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여름 국내 출시를 앞둔 신형 S60 미디어 시승을 위해 도착한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 그곳에서 한국인 볼보 디자이너 이정현 씨를 만났다.
2010년 볼보차그룹 외관 디자이너로 입사해 2017년 등장한 신형 XC60의 메인 디자이너라는 듬직한 이력까지 추가한 이정현 디자이너. 2015년부터 2년간 진행한 볼보의 ‘Made by People’ 광고 캠페인에 출연하기도 했다. 실력파면서 동시에 스타성까지 인정받은 대표 디자이너라는 의미다.
이정현 디자이너는 건국대학교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후 자동차 디자이너의 꿈을 펼치기 위해 스웨덴 우메오 대학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자동차 디자인을 전공, 2008년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쉽지 않은 여정을 강단 있게 펼치기 시작했다. 화려한 이력과 자신이 사랑하는 지금의 자리에 서기까지 시련이 없지 않았다. 단지 그것들을 그만의 노력과 다짐으로 현명하게 헤쳐나가 성공적인 결과물로 완성했을 뿐.
Q 입사 당시 볼보 최초 한국인 디자이너였다. 나름 고충도 적지 않았을 텐데
A 처음 입사 당시 한국인은 물론 동양인 디자이너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굳이 동양인이라면 어릴 적 홍콩에서 영국에 이민 간 영국 국적 홍콩인 디자이너가 유일했다. 엔지니어와 모델러 역시 모두 백인들뿐이었다.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나만 쳐다보는 기분이었다. 2년간 스웨덴에서 석사과정을 밟으면서 영어를 사용했지만 언어에 대한 불편함도 없지 않았다. 일주일에 몇 번씩 하는 프리젠테이션 때마다 발표 내용뿐 아니라 방식까지 미리 준비하는 일도 큰 스트레스 중 하나였다.
스웨덴의 문화, 음식, 세금, 병원 및 전반적인 사회 시스템 등 학생 때 경험과 다른 부분이 매우 많았다. 업무 외에 새로 배워야 할 부분과 처리 해야 할 일은 또 다른 어려움이었다. 입사 초기에는 적응해 나간다기보다 어떻게든 버티겠다는 생각이 컸고 다행히 성공적으로 적응했다. 지금은 후배들도 많아져 한국인 디자이너 여러 명이 볼보자동차에서 일한다. 아시아 국가 중에 눈에 띄게 많다. 스웨덴 본사에 한국인 디자이너가 3명, 여기 LA 디자인센터에도 2명이 더 있다. 볼보자동차에서 한국인 디자이너가 일하는 기반을 다졌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굉장히 뿌듯하다.
Q 기계공학을 전공한 공학도가 자동차 디자이너가 됐다. 다소 독특한 이력이다. 어려움은 없었나?
A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자동차 디자인 석사 과정을 준비할 때 ‘무모한 도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보통 자동차 디자인 공부를 시작할 때 전공이 다르면 학사 과정부터 다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학사 과정부터 시작하더라도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대학교에서 디자인 공부를 시작하기는 쉽지 않다. 하물며 나는 석사과정을 목표로 했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면서도 용감한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에는 기왕 하는 무모한 도전인 만큼 최대한 무모하게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간절함이 있었기에 학비가 전혀 없어 경쟁률이 높았던 스웨덴 우메오 대학교 석사과정에 입학하지 않았나 싶다. 입학 후에는 정말로 ‘많이’ 힘들었다. 보고 배우고 느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2년 석사 과정 동안 인간답게 살아본 기억이 거의 없을 정도로 공부와 디자인 작업에만 열중했다. 볼보에 입사한 후 기계공학 전공이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엔지니어들과 협업 때 많은 도움이 됐다. 대학교 시절 공부했던 기계 관련 지식이 엔지니어 입장에서 디자인을 바라보는 넓은 시야를 만들어줬다. 덕분에 이상적인 디자인을 도출하기 위해 하나의 팀으로 함께 일해야 하는 엔지니어들과의 협업이 더 수월했다.
Q 특별히 볼보를 선택한 이유는?
A 유학 준비 당시 국내에서 북유럽 디자인은 지금처럼 크게 인기를 끌지 않았다. 유학을 준비하면서 대학원을 알아보던 중 스웨덴 디자인의 매력에 빠졌다. 학교도 스웨덴에서 유일하게 자동차 디자인학과를 갖춘 우메오 대학교 석사 과정에만 지원했다. 지금 생각하면 도박에 가까운 시도였지만 모든 역량을 집중한 준비가 전공이 달랐는데도 입학 허가를 받은 큰 이유이지 않았나 싶다. 볼보자동차는 스웨덴을 대표하는 잠재력 큰 자동차 기업이기에 꼭 일하고 싶었다. 졸업 후에도 볼보에만 지원했고 운 좋게 일할 기회를 얻었다.
Q 북유럽 디자인이 발달한 계기는 무엇인가?
A 스웨덴 환경은 춥고 척박하다. 사람들이 건물 밖보다 안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서 인테리어 디자인이 상당히 발달했다. 안락하고 따뜻한 느낌과 실용적인 디자인을 굉장히 중요시한다. 특히 척박한 환경으로 인해 딱 필요한 부분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스웨덴 철학이면서 동시에 내 디자인 철학과도 연결된다. 디자인은 기본적으로 단순할수록 더 오래가고 질리지 않는다.
Q 디자이너로서 자신만의 경쟁력을 꼽는다면?
A 여러 방면에서 하이브리드다. 일반 디자이너들과 달리 대학에서 기계를, 대학원에서 자동차 디자인을 전공했다. 자동차 분야에서 두 학문은 불가분의 관계다. 기계를 아는 디자이너는 많지 않다. 엔지니어이자 디자이너라는 말이 아니다. 디자이너이지만 엔지니어 시각에서 바라보고, 나아가 디자이너가 아닌 소비자 관점에서 보다 객관적으로 디자인을 바라보는 식견을 갖췄다. 디자이너로서 더욱 다양한 각도에서 나의 디자인 또는 다른 디자이너의 디자인을 바라보는 시야가 나만의 경쟁력이다.
한국에서 30년 가까이 살았고 10년 동안 스웨덴에서 지내면서 한국과 스칸디나비아의 아름다움을 모두 경험했다. 한국 사람들이 추구하는 미와 북유럽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바를 모두 안다. 거창하게 말하면 동서양의 조화랄까. 하이브리드 특성 덕분에 디자이너로서 더욱더 넓은 시야와 다양한 접근이 가능하다고 본다.
Q XC60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XC60은 볼보의 베스트셀러 모델이다. 어떤 비전을 제시하고자 했나?
A 작아진 90 시리즈가 아니고자 했다. 90 시리즈가 자신감 넘치고 차분하고 튀지 않는 중후한 매력이 있다면, 60 시리즈는 그런 부분을 유지하면서도 조금 더 스타일리시하고 우아하고 역동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췄다. XC60 디자인을 통해 교감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스칸디나비안 디자인의 심플하고 순수하고 궁극적인 아름다움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 역동적이고 우아한 중형 SUV이다. 크게 세 가지 요소로 설명할 수 있는데 첫째는 이상적인 비율이다.
어떠한 각도에서 보더라도 이상적인 비율을 구현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둘째는 ‘완벽한 면’이다. 이상적 비율이 전체적인 큰 그림이라면 면은 가까이서 보았을 때 느끼는 부분이다. XC60을 디자인하면서 지금 시장에 나온 어떠한 중형 SUV보다 섹시하고 우아한 디자인을 도출했다. 필요한 최소 라인만 유지하면서 더 고급스럽고 섹시한 면을 이용해 우아한 감성을 표현하려고 했다.
마지막 요소는 ‘디테일’이다. 헤드램프와 테일램프, 그릴 등은 물론이고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의 디테일도 포함한다. 보통 무광 재질 검은색 부분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예를 들면 XC60의 앞쪽 아래에는 센터 매시와 해치라고 부르는 무광 재질 검은 부분이 있다. 가까이에서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사소한 부분의 디자인과 마감에도 XC60 전체를 디자인하는 열정을 쏟아부었다. 0.1mm 단위로 수정하는 셀 수 없는 과정을 거쳐 완벽하게 마무리했다.
Q 신형 S60의 디자인 강점은 무엇인가 중요 포인트는?
A 정통 3박스 스타일 콤팩트 세단 느낌을 잘 살렸다. 특히 낮은 자세를 주목하면 된다. 낮으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자세는 스포츠 세단의 역동적인 퍼포먼스를 디자인적으로 드러낸다. 면 처리도 주요 포인트다. 신형 S60의 면은 가까이서 봤을 때 어떤 중형 스포츠 세단보다 더욱더 날렵하고 우아한 디자인을 표현한다. 특히 햇빛에 비친 면을 바라보면 빠져들 수밖에 없다. 외부 디자인을 맡은 티 존 메이어 선임 디자이너는 0.1mm 오차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완벽주의자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디테일도 본인이 생각한 방향으로 만들고자 했다. 정말 사소한 것들이지만 이러한 차이점이 모여 프리미엄 이미지가 완성된다.
Q XC60 이후 진행 중인 프로젝트는?
A 고성능 브랜드인 폴스타와 미래 볼보차의 청사진을 제시할 콘셉트카 프로젝트에 참여 중이다.
Q 그 차는 언제 볼 수 있나?
A 내년, 혹은 그 후. 현재로서는 정확히 언제라고 답하기 어렵다.
Q 볼보의 고성능 브랜드인 폴스타의 방향성과 미래 자동차 디자인 변화가 궁금하다
A 볼보의 고성능차는 앞으로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와 순수 전기차 쪽으로 향한다. 볼보자동차가 현재 그리는 고성능의 이상적인 모델은 전기차 기반 미래 고성능차라고 보면 된다. 폴스타는 독립 브랜드로서 더 ‘고급스러운 전기 고성능차’를 개발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볼보와 폴스타 디자인이 유사한 점도 많지만, 폴스타1을 비롯해 앞으로 나올 폴스타 모델은 ‘폴스타만의 디자인 언어’를 표현하려고 많은 디자이너가 노력한다.
현재 자동차 디자인은 전기차와 자율주행차 등 미래차로 가는 길목에 있다. 다양한 디자인을 시도 할 수 있는 도전과 변화의 시기다. 예컨대 순수 전기차는 내연기관 차들과 달리 엔진이 없어서 보닛과 후드를 더 낮춘 디자인을 할 수 있다. 자율주행차도 마찬가지다. 운전자가 없어도 되기 때문에 실내는 물론 겉모습도 다양하게 디자인할 수 있다. 전기차나 자율주행차 등 기술 발전은 자동차 디자이너에게 많은 자유를 준다.