
“북유럽 디자인에 대한 동경심이 있었다. 스웨덴으로 유학 가기 위해 이것저것 알아보면서 북유럽 디자인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남들과는 다른 것을 해보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던 것 같다. 유학을 준비하던 2006년 무렵에는 자동차 디자인이라고 하면 독일, 미국, 영국을 알아줬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쪽을 택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다른 길을 가고자 했다. 스웨덴을 택한 이유다.”
이정현 디자이너는 우메오 디자인 대학에 입학할 때부터 볼보자동차 입사를 목표로 잡았다. 볼보의 역사를 봤을 때 정말 가치 있고,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회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웨덴에서 생활한 10년 동안 그는 막연하게 생각해왔던 스칸디나비안 디자인에 대한 자기만의 철학을 정립할 수 있었다.
“스칸디나비안 디자인은 덜어냄이다. 그리고 사람 중심의 디자인이다.”
이 말을 들었을 때 기자는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좀더 물어봤다. 그가 생각하는 스칸디나비안 디자인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다르면서 단순한 디자인이 제일 어렵다. 다르게 만드는 건 어렵지 않다. 이것저것 추가하면 금세 달라지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빼면 된다. 하지만 ‘다르게 단순하기’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스칸디나비안 디자인은 다르면서 단순하다. 덜어내고 덜어내는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한 끝에 나오는 것이 스칸디나비안 디자인이다.”
이정현 디자이너에 의하면 스칸디나비안 디자인의 공식은 없다. 대학교에서 알려주지 않으며, 볼보자동차에서도 누구 하나 ‘이게 스칸디나비안 디자인이다’라고 정의 내리지 않는다. 이것은 일상에서 스며 나오는 것이며,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발현된다.
이런 이유로 스칸디나비안 디자인과 볼보자동차가 휴머니즘과 맞닿아 있는 게 아닐까? 디자인 과정에서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반영되는지 물어봤다.
“다른 메이커들이 신기술을 적용하기 바쁠 때, 볼보는 그 기술이 사람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지를 먼저 생각한다. 안전을 고려했을 때 불필요한 요소라고 판단되면 좋은 디자인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해도 배제한다. 안전이라는 기준을 충족하면서 디자인하는 일이 쉽진 않지만 한편으로 도전의식을 느낀다. 안전기준을 충족하는 요소를 하나둘 추리는 과정에서 더 좋은 디자인이 나오기도 한다.”
이런 생각은 현재 90시리즈의 인테리어에도 적용되어 있다. 익스테리어 디자인도 같은 방식으로 접근한다. 특히 디자인 총괄을 맡은 토마스 잉엔라트 수석 부사장이 온 뒤로 많은 것이 변했다고 한다. 차를 디자인할 때 사람 같은 느낌을 주려고 노력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튀지 않으면서 차분한 사람, 그러면서 자신감 넘치고 젠틀한 사람처럼 보이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토마스의 경우 디자인 과정에서 사자를 자주 예로 든다. 사자는 찡그리거나 조급해하지 않은, 차분한 얼굴을 갖고 있는데, 그런 느낌을 담아내라는 것이다. 최신작인 90시리즈에 이런 차분함과 자신감, 그러면서 약하지 않은 이미지가 적용됐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90시리즈의 디자인은 호평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하반기에 나올 새 XC60는 어떨까? 일각에서는 볼보도 공통된 디자인을 적용해 XC60만의 색깔이 흐려지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다. 이정현 디자이너는 브랜드 정체성 강화를 위해 전 차종의 디자인이 비슷해지는 최근의 흐름을 인정하면서, 볼보는 다르다고 강조했다.
“볼보라는 하나의 브랜드를 발전시키는 것을 염두에 두지만 디자인 과정에서는 각 라인업의 개성을 존중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 모델에 어울리는 명확한 메시지를 담고자 한다.”
그래서 XC60는 어떤 개성과 메시지를 담아냈을까? 혹시 양산차는 디자이너의 의도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을까?
“XC90에서 차체만 줄이는 것은 지양하고 싶었다. 크게 보아 90시리즈와 차별화하고자 했다. 90시리즈가 차분하고 중후한 모습이라면, 60시리즈는 조금 다르다. 이런 특성을 유지하면서 좀더 스타일리시하게 보이도록 다듬었다. 동시에 우아하고 다이내믹한 면도 있다. 기존에 나와 있는,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SUV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자 했다.”
더불어서 SPA라는 훌륭한 플랫폼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모기업이 바뀌면서 등장한 SPA 플랫폼 때문에 볼보차는 디자인 자유도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고, 그 덕분에 가장 이상적인 ‘프리미엄 비율’을 구현해낼 수 있었다고.
“볼보는 앞바퀴굴림차지만, 뒷바퀴굴림 같은 짧은 프론트 오버행과 넉넉한 휠베이스를 갖고 있어 긴 ‘액슬 투 대시’(앞차축에서 윈드스크린이 시작되는 지점까지의 거리) 비율을 갖게 됐다. 볼보에서는 이것을 프리미엄 비율이라고 한다. 모두 SPA 플랫폼 덕분이다. 신형 XC60도 SPA 플랫폼을 사용하기 때문에 프리미엄 비율을 갖게 됐다. 앞바퀴굴림 방식은 반드시 앞바퀴굴림만의 비율을 따르는 그런 시대는 끝났다.”
현재 이정현 디자이너는 선행 디자인을 진행하고 있다. 볼보자동차의 미래를 책임지게 될 또 다른 차를 위해 연구조사 및 디자인 준비를 하고 있는 것. 여기에는 전기차 같은 차세대 자동차도 포함된다.
이정현 디자이너는 볼보자동차에 입사한 지 10년도 안되어 XC60의 익스테리어 디자인이라는 막중한 업무를 성공적으로 해냈다. 한평생 자동차 디자이너로 활동해도 자신이 주도한 작품을 남기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는 “무척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그만한 실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운도 따라준 것 아닐까?
“자동차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멋진 비율을 지닌 수퍼카를 디자인해보고 싶어한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볼보의 정체성에 맞는 자동차를 계속 디자인하는 게 꿈이다.” 가장 멋진 볼보자동차를 디자인하고 싶다는 이정현 디자이너. 적어도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꿈을 이룬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